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11월 25일(토)
* 시작 기도
주님...
주의 마음에 합한 자였던 다윗도 자기주장의지가 발동하여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것은 군사의 숫자를 세고자 하는 사탄의 충동질에 빠진 것입니다.
천하의 다윗도 그러했건만 나와 같은 지극히 연약한 자들이야 두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일이 어디 한두 번 뿐이었겠는지요?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줄 알면서도 자기를 주장하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들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나를 주의 공의로 심판하여 주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나는 연약하여 주님이 필요합니다.
나를 두르사 주의 것으로 삼아주소서.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오늘 하루도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게 하옵소서.
나의 힘은 점점 빠지고 주님으로 부요한 자 되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잠 22:17-29
제목 : 말씀을 이용하던 자가 말씀을 향유하여 날마다 존재이신 주님을 만나 뵐 수 있음이 내게 복입니다.
17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18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19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20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너를 위해 기록하여
21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
22 약한 자를 그가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23 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
24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25 그의 행위를 본받아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
26 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27 만일 갚을 것이 네게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28 네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29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 나의 묵상
창세전,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을 아들에게 주어 아들이 아버지의 생명을 받아 말씀으로 태어나셨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아버지 하나님은 그 아들과 함께 언약을 맺으셨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을 만들어 그들에게 아들의 생명을 주어 영생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아들은 당신의 생명을 주어 사람으로 하여금 영생의 존재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 때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는데, 그것은 이미 창세전부터 약속된 것이었다.
(벧전 1:20)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전 하신 영생의 약속을 위하여 조금도 흔들림 없이 영원에 계시면서 인간의 시간 안에서 이루어가셨다.
아들은 육신으로 오셔서 생명을 주시기만 하면 되었으나, 삼위 하나님의 형상이요 아들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아담이 범죄하므로 그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죽어야만 하셨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담의 범죄와 상관없이 구세주로 오셔야만 했던 아들은 또한 가죽옷으로 예표되는 메시야적 행위로써의 복음으로 오셨다.
가죽옷은 곧 아들이 지셔야만 하는 십자가이다.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잘 아시는 주님은 이렇게 부르짖으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부르짖음은 십자가에서 찢겨져 죽는 육신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아버지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오는 단말마의 고통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 아니 나의 죄로 얼룩진 아들을 버리셨다.
아들을 버리는 아버지의 비정함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에서는 아버지의 고통을 위로부터 떨어지는 커다란 물방울 하나로 묘사하였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눈물이었다.
그 눈물이 바닥에 닿는 순간 아들은 죽었다.
그러나 이는 곧 복음이요 생명이다.
아들의 죽음은 죄의 죽음이요 나를 살리는 생명의 죽음이다.
여러 가지 죽음이 있다.
대부분이 죽음 자체로 끝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생명의 죽음이었다.
아들의 죽음, 그리스도의 십자가,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아들은 창세전 아버지와 하신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으셨기에 그분의 말씀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오늘 본문의 지혜자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다.
아버지의 말씀과 계명을 생명같이 지키신 그분은 또한 우리와 새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건의 계명을 주신다.
새 시대, 새 언약의 조건의 규정은 파레시아다.
곧 아들을 힘입어 담대히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아들을 힘입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쉐마이다.
본문 17절 이하에서는 지혜자의 말씀을 강조하고 있다.
귀를 기울여 지혜자의 말을 들어라.
나의 교훈을 네 마음에 두어라.
그 교훈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두었다가 언제든지 네 입에서 나올 수 있게 하는 것은 정말 복되고 아름다운 일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고 신뢰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내가 네 안에 이 모략과 지식의 말씀을 친히 기록하여 너로 하여금 이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또한 너를 보냈던 자 곧 지혜자에게 바르게 화답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한다(17-21절).
보냈던 자에게 바르게 화답하는 것은 그의 말씀에 쉐마하여 그 말씀대로 산 증거를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렘 31:31절 이하에서 예레미야에게 새 언약을 주시는 말씀이다.
(렘 31:31-3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으나 아담은 그 언약을 깨뜨렸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입애굽과 출애굽을 시키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신다.
하지만 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그 축복, 하나님을 남편으로 삼는 그 축복을 발로 차버리고 언약 안에 머물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둘 수 없어서 모압언약으로, 세겜언약으로 갱신 또 갱신하시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불순종하며 언약을 깨뜨리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최종적이고도 완전한 언약인, 새 언약을 약속하신다.
이제는 당신의 법을 우리의 속에 두고 마음에 새기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는 그분의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누가 누구를 가르칠 필요가 없는 것은 이제 각자가 다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누구나 각자 하나님을 알아야만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아는 것 곧 말씀으로 교제와 사귐을 갖는 것이다.
이제는 각자가 말씀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과 지혜자 되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만 한다.
말씀 앞으로 나아가면 내 안에 들어오신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고 통역해 주신다.
그로 인하여 우리의 악행을 사하시고 다시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확증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말씀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는 정말 무지몽매한 자였다.
젊었을 때는 말씀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야말로 툭탁신자였다.
주일날 예배드리러 갈 때 성경을 들고 가고 갔다 와서는 잘 모셔놓고 다음 주일날 갈 때 쌓인 먼지를 터느라 툭툭 탁탁 치는 그런 신자였던 것이다.
무늬만 신자였지 사실 믿는다고 볼 수도 없었던 것이다.
말씀은 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는 것은 교회를 중심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교회 생활을 하면서 들은 풍월은 있어서 나름 성경적인 지식은 쌓여갔다.
나이가 좀 들면서 말씀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고 말씀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때 역시 말씀을 읽기는 읽되 나 중심적으로 말씀을 해석하고 이용하는 말씀 도둑질쟁이에 지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르치는 교육은 내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육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항상 네 자신이 소중하다.
너는 사랑받기 위하여 태어난 자다.
세상에서 네가 가장 귀하다.
이런 말들을 듣고 자라기 때문에 신앙이 그리스도 중심, 말씀 중심이 아니라 항상 나를 위한 그리스도, 나를 위한 말씀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렇게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면서 시간은 흘러갔다.
나는 여전히 세상적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항상 성도들 중심으로 목회를 하였다.
성도들의 뒤치다꺼리 하는 것이 목회의 대부분이었다.
기도하는 것도 그들의 상황 해결을 위한 기도였다.
그런 나는 복음도 생명도 모르고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모르는 정말 무식쟁이였다.
그러던 내게 복음이 들어 왔다.
말씀을 이용하던 자가 이제는 말씀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귀를 기울여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마음을 두게 되었다.
그 복음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나의 속에 두어 입을 열면 복음이 나오게 된 것이다.
성경은 이것이 바로 주님을 의뢰하는 것이요 신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19)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이전에는 막연하고 관념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였다면, 이제는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주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기에 모략, 즉 말씀의 깊이는 깊은 샘과 같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하시면 그 깊은 샘에서 물을 길을 수 있다.
이제는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깨닫고 나를 보내신 그분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는 자로 살기 원한다.
(21)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합이 아니냐?
매일 매일 말씀 앞으로 나오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
‘내가 밖에 나가면 사자가 나를 잡아 먹을거야’라는 게으름으로 인하여 말씀 앞에 앉기가 힘이 들고, 마음에 환난과 곤고함으로 인하여 말씀 앞에 서기가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이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다.
말씀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나에게 소망이 없다.
말씀을 이용하던 자가 말씀을 향유하여 날마다 존재이신 주님을 만나 뵐 수 있음이 내게 복이 아닌가?
오늘도 그 말씀 앞에서 주의 영광을 본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영원의 시간에서 인간의 시간 안으로 틈입하여 들어오시어 오늘도 말씀 앞에 서 있는 이 종을 찾아오신 주님을 환영합니다.
아들이 창세전부터 보았던 아버지의 영광을 내게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영광을 날마다 보게 하소서.
죄로 얼룩져서 내 영이 깨끗하지 못하여 주의 성령이 역사하지 못하고 내 안에서 제한되어 있을 때 주님께서 말씀으로 항상 깨어 있도록 심판하여 주소서.
주님의 심판을 받지 않으면 이 육신이 언제나 세상의 정욕을 좇아가려는 원함이 있나이다.
주의 심판은 나를 살리는 은혜요 복음입니다.
말씀이 생명이요 영생이오니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유익되게 하소서.
양심이 화인맞은 자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이지 않을 때, 나를 죽여주소서.
주의 심판 앞에서 다시 살기 원하나이다.
육신의 소욕은 십자가에 죽고 오직 주님의 영으로 살게 하소서.
그 말씀 안에서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소서.
그 기쁨은 곧 영광이오니 주님께 다시금 그 영광을 돌리나이다.
주여, 찬양을 받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