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꺼내보는 명품시조 126「느티나무 사형제」외
신웅순(시인․평론가․중부대명예교수)
느티나무 사형제 네 그루가 귀퉁이를 잡고 있다
사형제 두런두런 바둑을 두는 소리
지금은 바람만 혼자 훈수를 두고 가네
-김순분의 「느티나무 사형제」전문
느티나무 네 그루가 귀퉁이를 잡고 있고 사형제 느티나무가 두런두런 바둑을 두고 있다. 지금은 바람만 혼자서 훈수를 두고 간다는 것이다.
초장은 바둑판을, 중장은 바둑을 두고 있는 지난날의 모습을, 종장은 훈수를 두고 가는 지금의 모습을 그렸다.
바둑은 둘이 두는 것이지 넷이 두는 것은 아니다. 느티나무 사형제가 바둑을 둔다는 것은 바둑 두는 사람, 훈수꾼, 구경꾼으로 북적거리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제는 지난날의 시골 풍경을 볼 수 없다. 바람만이 혼자 훈수를 두고 갈 뿐이다. 느티나무 옆 점방도 사라진지 오래다. 빈 평상만이 덩그마니 남아있을 뿐이다.
강이 아득히 흐르는 게 아니라면
산이 까마득 서 있는 게 아니라면
한 평생 슬픈 생각이 여기까지 왔을까
- 신웅순의 「늦사랑」
강은 아득히 흐르고 산은 까마득히 서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어찌 한 평생 슬픈 생각이 여기까지 왔을까. 강은 아득히 흘러서, 산은 까마득히 서 있어서, 강처럼 산처럼 인생의 슬픈 생각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것이 늦사랑이라는 것이다.
늦사랑이라 생각이 슬픈 것이지 생각이 슬퍼서 늦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숭고하고 신비스럽다.
아름다운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닐까. 강이 흐르고 있는 한, 산이 서 있는 한 사랑은 계속될 것이다. 어쩌면 늦사랑은 영원한 사랑의 시작인지 모르겠다.
-주간한국문학신문 2024.4.5.(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