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 기도)
주님,
믿지 않는 영혼들과의 대화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대화는 알맹이가 없고 그저 삶의 잡담입니다.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에 대한 소원이 없다면 참으로 공허한 시간일 뿐입니다.
하지만 모든 관계 속에 희망을 품으며 때를 얻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허락하옵소서.
성령님, 진리로 인도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2.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3.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5.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거니와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 하느니라
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7.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8.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
9.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10.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
11.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12. 여호와의 눈은 지식 있는 사람을 지키시나 사악한 사람의 말은 패하게 하시느니라
13.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14.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라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
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16. 이익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니라
(본문 주해)
1절 : “많은 재산보다는 명예를 택하는 것이 낫고, 은이나 금보다는 은총을 택하는 것이 낫다.”(새번역)
많은 재물보다 아름다운 이름을 택하라는 것이다. 또 졸부라는 말을 듣기보다 정직하고 성실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말씀들을 어려서부터 들은 유대인들은 명예를 상당하게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왔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잘 지키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사람을 의식한 것이 참된 신앙이 아니라 외식이 되었던 것이다.
2절 :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다 함께 얽혀서 살지만, 이들 모두를 지으신 분은 주님이시다.”(새번역)
부자와 가난한 자가 마주치며 살게 된 것은 부자가 가난한 이를 돕도록 하기 위해서, 또는 가난한 이가 부자를 시험하기 위함이란 해석이 있다.
또 부자든 가난한 자든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라는 뜻이기도 하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기에 서로 돌보는 것이지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없는 곳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는 말씀(약2:5)도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그 속을 보시는 것이다.
3, 5절 : “슬기로운 사람은 재앙을 보면 숨고 피하지만, 어수룩한 사람은 고집을 부리고 나아가다가 화를 입는다.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으나, 자기 영혼을 지키는 사람은 그런 길을 멀리한다.”(새번역)
3절을 1~2절과 연관시켜 볼 때 부자가 되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것이 아니다.
예수 잘 믿어서 부자가 되자고 하는 사람은 재앙을 보고 피하는 것이 아니라 재앙을 보고 나가다가 해를 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는 자이기에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재앙의 길인지 아닌지를 알게 된다. 영원한 영혼의 문제를 소홀히 한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것이 없다.
4절 :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새번역)
구약에서 경건한 자에 대한 보상은 대체로 지상적 번영이다.
그러나 신약시대 경건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영생이다.
6, 15절 : “마땅히 걸어야 할 그 길을 아이에게 가르쳐라. 그러면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않는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혀 있으나, 훈계의 매가 그것을 멀리 쫓아낸다.”(새번역)
마땅히 행할 길을 걷는 부모는 아이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친다.
성도의 마땅히 행할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사는 일이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은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습관인 것이다(렘22:21). 어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징계가 필수이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으로 책망하시고, 인생채찍과 사람 막대기로도 책망하신다.
그런데 이러한 징계는 아들이기에 받는 것이다(히12:8).
7절 : “가난하면 부자의 지배를 받고, 빚지면 빚쟁이의 종이 된다.”(새번역)
세상의 나라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을 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부요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탕감하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은혜를 입은 자들은 가난한 형제를 위하여 연보함으로 피차 평균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인 것이다.
8절 : “악을 뿌리는 사람은 재앙을 거두고, 분노하여 휘두르던 막대기는 기세가 꺾인다.”(새번역)
부자가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고 착취하는 것도 악을 뿌리는 것과 같다.
그들이 재앙을 거두고 쇠하여 질 때가 있다는 것은 그들을 기다리는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말라고 한다.
9절 : “남을 잘 보살펴 주는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은, 그가 자기의 먹거리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이다.”(새번역)
선한 눈을 가진 자란 선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는 사람이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양식을 준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에게 양식을 줌으로 더 많은 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가나한 자들에게 양식을 주는 그 선한 눈을 가진 것 자체가 복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베풀 수 있는 것이 복을 받았고 그 복을 나누는 것이다.
10절 : “거만한 사람을 쫓아내면 다툼이 없어지고, 싸움과 욕설이 그친다.”(새번역)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인간이 거만하다. 사탄의 유혹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거만해지라는 유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의 생각과 이론들이 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다.
세상에서 재산, 권력, 지식, 지위 등을 가지면 가질수록 거만해진다. 이러한 자들이 모인 세상은 다툼과 싸움과 수욕이 그치지 않고 요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만한 자를 쫓아내실 때가 온다.
거만한 자가 다 쫓겨난 곳이 천국이며, 이 역사 속에서는 거만함이 깨어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게 된 성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11절 : 깨끗한 마음을 간절히 바라며 덕을 끼치는 말을 하는 사람은, 왕의 친구가 된다.(새번역)
말씀 앞에서 죄를 깨닫게 된 자는 주님께 자신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여 달라고 할 것이다.
마음이 정결한 자는 그 입술에 덕이 나오며 그런 자들은 영원하신 임금 곧 그리스도의 친구가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5)
12절 : “주님의 눈은 지식 있는 사람을 지켜 보시지만, 신의가 없는 사람의 말은 뒤엎으신다.”(새번역)
여호와의 눈은 지식을 지키신다.
이는 여호와의 말이 지식의 말씀이시기에 단 한 말씀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성취가 되도록 지켜내신다는 것이다.
반면에 사악한 사람의 말은 패하게 하신다.
여호와의 지식의 말씀이 담기지 않은 자들 곧 사기꾼들의 말은 패하게 하실 것이다.
13절 : “게으른 사람은 핑계 대기를 "바깥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나가면 찢겨 죽는다" 한다.”(새번역)
게으른 자는 온갖 핑계를 다 댄다.
사자가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거리에 올 수 없다. 그런데도 이런 핑계를 대면서 게으름을 부리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영적 게으름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14절 : “음행하는 여자의 입은 깊은 함정이니, 주님의 저주를 받는 사람이 거기에 빠진다.”(새번역)
음녀란 낯선 여인, 창녀, 이방 종교 신전의 여사제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자들은 입은 깊은 함정과 같다.
미디안 여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혹하여 그들의 우상숭배에 참여하게 한 것처럼 그러한 미혹에 빠지는 것이 그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미혹에 빠져드는 것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산 결과이다.
16절 : 이익을 탐해서,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사람과, 부자에게 자꾸 가져다 주는 사람은, 가난해질 뿐이다.(새번역)
이익을 얻으려고 가나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이익을 얻으려고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 질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사는 자들이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부자로 살게 되는 것을 쉽게 본다.
성도는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일이 가난한 자를 학대하거나 더 큰 이익을 얻으려고 부자에게 무엇을 주는 일에 대해 주님께서 어떻게 보실지를 생각해야 한다.
(나의 묵상)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10절)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인간이 거만하여졌다.
어느 정도로 거만해졌는가 하면 하나님처럼 높아지기를 원한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선악 체계를 세우고 자기 마음의 소원대로 행하는 것을 곧 ‘선’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재산, 권력, 지식, 지위 등을 가지면 가질수록 거만해지고, 국가적으로도 힘을 가진 나라들이 거만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모인 세상은 더 가지고 싶은 욕망으로 다툼과 전쟁이 그치지 않으니 요란할 수밖에 없다.
이는 세상이 바로 죄의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증거이다.
내 안의 거만한 자도 늘 내 안을 시끄럽고 요란하게 했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더 많이 인정받기 위해.....
나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 추구할 때 일어나는 이 분요함과 요란스러움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왜냐 하면 이것이 세상을 열심히 사는 자의 모습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께서 오셔서 내 안의 거만한 자를 쫓아내 버리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두 손 들고 항복하게 하신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죄 짓는 일에 불구자가 되었음을 선포하게 하신 일이다.
그것은 항상 옳다고 여겼던 자기주장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나를 부인하게 하신 일이다. 또 당연히 합리화시켰던 자기의 부정성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나를 부인하게 하신 일이다.
그 거만한 것을 쫓아내니 내 안에 다툼이 사라지고, 주님의 평강이 가득하게 된다.
세상은 여전히 공중권세 잡은 자의 속임수 아래 요란하지만, 십자가에 연합된 주님의 백성의 눈은 이미 심판받은 세상임을 알기에 더 이상 세상 것을 탐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1~2)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로서 성도가 구할 것은 무엇인가?
위의 것이다.
‘탐심’으로 정의되는 땅의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위의 것 즉 하늘에 속한 신령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기쁨은 오직 말씀을 통해 누릴 수 있다.
매일의 말씀의 저울에 자신을 달아 보아 언제나 함량 미달인 자신을 확인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루실 일-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을 소망하며 하늘의 평안과 기쁨을 가지고 이 분요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묵상 기도)
주님,
제 안의 거만한 자를 내쫓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십자가에 연합되게 하심으로
하늘의 기쁨과 평강을 맛보며 살아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이 세상의 거만한 자도 쫓겨날 그 날을 기다립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입니다.
그 날이 이르기까지 세상 곳곳에서 고통 받는 주님의 자녀들을 보호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