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어떠한 세상을 만들 것인가?
예레 17,5-10; 루카 16,19-31 / 사순 제2주간 목요일; 2025.3.20
근세 초기에 인류는 산업혁명을 이룩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 전체에게 필요한 물질을 초과하는 생산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지만, 빈익빈부익부 현상으로 나타나는 경제 양극화 추세는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후진국이었다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유일한 나라라는 대한민국에서도 빈부의 대물림 추세는 뚜렷합니다.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라는 최고선의 가치들 가운데에서 평등의 지표는 아직도 전형적인 후진국형 빈부양극화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모두 매우 대조적인 두 인간형을 제시하면서 우리에게 선택하도록 요구합니다. 악인과 의인, 부자와 빈자입니다.
먼저,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람마다 제 선택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서 인생길이 이렇게 달라지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주님을 신뢰하는 이도 있는데,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을 마치 백 년이고 천 년이고 가지고 있을 것처럼 착각하고 몸을 떠받드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고,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치유될 가망이 없을 정도로 교활한 자는 좋은 일이 찾아 드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며, 마음을 주님께 두는 이는 좋은 열매를 줄곧 맺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살아 생전에 온갖 호사를 누리면서도 부자는 자선을 베풀지 않았지만, 종기 투성이의 몸으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고자 간절히 바랐던 가난한 라자로는 허기를 면하기는 커녕 개들이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할 정도로 냉대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살아서 고통받던 라자로는 죽어서 천국에 올라가 아브라함 곁에서 평안한 삶을 누리게 되었으나, 살아서 호강하던 부자는 불타는 지옥에 떨어져 목이 타는 듯한 고통을 맛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예수님께서 예레미야의 예언을 상기시키시는 듯 기본 구도는 비슷해 보이지만, 메시지는 훨씬 더 강함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의 경고는 자기 행실에 따라 현세에서 받을 심판만을 제시한 데 비해서, 예수님의 경고는 현세에서만이 아니라 내세에까지 관철되고야 말 심판을 제시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정도가 훨씬 더 엄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자와 거지, 현세와 내세, 천국과 지옥 등 대조적인 일들이 날카롭게 대비되면서, 부자의 사치스러운 모습을 짧게, 가난한 라자로의 고통은 길고 상세하게 소개됩니다. 그런가 하면 부자의 죽음은 길고 자세히, 라자로의 죽음은 짧게 소개됩니다. 정작 죽은 후 부자가 겪는 고통은 길고 처절하게 묘사되지만, 라자로의 행복은 아브라함 곁에 있다는 간단한 표현으로도 충분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대조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묘사 방식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매우 인상적으로 과연 어떻게 재물을 소유하고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즉, 라자로와 부자의 이야기에서, 재물을 그릇되게 소유하고 사용한 인색한 죄인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뒤에 자신의 말로 자신을 심판합니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이 찾아가서 경고해야 할 정도로 아무런 성찰 없이 위험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며,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거절한 대가로 가게 된 지옥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절대로 가서는 안 될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심판적인 부자의 언도는 아브라함에 의해서 더 엄중하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망설이는 부자들에게는 이미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 즉 성경의 가르침이 주어져 있으니, 죽은 사람이 다시 찾아가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 고통을 덜어주러 가기에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수렁이 너무 깊어서 도저히 건너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기 전에 회개하여 가난한 이들과 가진 재물을 나누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강조하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내세의 천국과 지옥 사이에 벌어져 있는 간극처럼 현세의 경제 질서에서 생겨나고 있는 빈부의 양극화 현상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받아야 하는 고통을 지금 여기서 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세의 간극은 인간의 힘으로는 물론 하느님의 힘으로도 좁힐 수 없지만, 현세의 간극은 인간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좁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경고대로 우리가 하느님께 믿음을 두기만 하면 그렇습니다.
재물의 소유와 나눔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렇듯 철저했기 때문에,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 소유라 내세우지 않고 공동의 소유로 내어 놓고 공동으로 사용할 줄 알았으며 그들 안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적인 실천이 사회적 매력을 발산시켜서 로마 제국의 박해도 물리치고 공인되고 국교가 되었으며 그 생명력으로 오늘날 전 세계에 퍼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6세 교황도 이 비유의 핵심에 대해서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 이렇게 가르친 바 있습니다: “인종이나 종교나 국적의 차별 없이 누구나 다 타인과 자연의 예속 상태에서 해방되어 참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 명실상부한 자유세계, 가난한 라자로도 부자와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인간 공동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인 것이다”(회칙 「민족들의 발전」. 47항).
무속에 의지하고 검찰 권력으로 연명하던 윤석열 정부가 종식되고 나면, 우리 사회가 과연 어떠한 민주주의 체제로 운영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논의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윤석열과 김건희가 공동으로 운영한 듯한 이 정부는 현 시기 대한민국 정치 체제의 한계와 문제를 여실히 드러내 보였기 때문입니다.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라는 최고선의 가치를 실현함에 있어서 이 정부는 낙제점을 받았고, 특히 평등의 지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국가의 공동선을 증진시켜야 할 책임을 맡은 공직자들의 의식 수준이 현저하게 떨어졌습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헌법과 법률로 국가의 책임을 명시적으로 보장해야 합니다. 다가올 조기 대선 이후 필연적으로 맞이할 개헌 정국에서 이 점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과제입니다. 국민의 기본권 중에서 주거와 고용, 보육과 교육, 복지와 돌봄 등 사회적인 기본권이 더욱 강화되어야 할 필요성이 절박합니다. 모두가 부자일 필요도 그럴 가능성도 없지만, 모두가 빈곤에서는 벗어날 수 있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대한민국이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려면 자신의 빈곤을 퇴치한 방식을 아시아의 여러 가난한 나라들에게도 알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 빈곤 퇴치의 과제는 선교적으로도 매우 절실한 목표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 저를 꿰뚫어보시고 제가 걸어온 길 살펴보소서. 저의 길 굽었는지 보시고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입당송) 이 기도처럼, 우리가 걸어온 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걸어갈 길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첫댓글 “하느님, 저를 꿰뚫어보시고 제가 걸어온 길 살펴보소서.
저의 길 굽었는지 보시고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