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원동력
창세 37,3-4.12-13ㄷ.17ㄹ-28; 마태 21,33-43.45-46
사순 제2주간 금요일; 2025.3.21.
한민족의 역사는 파란만장합니다. 노아의 대홍수 이후 동아시아에서 옛 조선 왕조가 최초의 홍익인간 문명을 세워 중국과 일본에 문물을 전해 준 이래로, 서아시아에 세워진 수메르 문명의 영향을 받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흐름과는 별개로 무려 7백여 년을 이어온 고구려와 해양 제국을 이룩했던 백제 그리고 천년 불교 문화를 진흥시킨 신라,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어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우고 아시아 동서의 무역을 주도했던 고려, 게다가 천문학의 발달로 천문 현상을 관측하고 측우기를 만들어 백성의 농업을 장려하는가 하면 민본주의적 발상으로 디지털 시대인 오늘날까지 독보적인 언어로 자리잡고 있는 한글을 창제한 새 조선에 이르기까지 근세 이전의 한국 역사는 찬란하였습니다.
하지만 동양의 한지, 나침반, 화약, 대포 등 문물이 서양에 전해지고 대형 선박을 건조하는 기술과 항해술 그리고 지리상 발견이 가능해 지면서 한국의 역사는 뒤바뀌었습니다. 지리상 이점으로 네덜란드를 비롯한 서양으로부터 무기를 사 들인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키자, 조선 왕조의 주자학 문명은 그 허점을 여실히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극심해져서 새로운 세상과 세계관을 갈망하는 이들은 드디어 중국에 파견된 서양 선교사들이 펴낸 천주교 교리를 접하고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물 안 개구리처럼 주자학을 진리로 여기고 종교로까지 높여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조선 왕조와 유림들은 천주교를 탄압했고 백 년 동안 박해하면서 나라의 국력은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며 천주교를 통해 진리를 추구하던 조선의 별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고, 이 별들이 비추는 빛을 따라 천주를 섬기려던 천주교인들은 전국의 심산유곡에 세운 교우촌에서 백 년 동안 숨죽여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땅의 천주교인들은 오천 년 전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제천의식과 천손의식으로 꽃피운 홍익인간의 문명이 섬기던 하느님을 다시 찾았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역사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하는 물음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개인이든, 가족이든, 민족이든 교회든 현재의 삶이 쌓이면 과거가 되고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흔적은 기록으로 남아 역사가 됩니다. 유명한 역사학자 중에 영국인 E. H.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는 현재에 의해서 끊임없이 재해석될 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한때의 승자가 쓴 역사는 승자가 바뀌면 다시 쓰여지기를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류 지성이 바라보는 역사관은 상대적입니다. 여기에 보편적인 가치 기준이 자리잡을 여지는 좀처럼 없어 보입니다. 다만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인간 지성이 터득한 바 보편적이라는 기준에 의해서 인권이라는가, 민주주의라든가 하는 역사 평가 기준을 적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기준에 의해서 보더라도 정치의 역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함을 실현해 가고 있으나, 경제 현실은 아직도 불평등한 채 경제 민주화는 요원한 채로 우리는 현재의 역사를 살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역사를 다르게 봅니다. 즉 역사가 그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식으로 상대화시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의지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만나서 이루는 드라마가 역사이고, 인간의 의지와 지성이라는 변수에 의해서 좌우되기는 하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역사를 완성하리라는 관점을 고수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적 역사관에 의해서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에 담긴 역사를 바라보겠습니다. 오늘 독서의 상황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요셉을 형들이 질투하여 이집트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아 넘기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억울하게 이집트로 끌려간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서 배운 신앙으로 자기에게 닥친 역경을 슬기롭게 극복합니다. 이집트의 재상이 되어 기근에 허덕이던 형들과 동생 벤야민 그리고 아버지 등 일가족을 이집트 땅에서 가장 비옥했던 고센 땅에 정착시켜 장차 하느님의 백성을 이룰 이스라엘이 번영할 기반을 마련합니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이 벌인 인간적인 드라마 속에는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던 하느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밤하늘의 별이나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후손을 많게 해 주시겠다던 하느님의 축복이 아브라함, 이사악 그리고 야곱과 요셉을 거쳐 그리고 가나안 땅과 이집트 고센 땅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기까지 요셉이 겪어야 했던 역경과 성공의 드라마와는 전혀 딴판의 드라마가 요셉의 아버지 야곱에게는 있었습니다. 형 에사우를 피하여 하란 땅으로 정착한 야곱은 첫 눈에 반했던 라헬과 혼인하지 못하고, 삼촌 라반의 속임수에 걸려서 레아와 원치 않은 혼인을 하고 르우벤, 레위, 유다, 아세르, 이사카르, 즈블룬에다가 레아의 몸종에게서 가드와 아세르를 낳았고, 나중에 라헬과 혼인하기는 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자 라헬의 몸종에게서 단, 납달리를 낳았으며, 라헬로부터는 뒤늦게 요셉과 벤야민를 얻어서 모두 열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뒤늦게 태어나기는 했으나 야곱이 처음부터 마음에 두었던 여인은 라헬이었기에 요셉은 서열상 열한 번째였어도 야곱에는 맏아들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을 편애했고, 이 편애를 보면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질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백성 이전 하느님의 집안이 형성되는 데에도 라반의 속임수, 야곱의 편애, 열한 아들들의 복수 그리고 요셉의 인내 같은 인간적인 죄와 덕목이 작용했지만, 아브라함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의 뜻이 실현되는 과정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후 하느님 백성의 역사에 대해서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 소작인들의 비유가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야곱과 요셉은 아주 대조적인 모습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현했습니다만, 이후의 역사에서 다윗을 제외하고는 그런 전형적인 신앙인상은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에 어긋나는 정치와 경제 현실을 비판하던 예언자들이 모함을 당한 나머지 매질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포도원 주인의 상속자인 아들로 비유되는 예수님마저 이스라엘 백성은 배척했고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렇듯 비극적인 이스라엘의 역사는 새로운 백성인 교회에 의해서 보편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느님 계시를 받아 들이고 그분이 이루시는 구원의 협력자가 되는 백성이 교체되어야 했던 역사상 가장 극적인 반전의 원인은, 포도원 소출에 해당되는 사랑이라는 열매를 이스라엘 백성이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체적으로 보거나, 민족의 범주에 한정해서 보거나 간에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어가는 과정입니다. 하느님의 집안과 그 백성이 이룩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그렇습니다. 향후 한겨레의 운명 역시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선의의 모든 이들이 사회 속에서 맺을 사랑의 열매에 의해 좌우될 것입니다.
그 사랑의 열매는 개별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맺어져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에 기여해야 할 것이며, 또한 사회적으로도 맺어져 사회의 공동선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사회적인 차원에서 이룩되어야 할 사랑의 열매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윤석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파면 선고 이후 조기 대선과 함께 향후 맞이할 개헌 정국에서도 권력구조의 효율적 개편이나 기본권의 신장 등 정치적 민주화의 과정을 더 이상 후퇴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진전시키고, 매우 심하게 왜곡되어 있는 불평등 현실 속에서 토지 공개념을 확립하고 기업 소유와 경영 등에서 경제적 민주화를 이룩해야 합니다. 또한 사회적 기본권을 주거와 고용, 보육과 교육, 복지와 돌봄 등의 분야에서도 국가가 국민에게 보장하는 헌법을 만들어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열심히 자기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열매가 다른 이들이나 전체 사회의 행복과 공동선 증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자유가 신장되어 가는 추세는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추세입니다. 하느님의 뜻과도 부합합니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나는 것처럼,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보수도 진보도 필요하고, 자본주의적 자유와 효율성과 함께 사회주의적 평등과 공정성이 다 함께 요청되는 것입니다. 결국, 개별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도 사랑의 품격을 갖추고, 사회적으로도 균형 잡힌 사회적 애덕의 역사의식으로 각성된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결국 역사의 원동력은 인류를 이끄시는 하느님의 구원의지이며, 역사가 얼마나 진보했느냐 하는 척도는 하느님의 선한 의지를 믿고 사회적 애덕을 실천하는 이들이 맺는 사랑의 소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