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영어 사대주의’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며칠 전에 한글날을 맞았다. 세종로 광화문광장에 세종대왕상을 세웠다. 한글날을 공휴일로 재지정하자는 목소리도 커졌다. 우리 말과 글은 우리의 혼과 정체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세종대왕상 건립과 공휴일 재지정 운동은 모두 가치 있는 일이다. 최근에는 인도네시아 소수민족 하나가 한글을 자신들의 표기문자로 채택하여 우리를 기쁘게 하였다.
외국인들에게 한국문화 중에서 가장 특별한 것 하나를 이야기하라고 하면 ‘한글’을 꼽는다. 세계에는 우리민족이 아직도 자신의 글자가 없어 중국이나 일본 글자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2002년 한일월드컵 직후, 어느 문화평론가가 우리가 텔레비전 중계방송을 통해 전세계 사람들에게 ‘한국이 한문, 영어가 아닌 독특한 자신의 글자인 한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릴 수 있는 황금의 기회를,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준비하지 못한 탓에 놓치고 말았다고 한탄하였던 생각이 난다.
사실 국내 기업이 세계시장으로 나아가면서 자신의 회사 상표에 영어 표현이나 영어식 표기를 사용한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으니, 그것은 우리의 정부와 국가기관, 공기업, 지방자치단체들이 앞장서서 과도한 영어와 영어식 표현을 사용하면서 우리의 언어생활과 우리사회를 오도하고 있는 점이다.
모 일간지 보도에 의하면, 이번 한글날을 맞아 전국 16개 광역시·도와 75개 시가 내세우는 선전표어를 전수 조사하였더니, 총 91개 지자체 중 63.7%가 영어 문구를 쓰고 있으며, 특히 16개 광역시·도 중에 한글로 된 문구를 쓰는 전남과 전북, 그리고 특별히 선전표어를 두고 있지 않은 강원도를 제외하고 80%가 넘는 곳이 영어표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더욱 가관인 것은 우리의 지자체나 공기업의 영어 선전문구가 막상 영어로 뜻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이 서울’(Hi Seoul)만 하더라도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서울에게 ‘안녕하세요, 서울’이라고 인사를 해야 한다는 뜻인지, 도대체 해석이 잘 되지 않는다. 또 공기업인 한국도로공사의 선전 표지인 ‘ex’는 뜻인가? 영어권 사람들에게 ‘ex'는 ‘지금은 더 이상 아니다’는 뜻의 가위표(x)의 의미로서 특별히 전처, 전남편, 전애인를 뜻한다. 외국인들은 도로공사 표지를 보면서 참으로 의아해 할 것이다.
어떻게 하여 서넛 먹은 아이들이 영어부터 배우는 세상이 되었는가. 이는 세계화 추세로 인해 밥 벌어 먹고 사는데 영어가 꼭 필요한 ‘도구’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식 속에서 영어가 단순한 도구로서의 성격을 넘어 지금처럼 지독한 ‘영어 사대주의자’를 양산해 낼 때 우리는 어찌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어찌 단순히 ‘영어’라는 언어에 대한 사대주의만을 의미하겠는가.
이명박정부가 출범하면서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이 ‘오렌지’를 ‘아륀지’라고 발음해야하며 전 국민의 영어발음 개선을 위해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아륀지’ 발음 생각을 하니, 당시 새 정부 사람들이 ‘성숙한 세계국가’(Global Korea)로 가는 길로서 한미(韓美)관계를 영미(英美)관계의 수준으로 올리겠다고 했던 일이 생각난다. 영미관계가 어떤 관계인가. 혈연, 언어, 문화로 연결된 유일무이의 특별한 관계 아닌가.
이 모든 것이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문제, 즉 우리의 ‘정체성’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들이다. 그래서 당시 논란을 일으켰던 것이고, 정체성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어서 지금도 우리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밖’으로만 관심과 힘을 쏟음으로써 막상 ‘안’으로 내실을 기하지 못해 우리의 혼이 썩고 우리의 정체성에 문제가 생긴다면, 우리는 과연 진정한 의미의 성숙한 세계국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은 당시 중화문화권에 살면서도 ‘사방의 풍토가 다르고 소리의 기운이 또한 이에 따라 다르다’는 기본적인 인식 하에 우리 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우리 글자가 없어 고생하는 백성들을 돕기 위해 우리 글 ‘훈민정음’을 만들어 내지 않았던가. 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공공기관들은 지금부터라도 우리 글 ‘한글’ 사랑 운동에 실천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