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이 나의 마음이고, 심연이다보니 자기이 마음도 자기가 모른다.
김국환의 노래 가사 '내가 나를 모르는데 --' 인간 심리 탐구는 내가 나를 모르는 심연에서 시작한다.
*신화는 무의식의 표현이다.
(집단 무의식)
칼 융은 개인의 과거사에서 한 번 의식하였던 일이 무의식으로 억압되면서 형성되는 것이 ‘개인 무의식’이다. 개인의 무의식을 좀 더 알아보면 일상생활에서는 개인적인 것은 실현되기보다는 오히려 억압하기 쉽다. 왜냐면 나의 본능은 사회의 규칙이 금지하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그 가치(도덕이나 법 등등)를 따라야 함으로, 모든 사람이 쉽게 따른다. 개인적인 정신은(욕망-본능 등) 사회적 가치보다(도덕보다)열등하다고 생각하여 억압해 버린다.
(개인이 경험한 것에서 무의식으로 밀어넣어 버린 것이 개인 무의식이다.)
(배가 고파도 빵 가게의 빵을 집어먹지 않는 이유는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이 집단적이고, 보편적 가치이다. 배가 고파서 먹고 싶다는 것은 개인적인 가치(본능)임으로 억압해버린다(참는다).) 우리가 이런 현상을 개인 가치(본능)와 사회 가치가 충돌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치가 주어지면 가능한 한 개인적인 것은 억압해 버리고 초개인적인 가치(사회적, 집단적인 것—이것은 종교의 신앙만큼 강력하다)에 동화된다. 집단적 특성이 집단적 무의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도덕이나 관습은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집단적으로) 지켜야 할 가치를 제공한다. 그 가치에 어긋나는 일은 나뿐아니라 (사회구성원이)집단적으로 무의식으로 닐어넣어 버린다. 집단 무의식이 된다.)
집단 무의식이 본능적으로 나타나거나 원형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집단 무의식은 생명의 내재적 원리(본능적이라는 뜻이다.)에 바탕을 두고 실현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신화는 인간의 무의식의 표현이다. 라고 함으로, 인간의 본능적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원형(본능적 욕구)은 콤프렉스로 나타나며(억압했기 때문에), 표현할 때는 신화에 담아서 괴물 형태로 표현한다.(신화에는 괴물에 가까운 모습의 사람으로 나타난다. 본능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나타낸다. 사실은 우리의 본능적 욕망을 나타낸 것이다.) 융은 의인화된 인물상을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등으로 불린다.(콤프렉스는 갈등을 일으키는 인간의 내면 심리로서,(예로서 성욕 등) 이 심리를 인격화하여(사람으로 표현하여)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것이 신화이다.(신화에서는 성욕을 숨기지 않는다.)
(무의식이란 우리의 욕망을 억압하여서 만들었으므로, 밖으로 튀어나오고 싶어한다. 그러나 사회생활에서는 튀어나올 수가 없다. 튀어나올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허용하는 장치를 한 것이 신화이다.)
이처럼 신화는 무의식에서 튀어 나왔으므로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이다. 하늘의 깊이처럼 끝이 없다, 왜냐면 무의식은 우리의 끝이 보이지 않는 마음의 심연이기 때문이다.
(*나의 설명이 어렵지요. 본래 이론은 어렵습니다. 하여간에 우리의 마음은 하늘보 더 깊은 심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