천년사찰 구한 영웅의 자취
순천을 떠나 구례로 향했다. 초저녁 읍내에 도착 여관을 찾는데 내일이 장날이라 힘들게 방을 구했다. 다음날 하동 쌍계사와 화개장터 그리고 구례 화엄사로 갈 예정이다. 나는 장터 분위기도 볼 겸 거리로 나섰다. 지금은 대한민국에 도시와 시골이 따로 없다. 작은 읍에도 있을 것은 다 있다. 5일장터와 상설시장은 따로 떨어져 있다. 장터는 새로 지은 전통한옥 상점들로 깔끔하다. 어느 상인은 구례의 특색을 살린다고 새로 지었는데 손님은 줄고 융자금 갚기 바쁘다고 한다. 그는 오히려 5일장의 난장분위기가 사라진 것 같다고 걱정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속사정은 안보이고 모두 신기하게만 보였다. 구례에서는 지리산이 빤히 보인다. 지리산은 6.25 전후 10년이나 빨치산 무대로 주변지역은 낮이면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랄만큼 군경과 빨치산 사이에서 피해가 막심했다. 아직도 노인들은 당시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는다. 그만큼 아픈 상처를 속으로 삭이는 것이다. 장터 소머리국밥 맛이 끝내준다. 이튿날 아침도 여기서 식사했다. 장터에는 상인들로 분주하다. 나는 배낭을 매고 터미날로 향했다. 쌍계사로 가는 섬진강변은 만개한 벚꽃터널이 장관이다. 버스는 화개장터를 거쳐 쌍계사에 도착했다. 쌍계사는 722년 신라 성덕왕 때 창건되었다. 1300년 고찰 쌍계사의 여러 전설들은 믿기 어렵지만 선덕여왕 때 당나라에서 처음 차나무를 들여와 재배한 곳이란 기록은 있다. 쌍계사에는 신라 최지원이 쓴 진감국사 대공탑비가 국보 47호, 대웅전, 탱화, 불상 등 보물 9점이 있다. 또한 일주문 등 많은 문화재들이 있으며 나한전, 화엄전 등 35개 전각이 대웅전을 중심으로 팔작지붕과 맛배지붕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나는 공연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서둘지 않으면 조금 전 차창밖으로 본 벚꽃 십리길의 환상적인 경치가 어디로 사라질 것같은 조바심이 들었다. 그것들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닐텐데. 나는 쌍계사를 대충 보고 쫓기듯 절을 나섰다. 곧바로 화개장터에 이르는 벚꽃 십리길이 펼쳐진다. 화개천 양쪽 눈부시게 하얀 벚꽃이 터널을 이루면서 군데군데 빨간 매화와 진달래, 노란 개나리까지 어울려 꽃의 향연을 이룬다. 나는 그동안 많은 벚꽃 명소들을 보았지만 이곳 벚꽃 십리길은 차원이 다르다. 아, 조국강산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도 있었구나. 특히 화개천 건너 파란 차밭은 희고 붉은 꽃색갈과 환상적 조화를 이루면서 이곳이 우리나라 차 재배의 원조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나는 이런 길이면 십리가 아닌 백리를 걸어도 좋을 것 같다. 경치에 홀려 가다서다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화개장터다. 조선시대부터 매 1일과 6일 구례와 하동 그리고 섬진강따라 사방에서 사람이 몰려 큰 장을 이루었다는 화개장터는 6.25 후 빨치산 토벌과 근대화 물결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하동군은 화개장터 명성을 되살리기 위해 저잣거리와 난전, 대장간 등 옛 모습을 복원하여 2001년 상설시장으로 개장했다. 화개장터가 새롭게 조명된 것은 조영남 노래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한다. 화개장터는 경남 하동이지만 구례와 접경해 옛부터 경상도, 전라도 사투리가 뒤섞여 한마을처럼 어울렸다. 영호남 갈등이 심한 이때 이곳을 화합의 상징으로 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엄사 가는 길에 피아골이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부터 여순사건과 6.25 등 격동기마다 숱한 피가 뿌려진 비극의 현장이다. 특히 빨치산과 군경 모두 이곳에서 수많이 죽었다. 예로부터 피가 많이 자라 피밭골로 불렸는데 피가 血로 변한 셈이다. 나는 37년 전 뱀사골 코스로 노고단에 오른 후 화엄사를 지나 구례로 온 일이 있지만 오래되어 기억이 희미하다. 화엄사 입구는 기념품 가게, 식당, 여관 등으로 번잡하다. 화엄사는 백제 성왕 때인 544년 인도 스님 연기조사가 창건한 후 한때는 3천 승려가 살면서 화엄사상을 전파했다. 신라 때는 원효대사는 이곳에서 화랑들을 가르쳤으며 이후 여러 고승들을 배출하며 화엄사상 총본산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때 승군을 조직해 왜군과 싸웠는데 왜장 가등청정이 앙심을 품고 절을 불살랐다. 그러나 왜란 후 재건되고 숙종 때 계파선사가 현존 최대 목조건물 각황전을 건립해 선교 양종 대가람으로 자리 잡는다. 6.25 때 사찰이 소실될 뻔했으나 다행히 전투경찰대 차일혁 경무관의 슬기로운 대처로 피해를 최소화했다.
화엄사는 천오백년 고찰답게 많은 국보와 보물, 문화재를 간직한다.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담은 탱화는 국보 301호, 각황전 신라 석등은 국보 12호, 네마리 사자가 떠바친 석등은 국보 35호, 5백년 목조 각황전은 국보 67호이다. 또한 대웅전과 석탑 등 7점이 보물이다. 12미터 높이 수령 3백년 천연기념물 올벚나무는 잎이 나기 전 꽃부터 피운다. 이밖에 인간 손끝이 닿지 않은 모과나무 기둥 구중암과 나한전, 원통전 등 많은 건물과 유물이 문화재들이다. 이런 보물들이 6.25때 재로 사라질 뻔 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러나 나는 수많은 보물보다 한사람의 인간애에 감명을 받았다. 차일혁 총경은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2연대장으로 빨치산 토벌 책임자였다. 그는 빨치산과 싸우면서도 그들도 똑같이 따뜻한 피를 가진 겨레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차일혁은 사살된 적장 이현상을 섬진강변에서 예의를 갖춰 장례를 치루고 유해를 철모에 정성껏 빻아 강물에 뿌리면서 경의를 표했다. 독립운동 대선배에 대한 개인적 예의였는지는 알 수없지만 그보다는 그의 천성적 휴머니즘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상부에서 화엄사를 소각하라고 명령했을 때 "절을 태우는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세우는데는 천년 세월도 부족하다"며 지혜롭게 사찰을 지켜냈다. 화엄사 경내 공덕비에는 그가 쓴 글이 새겨져 있다.
"이른 아침 들판에 나가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 보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지리산 싸움에서 죽은 군경이나 빨치산에게 물어 보라. 공산주의를 위해 죽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죽었다 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그들은 왜 죽었는지 영문도 모른다고 할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이 싸움은 어쩔 수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여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여 벌어진 부질없는 골육상쟁 동족상잔이었다고."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제 2연대장 차일혁.
해방 후 4.3이나 여순사건, 6.25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한 이야기다. 차일혁은 16세에 일본 고등계 형사 구타사건으로 상해로 망명, 일찍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중국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과 싸웠다. 6.25 때 대위로 참전한 그는 부상으로 제대 후 전투경찰대에 특채되어 빨치산 소탕임무를 맡았다. 그가 빨치산 2천 명을 격퇴하고 칠보 수력 발전소를 사수한 일화는 유명하다. 차일혁은 임무를 마친 뒤 여러 경찰서장을 역임하고 공주경찰서장 재임 중 38세에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그는 박봉에도 불우소년들을 위한 충주 직업 소년학원을 설립하는 등 의식이 깨어있는 분이었다. 독실한 불자인 그는 이현상 사살 후 태극무공 훈장이 결정되자 수훈을 거부했다. 그는 사후 경무관에 추서되고 지금까지 많은 존경을 받는다. 나는 화엄사를 나오면서도 대사찰에 대한 감탄보다는 차일혁 개인의 훈훈한 인간애가 잔잔한 감동으로 가슴에 메아리친다. 그는 진정한 영웅이다.
(2014.6.16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