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자신의 시간에 핀다
밤이 깊어지자 연못은 검은 비단 한 폭을 펼쳐 놓는다. 낮 동안 햇빛을 받아 반짝이던 수면은 어둠을 품고 고요해진다. 사람들의 시선도 하나둘 연못 한가운데로 모인다. 오늘 밤 이곳에서 특별한 대관식이 열린다. 왕관도 보석도 없는, 단 한 송이 꽃이 주인공인 의식이다.
커다란 잎 사이로 흰 꽃봉오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빅토리아수련이다. 낮에는 단단히 닫혀 있던 꽃잎이 밤의 기척을 알아차리듯 조금씩 벌어진다. 서두르지 않는다. 누가 지켜본다고 해서 개화를 재촉하지도 않는다. 어둠이 충분히 깊어지고 자신에게 맞는 시간이 찾아왔을 때 비로소 문을 연다.
한 장, 또 한 장. 흰 꽃잎이 펼쳐질수록 어둠은 오히려 꽃을 환하게 드러낸다. 물 위에는 꽃의 모습이 고스란히 내려앉는다. 한 송이가 두 송이가 된다. 실제의 꽃과 물속의 꽃이 서로 마주 보며 밤의 시간을 건넌다. 그 모습에는 화려한 왕관보다 깊은 품격이 있다.
빅토리아수련은 남아메리카 아마존 유역이 고향인 거대한 수생식물이다. 커다란 원형 잎은 물 위에 떠서 햇빛을 받아들이고, 잎의 가장자리는 쟁반처럼 위로 솟아 있다. 잎 뒷면에는 굵은 잎맥과 가시가 촘촘하게 발달해 있다. 부드럽고 평화로워 보이는 수면 아래에는 자신을 지탱하고 보호하기 위한 치밀한 생존의 구조가 숨어 있는 셈이다.
그래서 빅토리아수련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름다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름다운 것은 반드시 연약한 것만은 아니다. 한 장의 잎이 물 위에 온전히 떠 있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수많은 조직이 제 몫을 다한다.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뿌리와 줄기와 잎은 긴 시간을 견딘다. 생명의 아름다움은 겉으로 드러난 꽃에만 있지 않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삶을 떠받치는 힘까지 합쳐져 비로소 한 송이 꽃이 된다.
빅토리아수련의 개화는 더욱 흥미롭다. 꽃은 대체로 저녁 무렵부터 피기 시작해 밤을 무대로 삼는다. 첫날의 꽃은 희고, 시간이 흐르며 분홍빛이나 붉은빛으로 변한다. 단순히 색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꽃가루받이를 위해 자신의 상태를 알리는 생명의 신호다. 향과 온도, 색의 변화까지 동원해 곤충과 관계를 맺고 다음 생명을 준비한다. 우리가 한 송이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순간에도 자연 안에서는 치열하고 정교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꽃은 우리에게 보이기 위해 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을 이어 가기 위해 피고, 그 과정이 우연히 우리의 눈에 아름답게 보일 뿐이다.
연못 한쪽에는 먼저 핀 꽃이 자줏빛으로 물들어 있다. 흰 꽃과 붉은 꽃이 한 수면 위에 놓여 있으니 마치 한 생의 서로 다른 시간이 나란히 앉아 있는 듯하다. 이제 막 시작하는 꽃과 자신의 절정을 지나 다음 단계로 향하는 꽃. 어느 쪽이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은 흔히 가장 화려한 순간만을 기억하려 한다. 청춘의 얼굴, 성공의 순간, 환호받던 때를 삶의 절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자연은 절정을 한순간에 가두지 않는다. 꽃봉오리에도 의미가 있고, 활짝 핀 꽃에도 의미가 있으며, 색이 변하고 꽃잎이 내려앉는 순간에도 생명의 이유가 있다.
빅토리아수련의 대관식이 아름다운 까닭은 어쩌면 여기에 있다. 왕관을 쓰는 순간이 생의 완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꽃이 피기 이전부터 대관식은 시작되고 있었다. 물속에서 뿌리를 내릴 때부터, 잎을 수면 위로 밀어 올릴 때부터, 밤을 기다리며 봉오리 안에 꽃잎을 접어 두었을 때부터 이미 생명은 자신의 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연에는 조급함이 없다. 옆의 꽃이 먼저 피었다고 자신의 꽃잎을 억지로 열지 않는다. 큰 잎이 옆에 있다고 자신의 잎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햇빛을 받고, 필요한 만큼 물을 끌어올리며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 인간의 삶은 자꾸 비교를 배운다. 누군가는 앞서가고 누군가는 늦었다고 생각한다. 남의 꽃이 피는 모습을 보며 아직 봉오리인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연못에 앉은 빅토리아수련은 말없이 보여 준다. 꽃마다 피는 시간이 다르고, 그 다름 때문에 연못의 밤이 오래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더욱 놀라운 것은 거대한 잎이다. 둥근 잎은 마치 초록빛 쟁반처럼 물 위에 떠 있다. 한 장의 잎이 차지하는 공간은 넓지만 다른 잎과 부딪치며 무작정 영역을 넓히지는 않는다. 물과 햇빛, 공기라는 환경 속에서 서로의 자리를 조절하며 살아간다. 연못이라는 작은 생태계 안에서 식물과 곤충, 물과 미생물은 보이지 않는 관계망으로 이어진다.
생태계에는 홀로 완성되는 생명이 없다. 꽃은 곤충을 부르고 곤충은 꽃가루를 옮긴다. 잎은 햇빛을 받아 에너지를 만들고 물속의 뿌리는 영양분을 끌어올린다. 물의 온도와 햇빛의 길이, 계절의 변화까지 한 송이 꽃의 개화에 관여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꽃 한 송이지만 그 꽃 뒤에는 수많은 생명의 관계가 있다.
그 사실을 알고 다시 꽃을 바라보니 ‘대관식’이라는 말이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이 꽃이 왕이어서 왕관을 받는 것이 아니다. 혼자의 힘으로 정상에 올라섰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존재와 연결되어 한 생을 완성했다는 의미에서 자연이 건네는 왕관에 가깝다.
수면 위 흰 꽃이 조금 더 활짝 열린다. 검은 물에 비친 반영도 따라서 넓어진다. 꽃잎 아래에는 가시 돋친 꽃받침과 줄기가 보인다. 순백의 꽃과 거친 가시가 한 몸이다. 삶도 그렇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보여 주고 싶은 꽃잎이 있는가 하면 감추고 싶은 가시도 있다. 환한 시간 뒤에는 견뎌 온 날들이 있고, 한 번의 성취 뒤에는 수없이 흔들렸던 시간이 있다. 우리는 꽃만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하지만 자연은 꽃과 가시를 따로 나누지 않는다. 둘 다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자신의 일부다.
밤은 더욱 짙어진다. 어둠 속에서 흰 꽃은 작은 등불처럼 떠 있다. 멀리 자줏빛 꽃이 또 하나의 색을 보탠다. 두 꽃 사이에는 말이 없지만 서로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다. 나는 그 앞에서 오래 머문다. 한 생명이 자신의 시간을 만나 꽃을 여는 순간을 바라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경건한 일이다. 인간은 흔히 자연을 구경한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자연 앞에서 우리가 목격자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천 년 동안 반복되어 온 생명의 방식 가운데 단 한 장면을 잠시 허락받아 바라보는 것이다.
대관식에는 박수도 음악도 없다. 축포도 없다. 대신 물이 있고 어둠이 있으며 꽃을 기다려 준 시간이 있다. 꽃은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해 왕관을 쓰지 않는다. 피어야 할 때 피었기에 이미 충분하다. 잠시 후 바람이 지나가자 수면이 흔들린다. 물속의 흰 꽃이 잘게 부서졌다가 다시 모인다. 실제 꽃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흔들린 것은 꽃이 아니라 꽃을 비추던 물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환해진다. 살아가다 보면 세상의 평가라는 수면이 흔들릴 때가 있다. 나의 모습이 일그러져 보이고 내가 걸어온 길까지 의심하게 되는 날도 있다. 하지만 물결이 흔들린다고 꽃의 본래 모습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빅토리아수련은 오늘 밤도 자신의 방식으로 핀다. 어둠 속에서 흰빛을 열고, 시간이 흐르면 다른 색으로 옮겨 간다. 그리고 다음 생명을 준비한다. 피고 지는 모든 과정이 하나의 완전한 생이다. 연못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돌아본다. 검은 수면 위 흰 꽃 한 송이가 여전히 빛나고 있다. 왕관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알 것 같다. 자연의 대관식은 가장 높이 오른 생명에게 왕관을 씌우는 의식이 아니다. 제때 자신의 꽃을 피워 낸 모든 생명에게 조용히 건네는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