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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욕의 끝
정종(定宗)은 전비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소생으로 태조의 둘
째 아들이다. 휘(諱)는 경( )이고 자(字)는 광원(光遠)이며 초휘(初諱)는
방과(芳果)였다.
고려 공민왕 육년(西紀 1,357년) 칠월 삭일(朔日)에 함흥군 귀주동(咸興君
歸州洞) 사저에서 출생하였다. 고려 시절에 벼슬이 장상(將相)에까지 이
르렀고 태조 즉위와 동시에 영안군(永安君)으로 봉해졌다.
태조 칠년 무인(戊寅=西紀 1,398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동년 구월
오일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태조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았다.
정종 이년 경진(庚辰=西紀 1,400년) 십일월 십삼일에는 왕위를 태종에게
전했고 세종 원년 기해(己亥=西紀 1,419년) 구월 이십육일에 육십삼세를
일기로 인덕궁(仁德宮)에서 세상을 떠났다.
재위(在位) 이년이었고 재상왕위(在上王位) 십구년이었다. 슬하에는 십오
남, 팔녀가 있었다.
때는 이조 제이대 임금 정종(定宗) 이년 경진(庚辰)이었다. 방원의 넷째
형 되는 방간은 평소에 이런 생각을 일쑤 했다.
‘정종에게는 적사(嫡嗣)가 없다. 익안군 방의가 왕세자로 됨직하지마는
용하기만 해서 물망에 오를 것 같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왕세자
자리가 나에게 올 것 같다. 그러나 좀 배움이 적어서 걱정이다. 저 방원이
는 사람됨이 영특해서 사람이 모두 방원에게로 모여든다. 그러나 어디 보
자.’
방간은 이와 같은 생각을 처조카(妻姪) ㅡ이래(李來)ㅡ에게 들려 주었다.
이래란 사람은 우현보의 문하생이었으므로 들은 대로 곧 우현보에게 얘기
했다.
"선생님! 방간이 이달 그믐에는 방원을 상대로 크게 거사하겠다 합니다.
이것을 내버려 두는 게 좋을까요?"
우현보는 이 말을 듣기가 무섭게 아들 홍부(洪富)로 하여금 방원에게 알리
게 하였다.
방원은 이 말을 듣자 하윤 이무 등과 함께 대비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때 방간은 자기 휘하의 오용권(吳用權)을 시켜서
"정안군(靖安君=芳遠)이 나에게 해를 가하려 하기 때문에 부득이 군사를
내놓아 응전하려 합니다."
정종에게 고하게 하였다.
정종은 이 말을 듣자 노발대발하면서
"뭣이라? 거 무슨 허황된 망발이냐?"
하고 지신사(知申事) 이문화(李文和)에게 다음과 같은 명을 가지고 방간저
로 가게 하였다.
《당장 군사를 해산시키고 대궐로 들어오지 않으면 너에게 큰 해가 미칠
것이다.》
그러나 문화가 채 도달하기 전에 인척인 민원공(閔原功) 등의 망동으로 방
간의 아들 맹종(孟宗)이며 그의 휘하 수백명이 갑옷 투구를 하고 나덤비기
시작하였다.
문화는 정종의 교지를 전하였으나 방간은 이에 불응하였다. 그리하매 방원
도 별 도리가 없어 이숙번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항전하였다.
항전의 결과 방원군의 승리로 끝나 방간까지도 포로가 되었다. 방원은 이
숙번으로 하여금 방간이 난을 일으키게 된 연유를 묻게 하였다. 이에 방간
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박포(朴苞)가 나에게 {공에 대한 정안군의 태도가 이상야릇하니 반드시
무슨 변란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까 공이 변란을 당하기 전에 먼저 변란
을 가하는 것이 득책일 것이다.} 하고 말했기 때문에 내가 난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무인정사(戊寅定社)가 있은 후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는데 지중추원사
(知中樞院事) 박포는 남보다 공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남의 아래
에 있게 되었다. 이래서 항상 불평과 불만을 품고 상을 받은 사람들을 헐
뜯으며 저주하는 언동을 삼가지 않고 지냈다.
방원은 정종에게 이를 알려 죽주(竹州)로 귀양을 보냈으나 특사를 입어 죽
주에서 돌아 온 후에도 여전히 그 마음을 버리지 않고 무슨 변을 일으켜보
려고 방간저에 드나들었다. 박포는 어느날 방간을 상대로 세상 얘기를 하
다가 끝으로 방간에게 물었다.
"공에게 무슨 뾰죽한 수가 생기지 않는 한 정안군을 이기지 못할 것 입니
다. 다시 말하면 정안군의 군사는 남달리 강한데다가 사람이 많이 따르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못당하고 말지요. 그러니까 무슨 방법을 써서 정안군
을 일격(一擊)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공은 이에 대하여 어찌 생각하십
니까? "
요렇게 꼬득였다.
방간은 이 말에 귀가 솔깃해서 어느날 방원을 격살하기로 하고 사람을 보
내 방원을 자기 집으로 청하였다. 정안군 방원은 청한 날에 방간의 집으로
가려하였으나 별안간 병이 생겨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 판교서감사
(判校書監事) 이래(李來)는 방간에게 따져 물었다.
"공은 소인(小人)의 말만 듣고서 골육(骨肉)에게 해를 가하려 하시오? 좀
더 생각해 보시오. 정안군은 이 나라에 있는 오직 하나의 대공신이요. 오
늘에 있어 개국(開國)하고 정사(定社)한 사람이 누군줄 모르시오?"
방간은 이 말에 발끈하여 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이 때 내시 강인부는 몰래 정안군저를 찾아갔다.
"비옵건대 저하(低下)께서는 오시지 마십시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하! 회안군(방간)은 사리를 모르시는 분이 올시다. 그러나 방임해서
는 안 될 것이오니 마땅히 대비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방간이 정말 거병(擧兵)함에 이르자 의안군(義安君) 화(和)와 완산군(完山
君) 천우(天祐) 등은 방원의 집으로 가서 권하였다.
"방간이 결국 거병하였소. 바라건대 이에 대비해야 하지 않겠소?"
이때 방원은 눈물을 흘리면서
"내 무슨 면목으로 외인을 본단 말이요?"
하고 나서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의안군 화는
"방간의 태도가 흉험하기 짝이 없는데 어떻게 내버려 둡니까? 소절(小節)
을 지키다간 종사(宗社)의 대계를 그르치게 될 것이오니 이를 살피십시
오."
하며 외청으로 나와 주기를 굳이 청하였다.
그리하여 천우는 방원을 붙들고 나왔고 또 화는 갑옷을 입혀서 마상에 오
르게 하였다.
그런데 신하들 중에는 박포와 화산군(花山君) 장사길(張思吉)이 있어 방간
을 도왔을 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방원을 도웁고자 나섰다. 이중에서
승선(承宣) 이숙번이 맨 먼저 뛰어나가 역전분투하였다.
방간 측에도 백발백중 활의 명수인 방간의 아들 맹종(孟宗)이 있었지만 병
으로 인하여 살 한 발도 쏘지 못하였다. 모든 항전 조건이 방간군에게는
불리했으므로 방간은 결국 참패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이 때 방원은 싸움에서 방간이 살해를 당할 것 같아 친히 나서서 소리 질
렀다.
"방간 왕자는 나의 형님이시다. 그 왕자께는 손도 대지 말라!"'
이 소리가 방간의 귀에도 들어갔는지 방간은 타고 있던 말을 달려서 성균
관 뒷골목으로 가 활과 살을 다 내버리고 누워 있었다. 추병(追兵)이 그
를 생포하자 방간은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나를 이렇게 꾀인 자는 박포이다."
태조는 이 때 상왕으로 송도에 머물러 있었는데 방간이 거병하였다는 말을
듣고 탄식했다.
"그 소 같은 인간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이 싸움이 끝나자 박포에게는 참형(斬刑)이 내려졌고 재산은 적몰당했으며
자손은 금고(禁錮)의 형을 당하고 말았다. 또 방간에게는 유형(流刑)이
내려 토산(兎山)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태종이 등극하자 여러 신하는 다투어 가면서 간청했다.
"방간에게 참형을 가(可)함이 옳은 줄 아옵나이다.."
그러나 방원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방간은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맹종은 세종조에 이
르러 사헌부 및 사간원의 진언에 의하여 약을 마시고 죽게 되었던 것이다.
정종의 비(妃) 정안왕후(定安王后) 김씨는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문하좌
시중(門下左侍中)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천서(天瑞)의 딸로 고려 공민왕
사년 을미(乙未=西紀 1,355년) 정월 구일에 탄생하였다.
태조 칠년 무인(戊寅)에 덕빈(德嬪)으로 책봉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덕비
(德妃)로 다시 책봉되었다.
태종 십이년 임인(壬寅) 육월 이십오일 무인(戊寅)에 인덕궁(仁德宮)에서
별세하였는데 당시의 춘추는 오십팔세였다. 슬하에는 아들도 딸도 없었
다.
그러나 그 대신 후궁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아들이 열다섯 옹주가 여덟으로
도합 스물세남매에 이르렀다.
제 一남 의평군(義平君)
제 二남 순평군(順平君
제 三남 금평군(錦平君)
제 四남 선성군(宣城君)
제 五남 종의군(從義君)
제 六남 진남군(鎭南君)
제 七남 수도군(守道君)
제 八남 임언군(林堰君)
제 九남 석보군(石保君)
제 十남 덕천군(德泉君)
제 十一남 임성군(任城君)
제 十二남 도평군(桃平君)
제 十三남 장천군(長川君)
제 十四남 정석군(貞石君)
제 十五남 무림군(茂林君)
제 一녀 함양옹주(咸陽翁主)
제 二녀 숙신옹주(淑愼翁主)
제 三녀 덕천옹주(德川翁主)
제 四녀 고성옹주(高城翁主)
제 五녀 상원옹주(祥原翁主)
제 六녀 전산옹주(全山翁主)
제 七녀 인천옹주(仁川翁主)
제 八녀 함안옹주(咸安翁主)
그러나 이십삼인의 아들 딸들은 후궁 한 사람에 의하여 출생된 것은 아니
다. 정종조에 있어서 후궁으로 뚜렷한 존재가 되었던 궁녀는 다음과 같
다.
一, 숙의 지씨(淑儀池氏)
二, 숙의 기씨(淑儀奇氏)
三, 숙의 문씨(淑儀文氏)
四, 숙의 이씨(淑儀李氏)
五, 숙의 윤씨(淑儀尹氏)
그런데 내명부(궁녀)로서 숙의(淑儀)가 되면 옛날에는 정이품(正二品)의
품계를 받았다. 이는 임금으로부터 상당한 총애를 받지 않고서는 일어지
지 않았다.
위에 말한 다섯 숙의 중 제일 정종의 사랑을 받고 지내던 숙의는 지씨였고
다음으로는 기씨, 또는 윤씨였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특별한 품(品)을 갖지 않은 궁녀라도 임금과 가까이
할 수는 있었다.
이것이 증거로 위에 말한 덕천옹주, 고성옹주, 상원옹주, 함안옹주 등의
생모(生母)가 명시(明示)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옛날 암흑시대 곧 전제군주 시대에는 대궐 안에 수많은 궁녀를 두
었다. 정말 삼천이나 되는 궁녀를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궁녀를 많이 두
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궁녀를 두었을까? 군주의 위안을 위하여 두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하여간 정종의 경우를 보면 이것이 다행한 점도 없지 않다. 왕비 김씨는
오십팔 재세(在歲)중 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딸 하나도 출산하지 못하였으
나 다행히 대궐 안에 궁녀들이 있었기 때문에 후궁의 소생이었지만 열다섯
의 아들과 여덟의 딸을 슬하에 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정종 시절
에 여난이 없었다는 것은 특기하여 둘 만한 일이다.
태종은 태조의 전비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으로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다.
휘는 방원(芳遠)이라 불렀다. 고려 공민왕 십육년 정미(丁未=西紀 1,367
년) 오월 십육일에 함흥 귀주동(咸興歸州洞) 사저에서 탄생하였다.
임술(壬戌)에는 고려의 진사(進士)로 발탁되었다가 계해(癸亥)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밀직사(密直司) 대언(代言)에 이르렀고 태조가 즉위하자
정안군(靖安君)으로 봉해졌으며 정종 일년 경진(庚辰)에는 왕세세로 책봉
되었다. 그리고 동년 십이월 십삼일에는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선양(禪讓)을 받았고 무술 팔월 팔일에는 세종에게 왕위를 전해 주고는 세
종 사년 임인(壬寅) 오월 십일에는 천달방(泉達坊) 신궁에서 오십육세를
일기로 승하(昇遐)하였다.
태종은 이씨조선의 제 삼대 임금이다. 아버지인 태조가 의주에서 돌아오신
뒤 부터는 태조를 도와 이씨 와조를 세움에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생각
하면 태종은 개국공신 중의 공신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태종은 창업에 있어서만 공로자가 아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잘 수성
(守成)하는데 있서서도 큰 공이 있었다. 예를 들어 말하면 태종은 세아들
중 장자 차자를 젖혀놓고 셋째 아들 세종을 임금으로 세워 나라를 다시리
게 하였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태종이 얼마나 수성에 전심전력을 기울였
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요약해 말하면 태종은 이씨 조선을 창업함
에 있어서나 수성함에 있어서 여러 임금 중 가장 훌륭한 임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주 태종을 위하여 가석한 임금이 되기 전에 신덕왕후 소생의 두
왕자 방번, 방석을 처참히 죽인 것이었고, 나아가서는 임금이 된 후에도
가끔 옥사(獄事)를 일으켜 사람을 많이 죽게 한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태종으로 하여금 그런 끔찍한 일을 하게 하였을까?
태종의 비(妃) 원경왕후(元敬王后) 민(閔)씨는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 여
흥부원군(驪興府院君) 문도공(文度公) 제(霽)의 딸이다. 고려 공민왕 십
사년 을사(乙巳=西紀 1,365년) 7월 11일에 송경(松京) 철동(鐵洞) 사제(私
第)에서 출생하였다.
태조 원년 임신(壬申=西紀 1,392년)에 정녕옹주(靖寧翁主)라 봉했고, 정종
이년 경진(庚辰)에 정빈(貞嬪)이라 책봉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정비(靜妃)
로 봉했다. 세종 이년 경자(庚子) 칠월 십사일에 수강궁 별전(壽康宮別殿)
에서 오십육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는데 슬하에는 사남사녀가 있다.
閔妃所生의 王子와 公主
一남 양녕대군(讓寧大君)
二남 효녕대군(孝寧大君)
三남 충녕대군(忠寧大君)
四남 성녕대군(誠寧大君)
一녀 정순공주(貞順公主)
二녀 경정공주(慶貞公主)
三녀 경안공주(慶安公主)
四녀 정선공주(貞善公主)
後宮所生의 王子와 翁主
一남 경녕군(敬寧君)
二남 성녕군(誠寧君)
三남 온녕군(溫寧君)
四남 근녕군(謹寧君)
五남 혜녕군(惠寧君)
六남 희녕군(熙寧君)
七남 후녕군(厚寧君)
八남 익녕군(益寧君)
一녀 정혜옹주(貞惠翁主)
二녀 정신옹주(貞信翁主)
三녀 정정옹주(貞靜翁主)
四녀 숙정옹주(淑貞翁主)
五녀 소선옹주(昭善翁主)
六녀 숙혜옹주(淑惠翁主)
七녀 숙녕옹주(淑寧翁主)
八녀 소숙옹주(昭淑翁主)
九녀 숙경옹주(淑慶翁主)
十녀 경신옹주(敬愼翁主)
十一녀 숙안옹주(淑安翁主)
十二녀 숙근옹주(淑謹翁主)
十三녀 숙순옹주(淑順翁主)
모두 이십구명에 달한다. 이중에서 민비의 소생 팔남매를 제하면 후궁에서
만 출생한 아들 딸들이 이십일명에 달하는 셈이다. 이 후궁 중에서 소생이
가장 많은 사람이 신빈(信嬪) 신씨(辛氏)였고 그 다음으로는 안씨(安氏)
및 효빈(孝嬪) 김씨 그리고 숙빈(淑嬪) 최씨였다.
그리고 태종의 후궁으로 어느 때나 대령하고 있던 미인들은
一, 신빈(信嬪) 신씨(辛氏)
二, 숙빈(淑嬪) 최씨(崔氏)
三, 효빈(孝嬪) 김씨(金氏)
四, 의빈(懿嬪) 권씨(權氏)
五, 소빈(昭嬪) 노씨(盧氏)
그리고 이외에 안씨(安氏)와 이씨(李氏)가 있어 태종의 총애를 받고 지냈
다. 그런데 빈(嬪)이란 것도 내명부의 품계를 말하는 것인데 빈(嬪)이 되
면 정일품(正一品) 대우를 받게 된다.
이것은 무슨 특별한 공로가 있지 않으면 얻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10 ㅡ 태종 (咸興差使)
정종(定宗)이 임금의 자리에 나아가자 방원은 동궁으로 책립되었다.
정종의 비(妃) 김씨는 왕자의 난을 생각해서 자나깨나 정종에게 간청했다.
"상감마마, 동궁의 눈을 조심해 보시옵소서. 입궐할 때마다 그 기색이 무
엇을 구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루 바삐 임금의 자리를 내주시와 그 마
음을 편케 하소서."
마침내 정종은 임금의 자리를 방원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런 것으로 미루
어 방원의 야심이 어떠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방원은 결국 경북궁에서 왕
위(王位)에 오르게 되니 이가 바로 이조 제 3대 임금 태종(太宗)이다.
태종은 임금으로 있었음이 2년에 불과한 정종을 추존(追尊)하여 상왕(上
王)으로 태조를 추존하여 태상왕(太上王)으로 모시었다. 그러나 태조는
태종의 소행을 생각하고 내주어야 할 대보(大寶=옥새)를 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신하들은 모두 다 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태조는 사실 두 왕자를 잃은 후부터 마음에 상처가 생겨 태종을 사갈(蛇
蝎)과 같이 미워하였다. 이와 같이 미워한 나머지 태상왕의 자리를 헌신
짝같이 내버리고 함흥으로 가 버렸다. 태종은 부왕 태조가 함흥으로 물러
간 후부터 이것, 저것이 걱정되어 자주 중사(中使)를 보내어 문안을 하곤
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문안사를 보기만 하면 태종이 더욱 미워졌다. 따라서 문안
사를 화살의 세례만 받고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말았다. 태종의 문안사
는 가기만 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나가서 안
돌아오는 사람이 있게 되면 함흥차사(咸興差使)가 됐나보다 하고 농담을
하였는데 오늘에도 이 말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사람으로 성석린(成石璘)은 태조의 옛날 친구였다.
그는 태종에게 나아가
"신이 태조의 행재소(行在所)로 가 인륜의 도를 역설하여 태조의 마음을
돌리도록 하겠나이다."
하고 가기를 자청하였다.
그리하여 석린은 나그네처럼 몸차림을 한 후 백마를 타고 나섰다. 그는
거의 목적지에 도달하자 말에서 내린 후 불을 피우면서 밥짓는 시늉을 하
고 있었다. 때마침 태조는 이를 바로보고 중관(中官=내시)으로 하여금 가
보게 하였다.
중관이 석린을 찾아보고 말을 걸었다.
"뭣을 하시는 것이요?"
"나는 무슨 볼일이 생겨 여행을 하는 도중인데 날이 저물어 말에게 먹이를
주고 여기서 하룻밤을 세우려 하는 것이요."
석린의 대답을 듣자 중관은 더 이상 묻지를 않고 돌아와 그대로 태조께 고
하였다.
태조는 이 말을 듣고 만면에 희색을 띠우고
"알겠도다. 그 사람을 불러오라."
또 중관을 보냈다. 석린은 중관의 인도를 받고 태조를 만나게 되었다. 태
조를 만나게 된 석린은 인륜의 도를 들어가며 태조께 간하였다. 태조는
이 말을 듣기 무섭게 얼굴빛을 고치고 고함을 쳤다.
"그대는 누구를 위해서 하는 말인가? 그대의 임금을 위해 하는 말은 듣기
도 싫다. 물러가라!"
석린이 여전히 말을 이어
"신이 참말로 지금의 주상(主上)을 위해서만 하는 말일 것 같으면 신의 자
손이 꼭 실명하여 장님이 될 것이올시다."
맹세까지 하였지만 태조는 결국 석린의 말도 듣지 않았다.
태조가 서울을 떠나 울화를 소산(消散)시키고 있던 곳은 태조의 구저(舊
邸)로 여기서 몇 해를 보내자 태종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신하들도 황송
한 생각을 억제할 수 없었다.
"상감마마! 무학대사는 부왕 태조와 친교가 있던 사람입니다. 태조께서는
일찍이 무학대사를 스승으로 모신 일도 있었으니 대사를 문안사로 보내셔
서 선처케 하시면 태조께서도 응하실 것 같습니다."
한 신하가 간곡히 태종에게 간하자 태종은 특사(特使)를 보내 무학대사를
불렀다. 무학은 태종 앞으로 나와 태조에 대한 얘기를 들은 다음 태종에게
말했다.
"상감마마, 부자 사이에 어디 이런 일이 또 있겠습니까? 저 같은 몸이 무
슨 능력이 있어 태조로 하여금 회가(回駕)하시게 한단 말입니까? 그런 말
씀은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태종의 태도가 더욱 친절하고 더욱 공손해지자 수월치 않은 무학이
었지만 불응으로만 고집할 수 없어 마침내 태종의 청을 받아가지고 함흥으
로 갔다. 함흥에 도착한 무학은 태조에게로 나아가 내함(來咸)의 인사를
올렸다.
무학의 인사를 받은 후
"대사께서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웬일일까? 대사도 방원이 놈을 위해 온
것이 아니오?"
태조가 이렇게 묻자 무학대사는 파안대소(破顔大笑)하면서 그럴 듯이 대답
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소승이 상감마마와 친교를 맺은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소승이 지금 온 것은 옛날을 회상하고 하루만이라도 더
마마의 얘기벗이 되고 싶어서 온 것이올시다."
태조는 이 말을 듣고야 안심을 하고 자기방에서 자도록 하였다. 무학은
태조 방에서 유숙하는 동안 한 번도 태조의 잘못을 들어 말한 일이 없이
태연스럽게 수십일을 지냈다. 태조는 무학과 태종과의 사이에 무슨 일이
없다고 생각하자 무학을 더욱 신뢰하고 지냈다.
그러자 무학은 어느날 밤중에 기회를 타서 태조에게 간곡히 진언 하였다.
"마마께서는 왜 여기에 와서 계십니까? 태종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
고 있습니다. 그러나 태종도 마마의 귀여운 아드님이 아닙니까? 매우 어
려운 말씀이오나 보위(寶位)를 맡길 만한 아드님이 이 아드님밖엔 없지 않
습니까?
만약 이 아드님을 그렇게 대접하신다면 마마의 일평생 고심해 이룬 대업을
누구에게 맡기려 하십니까? 딴 사람에 이를 맡기시는것보다 마마의 혈육
에게 맡기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오늘날 천하가 좀 안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안에 있어서는 건국의 중
신이 없어지고 밖에 있어서는 실의(失意)한 자들이 칼을 갈고 있지 않습니
까?
마마! 십분 생각하시어 행하십시오."
그제서야 태조는 이 말을 그럴듯하게 듣고 대답했다.
"말인즉 옳구만.. 어디 생각 좀 해보고...."
"그러시면 심사숙려하시고 하루 바삐 환궁하시도록 하옵소서."
무학은 때를 놓치지 않고 권고를 거듭했다.
무학의 끊임없는 설파(說波)에 태조도 맘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며칠이 지
나자 그만 손을 들고 말았다.
태조가 함흥에서 환궁하기로 되자 태종은 성밖으로 나아가 맞이하기로 결
정하였다. 궁중은 장악을 준비하기에 바빴다.
이때 하륜(河崙) 등 여러 사람은 태종께 간곡히 권고했다.
"태상왕의 노여움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을 처리
하는데는 어느 때나 원려(遠慮)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차일(遮日)의
고주(高住)는 꼭 아름드리 대목을 쓰셔야 합니다."
태종도 이 말을 듣고 열 아름이나 되는 대목을 써서 고주를 세웠다.
태조는 차일이 쳐진 곳을 바라보기가 무섭게 숨어있던 분노가 얼굴에 나타
나기 시작하더니 지니고 있던 강궁 백우전(强弓白羽箭)을 꺼내어 태종을
목표로 한 대를 쏘았다. 태종은 당황하여 얼떨결에 고주 뒤로 은신하자 화
살은 고주에 박혀버렸다.
이를 본 태조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할 수 없다. 하늘이 이렇게 만드는 것 같다."
태조는 가지고 있던 국보(國寶=옥새)를 태종에게 던져 주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 이것이 아니냐? 당장 이것을 가지고 가거라."
태종은 눈물을 머금고 나와 옥새를 받은 후 뒤를 이어 대연(大宴)을 베풀
었다. 잔치 도중 태종이 태조의 만수무강(萬壽無疆)을 비는 뜻에서 잔을
올리려 할 때 하륜은 역시 태종에게로 나아가 진언했다.
"상감마마! 상감께서는 술통이 있는 곳으로 가셔서 잔에 술만 따뤄 놓으시
고 이를 중관에게 주어서 올리게 하는 것이 좋겠나이다."
태종은 그의 말대로 중관으로 하여금 술잔을 들어 태조에게 권하게 하였
다. 태조는 그 술을 받아서 다 마신 후 웃음을 띠우고 소매 속에서 철여의
(鐵如意)를 꺼내 놓고
"흐음.. 하늘의 뜻이 그러한 모양이다. 할 수 없도다.."
탄식만 연발하고 말았다.
그런데 무엇이 일대의 영걸 태조로 하여금 서복(庶腹)의 말자(末子)를 세
자로 책봉케 했으며 또 유공한 왕자였던 태종을 백우전으로 또는 철여의로
죽여 없애려 하였던가?
이는 다름이 아니었다. 애처(후일의 신덕왕후)에 대한 편애(偏愛), 말자
방석에 댄한 편애가 태조로 하여금 현명치 못한 행위를 감행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태종에게 개죽음을 하고만 정도전과 남은의 약전(略傳)을 간단히 써서 그
인물됨을 알아 보기로 하면....
ㅡ 鄭道傳의 略傳 ㅡ
정도전은 봉화(奉化)사람으로 고려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일찍이 목은(牧隱) 문하에서 수업하여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신우왕(辛禑王) 때에 설화(舌禍)에 걸려 회령(會寧)에서 귀양살이를 하다
가 특사를 받고 돌아와 삼각산 밑에 집을 짓도 살며 이때 호를 삼봉(三峰)
이라 자칭했다.
임신(壬申)에 이르러 이조 개국에 큰 공을 세웠으므로 봉화백(奉化伯)이란
작호를 받았고 동시에 한양(서울)으로 자택을 옮겼다.
태조는 어느 때 도전에게
"과인에게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모두 경(卿)의 공이요."
하며 도전을 칭송하였다.
그러다가 방석, 방번의 난이 있을 때에 도전은 선두에서 일했으므로 정안
대군 방원에게 붙잡혀 자기는 물론 아들 유영(遊泳)도 참살을 당하였다.
도전의 저서(著書)로 삼봉집(三峰集)이란 책이 전해지는데 이것은 심(心),
리(理), 기(氣)에 대하여 연구한 것 3편이었다. 이외에 경제문감(經濟文
鑑), 경국전(經國典) 등이 세상에 전해졌다.
그의 슬하에는 네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진(津)은 판사(判事)로 있었고
그의 아들 문형(文炯)은 문과에 급제하여 연산주 시절에 우의정(右議政)이
되었고 중종(中宗)이 반정하자 벼슬이 영부사(領府事)가 되었는데 시호(諡
號)를 양경(良敬)이라 불렀다.
ㅡ 南誾의 略傳 ㅡ
남은(南誾)은 영의정(領議政) 남재(南在)의 아우로 사람됨이 호매(豪邁)하
고 기계(奇計)를 좋아하였다. 신우왕 때에 왜구가 삼척(三陟)을 쳐들어오
자 남은은 자진하여 삼척으로 가서 군사를 모집하여 왜적을 도륙하였다.
그리고 태조를 따라 위화도(威化島)로 갔다가 회군책(回軍策)을 올렸다.
이 공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고려때의 밀직부사란 마을의 두 번째 어른)
가 되었으며 태조가 개국함에 이르러 일등공신으로 뽑혀 판중추부사(判中
樞府事)가 되었다.
한때 태조는 여러 신하에게 대하여
"과인에게 남은과 조인옥(趙仁沃)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대없이 성취되지
못했을 것이다."
고 말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무인년(戊寅年) 곧 태조 7년에 도전과 함께 세자 방석을 도우려 하
다가 일이 발각되어 방원에게 참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후에 세종이
"남은에게 죄가 없지는 않으나 그래도 큰 공이 있는 사람이다."
하여 그에게 강무(剛武)란 시호를 내리고 또 태조묘(太祖廟)에 배식(配食)
케 하였다.
태조는 고려조를 뒤엎고 왕위에 오른 후부터는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그
걱정이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후예가 무슨 일을 일으켜 다시 고려를
세우려 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 연유로 태조는 즉위한지 3년쯤 되어서 고려 태조의 후예로 거물급(巨
物級)에 속하는 사람들을 아무 죄없이 무인도로 추방하려 했다.
이때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은 그 거물급 왕씨 ㅡ왕강(王康), 왕
승보(王承寶), 왕승귀(王承貴), 왕융(王 ) ㅡ들을 섬으로 추방하는 것에
대하여
"주상전하! 상감께서 이 사람들을 지나치게 사랑하시고 지나치게 후히 대
접하시지만 저들은 상감의 애호와 후대를 은혜로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살
피셔야 하겠습니다. 그중의 강은 지모(智謀)가 백 사람 천 사람에 뛰어나
는 인물이옵고, 또 그 중에 승보, 승귀는 용기와 담력이 만인에 뛰어나는
인물입니다. 이들이 서울에 있게 되면 반드시 무슨 일을 저질러서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
하고 진언하였다.
'오늘날 왕조의 여족(餘族)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반드시 후환이 있게 될
것이다. 이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는 다 죽여 없애는 것이 득책일 것이
다.'
이런 결과로 아무 명분도 없이 사람을 마음대로 죽일 수 없었으므로, 헤엄
에도 익숙하고 또 배도 잘 다루는 사람들을 뽑아서 그들에게 왕씨들을 꼬
여내게 하였다. 그래서 이자들은 여러 왕씨에게
"상감마마께서 왕성(王姓)을 가진 어른을 모두 섬으로 옮겨가 사시게 하기
위하여 저희들을 출동시켰습니다. 별 생각 마시고 배를 타 주시면 적당한
섬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런 권고에 왕씨들은 살 곳이 생긴 것으로 생각하고 기쁨에 넘쳐 앞을 다
투어서 배를 탔다.
그러나 배가 중양(中洋)에도 채 못 이르러 선주에 있던 선인(船人)들은 배
밑을 뚫어 놓은 후 슬그머니 해저(海底)로 들어갔다. 그러자 해수가 배 안
으로 들어와 당장 바닷속으로 침몰하게 되었다.
이때 왕씨와 사귐이 있던 어느 중(僧)이 해안(海岸)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큰 소리를 내어 안타까이 부르짖었다.
"여러 왕씨 어른들! 배가 당장 바닷속으로 침몰하게 되었소. 당장 어복
(漁服)에 장시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씨들은 당초부터 헤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저 죽는 시
간만 기다리면서 승의 부르집음에 답하여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시를 읊
었다.
聲柔櫓滄波外
어느덧 놋소리 나더니 배 창파 밖으로 왔네
縱有山僧奈爾阿
산승이 있은들 어찌하리!
중은 그들이 불쌍해 통곡을 하며 돌아 갔다.
그런데 왕씨가 바다에 침몰되었을 때 태조는 꿈을 꾸었다. 고려 태조 왕건
이 칠장지복(七章之服=王侯의 禮服)을 입고 나타나
"내가 삼한(三韓)을 통합하였음이 그 공은 이 백성들에게 있다. 네가 만약
나의 자손을 도륙할 것 같으면 오래지 않아서 그 앙화를 받고야 말 것이니
너는 이를 명심해 두라!"
하면서 노호(怒號)하였다.
태조는 이 말에 놀라 왕씨를 처치하는 생각을 고쳐 갖기로 하였다.
그 후... 태종조(太宗朝)에 이르러서도 왕건의 후예로 민간에 숨어 있는
자가 있었다.
이때 이조의 대간(臺諫=사헌부, 사간원)은 태종께
"이자들을 죽여 없애야만 후환이 없어지나이다."
하고 극간하였지만 태종은 다음과 같은 교지(敎旨)를 내렸다.
"제왕으로 나서게 되는 것은 오로지 천명에 의한 것이다. 왕씨의 후예를
도륙한다는 것은 태조의 본의가 아니었다. 이 뜻을 받들어 왕씨의 후예로
생존해 있는 자를 안심하고 생업에 힘쓰게 하라."
고려의 종실(宗室)인 왕휴(王 )의 서자(庶子)는 민간에 살고 있었다. 이를
듣게 된 지신사(知申事) 김여지(金汝知)는 사실을 밝히려고 문초하였는데
항간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태종은
"부왕(父王) 태조께서 개국하실 때에 왕씨가 살게 되지 못할 것이란 말은
태조께서 말씀한 것이 아니다. 실상은 한두 대신들이 만들어낸 말이다.
옛날부터 역성수명(易姓受命)한 제왕중에는 전조의 후예를 봉하여 작호를
주기도 하고 혹은 고관을 주어 그의 어진 점을 길이 전하게 하였다. 다시
말하면 역성수명자로서 전조의 후예를 전부 도륙한 일이란 일찍이 없었다.
대간이 죽여 없애라는데 대해서 과인은 다시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옛날
부터 제왕이 일성(一姓)으로 천지와 더불어 종시한 일은 없다. 오늘의 이
씨(李氏)가 인정(仁政)으로서 백성에 임하면 백 왕씨(百王氏)가 있을지라
도 걱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악정으로서 임하면 왕씨가 아닐지라도 따로
이 수명자가 생겨 나라가 위태해질 것이 아니냐?"
하고 다음과 같은 하교(下敎)를 내렸다.
"금후 왕씨의 후예로서 자수를 하거나 또는 사람의 고발에 의해서 알려진
자가 있으면 그들의 말을 듣고 살기 편한 데에 거주케 하며 동시에 생업에
전념케 하라."
그리고 태종은 또 다시 말을 이어
"자고로 처음 왕업을 이룩한 자는 전조의 후예가 무슨 일을 저지를까 걱정
하고 여러 가지로 의심을 품고 전조의 후예를 모두다 전제(剪除)하려 하였
다.
그러나 과인은 그런 생각은 갖지 않고 있다. 천명에 의하여 한 나라의 임
금이 된 과인은 이 강토 안에 있는 자를 모두 다 과인의 적자(適子)로 보
며 동시에 일시동인(一視同仁)하여 천의에 보답하려 한다.
이미 공양왕(恭讓王)으로 하여금 자기 마음대로 편안한 데서 살게하여 처
자와 비복(婢僕)이 여전히 한군데에 모여 단란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그
런데 다만 그 족속이 섬으로 들어가 고생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이를 불문에 붙일 수 없다. 저 거제도(巨濟島)에 있는 자들을 육지
로 나오게하여 각군 각주에서 살게 하고 또 재간이 있는 자는 잘 선발하여
이를 나라에 알리라."
그리하여 왕씨로서 거제도에 있던 자는 완산(完山)으로 상주(尙州)로 또는
영주(寧州)로 가서 살게 되었고 또 왕강, 왕승보가 불려 오게 되었다. 이
런 것으로 생각하면 태조의 왕업이 정안대군 방원, 즉 태종에 의하여 대성
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