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로 들어가는 무악 산과 내 아내)
무악 산 만나러 무악산으로
김 난 석
전라북도 김제와 전주, 완주를 아우르는 곳에 무악산이 있다.
해발 7백여 미터,
서쪽으론 광활한 김제평야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곳은 논산시 두마면의 신도안, 영주시 풍기읍 금계동과 더불어
대표적인 명당이라 했다.
난리를 피할 수 있는 피난처,
각종 무속신앙의 집단지이기도 하다.
(이중환의 택리지 인용)
조선 말기에 사회적, 사상적으로 혼란기에 접어들면서
동학혁명이 일어나 후천개벽을 외쳐댔지만
실패로 끝나자 정읍 출신의 강일순이
무악산 기슭의 금산사를 중심으로 天地公事를 외쳐댔다.
사람의 노력에 의해
자연, 문화, 사회가 재조 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가히 시대적 선각자의 면모였다.
그는 서른 살 때까지 전국 팔도를 돌며 수행했다.
무악산 동편 대원사에 들려 道를 이룬 뒤엔
무악산 서편 금산사에 이르러
미륵불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포교활동을 했다.
39세에 생을 마쳤지만
조선 후기에 동학사상과 함께 종교를 넘어
근세사회 한 지류의 사상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 뒤에 그 후계자들에 의해
여러 계파의 종교집단으로 형성해 나갔다.
(증산교, 대순진리회 등)
나는 시대적 사회적 혼란기에
종교의 형식을 빌어 사회운동을 해나간 그의 흔적을
단편이나마 만나보고 싶었던 것이다.
무악산 인근엔 나의 문우인 무악 산님이 머물고 있다.
논과 밭, 그리고 멀리 떨어진 무악산 밖에 보이는 게 없는
김제 뜰에서 태어나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이민해 자리 잡은 뒤에 가족은 놔두고
귀국해서 노모와 함께 지내고 있다고 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한 해를 정리도 해볼 겸
무슨 전기를 마련할게라고 집을 잠시 떠나보는 게
오랜 습관이 되어왔는데,
이번엔 무악산과 금산사를 둘러보고
무악 산님을 만나보고 왔던 것이다.
열차를 타고 김제에 내리니
무악 산님이 마중 나와 있었다.
두툼한 동복에 배낭을 메고,
배낭 한 귀퉁이엔 스틱을 꽂아놓은 것을 보면
완전 군장한 탐색조의 초병 같았다.
어디에 떨어뜨려도 금방 작전에 들어갈 수 있는 듯한 모습이,
아마도 저런 모습으로 이민생활을 개척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내 아내가 하는 말이
"겨울 들판에 발가벗겨서 어디에 세워 둬도 뿌리내릴 분"이라 했다.
그네의 안내에 따라 일단 무악산 금산사로 갔다.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손을 반기는 것인지 훼방을 놓는 것인지 모르지만
경내로 들어 한 바퀴 돌아본 뒤에
미륵전과 미륵불을 참배하려니
눈구름이 어느새 개이고 있었다.
이어서 김제 벽골제로 가려니
다시 눈발이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으니,
아마도 놀고먹는 農事는 없다고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신축 년 한 해가 혼란스러웠다.
돌아오는 임인년은 어떨지 모르지만
분열된 국론이 하나로 모아지려는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조선말 서학 동학으로 나뉘어 갈등하고,
일본이냐 청국이냐로 나뉘어 갈등하고,
시아버지냐 며느리냐로 나뉘어 갈등하고,
지배자냐 백성이냐로 나뉘어 갈등하던 어지러운 시국에
피맺힌 절규를 하다 스러져간 최제우며,
나철이며,
전봉준이며,
강일순의 얼이 눈보라가 되어
김제 평야에 내리고 있는 모습을, 또 소리를 듣고 왔다.
미국의 시애틀과 김제에 각각 두 살림을 차리고 있는 무악 산님이
코로나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향리의 들판을 헤매고 있는 모습도 보고 왔다.
부디 나라도, 무악산도, 무악 산님도 평안하길 바라노라.
2021. 12. 31.
그로부터 벌써 다섯 해가 흘러가고 있다.
인연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어제는 수필방 번개모임에 무악 산님이 찾아왔다.
번개모임을 공지해놓고
아침 일찍 롯데 분수대로 나가려니
무악산 님이 벌써 올라와 롯데의 경내를 걷고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느냐고 물으니
여기저기 둘러보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더라.
건각에 호기심도 많은 무악 산,
수필방 모임 뒤에 뒤풀이에선
닭띠방의 나무랑 님과 다정하게 이야기도 나누던데
마치 오랜만에 만난 오누이 같더라.
벌써 의기투합되었던지
날이 선선해지면 장항선의 온양온천에서 만나는
번개도 하자던데
우선 8월 1일에 오픈하는 카페 문학콘테스트에서
두 분이 글로 만나길 기대해본다.
무악 산 님은 흙담벽을 타고 오르는 호박꽃 같은
서정을 노래하는 글벗이요
나무랑 님은 특히 지난 콘테스트에서 수상도 한 글벗인고로..
2026년 7월 22일 석촌(夕村)
첫댓글 무악산님 만나고 오신 당시에
글 올린신거 본 기억 납니다.
멀리까지 가셔서 만나셨으니
반가움은 이루 말할수 없겠지요.
저도 전주에 살때 무악산이
가까워서 자주 갔었어요.
금산사도 갔었구요.
모악산으로 알고 있었는데 예전에 무악산님 글보고 원래 이름이 무악산이란걸 알았어요.
무악산님 저도 사진으로나마
반갑게 뵙습니다.
여전히 청년 같으시네요.
나무랑님도 아가씨 같고.^^
모임 주선 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장소도 품격있고 반가운 님들이많이 참석하셔 더없이 훌륭한
모임이었군요.
덕분에 반가운님들 모습 잘봤습니다.건강 하세요.^^
부산으로 기억하는데
전주도?
그럼 자주 갔었겠네요.
무악산 글을 올려본지 오랜시간 이 흘렀는데
제가 주장해온 모악산이 아닌 무악산을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반가웠습니다.
@석촌 고향은 부산인데 남편 직업상
여러 지역에서 살았어요.
@무악 산 예 반갑습니다.
무악산님과 카페인연 오래지요.^^
@해솔정. 아아
이해되네요.
무악산 아래 넓다란 김제평야를 보고 자란
무악 산님은 꾸밈이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남성 같지요.
그래도 감성은
가을 논의 보드라운 황금들판 같아요.
어제, 거리 멀다 않고 다녀가신 무악 산님께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석촌님의 글로써, 무악산과 그 주변의 여러 곳을알고,
역사적인 사실도 알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맞아요.
듬직한 사내지요.
고맙습니다.
그날 금산사 가던길에 눈보라 휘날리던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김제역에서 처음 사모님 뵈었을때 아주 지적
이시고 조용하면서도 내공이강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벽골제 에서 전시해놓은 농기구도 설명 하여
드리고 직접 시범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서 시각효과만 보여드린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 이었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다시 그때를 회상 하면서
금산사 가는길도 좋을듯 합니다.
나무랑님 제가 장항선 타고 방학때 서울에 다니던
장항 이 고향 이셔서 반가웠읍니다.
그시절 이야기 추억담을 원없이도 나누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게 벌써 다섯해 전인데
눈에 선하다네요.
무악산님. 멀리서 오시느랴 수고하셨습니다.
석촌님도 수필방 번개 주선하시느려 수고하셨습니다.
네에, 고마워요.
날이 선선해지면 김제와 서울 중간지점인 온양서 번개팅해요... 온양서 번개팅하는 시니어들이 은근히 많아요.. 평택사는 제친구도 집사람과 자주 온양가더군요.. 가성비좋은 식당들이 많고 온천물에 담갔다가 오기도 하고.
그리고 온양은 전철이 공짜라 돈이 안들구요. 한시간에 두번다니는 급행을 타면 빠르게 도착합니다.
어제도 열심히 사진찍어주신 우영님 노고에 감사드려요.. 대문사진이 끝내 주네요.
그것도 좋겠지요.
기대를 하며 살아가는 삶은 즐겁지요.
대문 사진요?
정말 끝내주네요..ㅎ
2021년이면 제가 카페 가입 하기도 전인데요.
무악산과 무악산 님과의 깊은 인연
넘나 멋있으세요.
무악산이 김제와 전주에 있다는 것을 처음
알었어요.
김제가 평야거든요.(시험 보느라고 암기 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김제에서 군산으로 버스타고 오셔서
배를 타는 신기한 경험을 하시면서 장항으로
오셔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유학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웃사촌 만난 것같았어요.
제가 고향이 장항이거든요.
잘했어요.
앞으론 글로 또 이어가보세요.
저도 무악 산님과 오랜 인연이 있습니다.
제가 오래전 삶의이야기방 방장을 할 때 부터 알고 지냈는데
지난달 전주 모임에서 뵙고 오랫만에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가웠습니다.
금산사, 벽골제.. 익숙한 이름입니다. 김제와 서울 사람들이 만나려면 온양 보다는
천안이나 대전 정도에서 만나는 것이 교통이 편하지 않을까 생각 해 봅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랬군요.
자주보다 가끔 만나는 맛도 괜찮지요.
천안이요? 대전이요?
뭐 다 괜찮은 것 같네요..
무악산님과 그런 특별한 인연이
있으셨군요.
저도 무악산님을 꼭 한번 뵙고 싶습니다.
인연이 잘 이어지면
그런 날도 오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