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조명연 신부
신학대학을 다니는 신학생을 대상으로 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 실험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다니고 있는 이 학생들은 남 들을 도와주려는 이타적인 마음을 일반 학생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길에 쓰러져 있다면 그 사람을 돕기 위해 행동했습니다. 물론 100%는 아니라 63%였지만, 일반 사람보다는 훨씬 높은 수치였습니다.
이번에는 똑같이 누군가가 길에 쓰러져 있는 상황이었는데, 수업 시간에 늦으면 감점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얼마나 도움을 줄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얼마나 도움을 주었을까요? 63%에서 10%로 도움을 주는 수치가 떨어졌습니다.
아무리 근본적으로 착한 성향을 보여도 상황에 따라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을 외면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실험으로 확인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착한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착함을 드러내기 힘든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종 방송에서 난처한 상황에서 무관심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듯한 뉴스를 보게 됩니다. 무관심하다고 악한 사람일까요? 어쩌면 그 상황에서 외면할 수밖에 없는 여건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상황을 이겨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무관심으로 대처한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역시 잘못이 아닐까요?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냈고 이 사람은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군중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놀라운 일이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을 봤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마귀를 쫓아낸 예수님을 향해,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면서 반대의 뜻을 취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실 마귀를 쫓아내는 경우는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 못 하는 이가 말하게 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 그런 일이 없었지만, 사랑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말을 할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서 반대하는 모습, 어쩌면 앞서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는 무관심의 태도를 취했다고 비판하는 모습과 똑같은 것이 아닐까요?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까지 이해하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명언: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배를 멀리한다면 '전한'과 같이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음이요. 소인배를 가까이하고, 현명한 신하를 멀리한다면 '후한'과 같이 나라가 기울게 될 것이다(제갈공명).
사진설명: 착한 사마리아인.
[인천가톨릭대 성 김대건 안드레아성당/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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