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동욱 논란'에 불거진 '박근혜와 최태민 관계된 아들'
2007년 대선 경선 당시 '박근혜의 혼외자식' 발언 다시 주목
- 박근혜, '제 유전자(DNA) 검사도 다 해주겠다'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 자녀 논란'에 대해 청와대는 어떤 입장일까? 4대 권력기관의 하나인 검찰의 총수가 관련된 일이고, 야당 일각에서는 대통령 직속인 국가정보원이 이에 개입돼 있다는 주장(박지원 전 원내대표)이 나오고 있기도 하다.
12일 현재까지 청와대는 이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사건이 처음 불거진 지난 6일 박근혜 대통령은 해외 순방 중이기도 했고, 대통령 귀국 후에도 이와 관련해서는 '청와대가 입장을 밝힐 일이 아니다'라는 판단인 듯하다. 다만 이런 가운데 지난 2007년 구 한나라당 대선 경선 후보였던 박 대통령의 발언 가운데 일부가 최근 상황과 연관돼 다시 주목받고 있다.
박 대통령은 2007년 7월 19일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최태민 목사와 관련한 의혹에 대해 해명하던 중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씀을 드리면 '(나에게) 아이가 있다'는 얘기는 참 심각한 얘기"라며 자신에 대한 흑색선전에 대해 언급했다. 박 대통령은 "아무리 네거티브라 하더라도, 만약에 아이가 있다는 확실한 근거가 있다면 누가 그 애를 데리고 와도 좋다. 제가 유전자(DNA) 검사도 다 해주겠다"고 했다.
채동욱 총장이 '유전자 검사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이를 연상시킨다는 평이다. 이어 박 대통령은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멀쩡하게 사는 애를 어디에 있다고 해서 만약에 그 애를 지목해서 누구 자손이니 어쩌니 하면 그 아이와 부모한테는 얼마나 날벼락 같은 얘기인가. 그것이야말로 천륜을 끊는 일"이라며 "정말 한탄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역시 채 총장의 아들로 지목된 소년의 사진이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떠도는 상황에 겹쳐지는 말이다. 관련 의혹을 최초 보도하며 논란에 불을 지핀 <조선일보>조차 12일 지면에서 "(아이의) 실명이 노출되고 아들을 사칭한 사진이 떠도는 등 신상털기와 인신공격이 도를 넘었다"며 자사 보도가 가져온 심각한 부작용을 인정했다.
"최태민 아이까지 있는 애가 뭔 정치를 한다는게냐?"
[시사뷰타임즈]
아직도 모르는 국민들이 있긴 하지만, 꽤 많은 국민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박근혜의 사촌 형부이기도 한 김종필은 아이까지 '있다는'이라는 들은 이야기 화법이 아니라, 아이까지 '있는'이라는 확정적인 말을 썼다. 김종필의 말에 의하면 박근혜가 애를 낳아 사생아로 어딘가에 있는게 확실하다는 뜻이다.
▲ 박근령-지만 남매가 '우리누이 살려달라' 노태우에게 보낸 호소문
ⓒ 오마이뉴스 참고로 최태민 목사는 1912년 출생하여 1994년 사망하였다.
[잊혀진 특보] 박근혜가 남자에게 빠져 정신을 못차리니 구해달라!
동생 박근령이 노태우에게 '충격적인 탄원서'를 보내...
서울의소리 ㅣ 기사입력 2012/05/28 [09:43]
1990년 11월23일 동아일보 17면에는 놀라운 기사가 하나 실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차녀 박근령이 당시 집권중이던 노태우 대통령 내외에게 탄원서를 보낸 것인데, 그 내용인즉 '언니 박근혜가 남자에게 최면이라도 걸린듯 빠져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으니 구해달라'는 내용이었다.
▲ 1990년 11월 30일 동아일보 실제 기사 ⓒ
동아일보 해당 기사에 따르면 박근령-지만 남매는 1990년 8월 '노태우 대통령 각하 내외분께 보내는 호소문을 청와대 민정수석실로 보냈고, 그 내용인즉 '사기꾼 崔太敏(최태민)을 엄벌해崔(최)씨에게 포위당해있는 언니 朴槿惠(박근혜)를 전직 국가원수 유족의 보호차원에서 구출해달라. 누나와 최씨와의 관계를 끊게 해달라' 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그야말로 박근혜가 남자에게 빠져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데 우리 남매 힘으로는 안되니 대통령이라도 나서서 구제해달라는 창피한 내용이었다. 박근령 친필 '남자에 빠진 언니 좀 구제..' 탄원서로 알려진 (노태우)대통령 각하 내외분께 드리는 호소문 이라는 A4용지 12매 분량의 문서는 다음과 같이 시중에 알려져 있다.
사망 당시까지 최태민 목사가 '박근혜를 등에 업고 부정축재를 하였다' '좋아 지낸다'는 소문이 끊임없었고, 월간조선 7월호의 보도에 따르면 1955년 5월 30일 다섯 번째 부인인 林모씨와의 결혼을 마지막으로 모두 5명의 부인과 사이에 3남 6녀를 두었다.
어떤 이유에서 인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실제 70년대 박근혜는 아버지 박정희에 의해 서울시장 양택식의 아들과 약혼을 하였던 바가 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가 결국 결혼하지 못했다. 박근혜-최태민 목사 사이에 '아이가 미국에 가있다'는 등의 온갖 루머가 2007년 박근혜-이명박 대선 레이스 당시에 크게 불거졌었다, 당시 경선주자 였던 이명박도 '최태민 비리 왜 감싸냐, 박근혜 일가 부동산 최태민 차명재산 아니냐? 박근혜 불가론'을 펴 박을 큰 곤경에 빠뜨렸던 바가 있다.
최태민과 박근혜 에비후보의 관계에 대해서 한나라당 내에서도 우려의 시선이 높다는 보도가 나온 바 있습니다. 즉 이는 박근혜 후보가 도덕적 순결주의를 표방하며 이명박 전 시장에 대한 네거티브를 주도하며 본선경쟁력의 우위를 장담하고 있지만 역사적 팩트에 근거한 그와 관련된 어떤 사실 하나만 범여권이 물고 늘어져도 한방에 날아갈 메카톤급 사안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름 7개를 갖고 흰 피가 흐른다’ ‘계룡산에서 도를 닦았다’ ‘최면술로 박근혜를 유도했다’. 고려말 ‘요승’ 신돈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구설. 박근혜 전 대표와 목사 최태민(1994년 사망)에 얽힌 의혹이다..심지어 당내 인사조차 “박 전 대표는 최태민 문제 때문에 절대 대권주자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하는 사람까지 있다고 합니다.(경향신문 발행-뉴스메이커 금년 2월호에서)
■ 최태민은 어떻게 박근혜에게 접근했을까?
안수도 받지 않은 사이비 목사인 최씨(당시 62세)는 지난 74년 육영수여사 사망 직후 자신을 목사로 소개하며 고 박정희 대통령의 장녀 근혜씨(당시 23세)에게 접근했다 최씨는 "꿈에 육여사가 나타나 근혜씨를 도와주라 는 얘기를 들었다"며 근혜씨에게 접근한 후 어머니를 잃은 근혜씨를 위로하며 신임을 얻었다.
■ 최태민과 박근헤가 국정을 농당했다는 말은 무엇인가요?
최태민 목사가 1978년 박 전 대표를 구국여성봉사단 명예총재로 추대한 뒤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 전 대표를 배경으로 공직 인선에 개입하는 등 국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김재규는 그의 공판기록에서 최태민은 박근혜를 등에 업고 기업에 돈을 요구하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는 등 국정논단 수준이 도를 넘자 이를 박 대통령에게 직언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만약 박근혜와 최태민의 국정농단을 방치하면 민심을 잃고 있는 유신정권에 큰 치명타가 될 것이기에 박 대통령에게 중앙정보부가 수집한 내용을 그대로 보고했다는 것이다.
최태민은 박정희 서거후 1980년 보안사에 의해 강원도로 쫓겨갔지만 박근혜가 전두환에게 간정해 다시 그녀 주변으로 복귀했다 합니다. 월간조선 7월호는 육영재단. 정수장학회. 영남대학 등 박근혜 후보가 비리의혹을 받고 있는 모든 일에 최태민이가 관계하고 있다고 보도 했다. 박근혜는 자신은 최목사와 무관한 관계임을 주장하지만 지금도 최목사의 사위가 지근거리에서 박근혜를 보좌하고 그의 딸이 재산을 관리한다는 보도가 있는 등 그와의 정신적 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한나라당의 한 중진의원은 “박 전 대표는 지금도 최태민 인척을 총애한다”며 “이는 대권주자로서 문제 있는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최태민은 박근헤를 업고 자신이 관리하던 육영재단을 전횡햇다. 이로 인해 90년 육영재단 운영을 둘러싼 분규가 확대되고 박근혜는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동생과 법정다툼까지 간 결과 근영씨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일선에서 은퇴했다. 최씨도 이때 함께 물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 박정희가 최태민과 박근헤를 동시에 친국, " 그년(박근혜)
이 흐놈(최태민)한테 홀려-박근혜. 최태민-박정희 시해 원인제공
박근혜 1998.11.01 월간중앙 권말부록1 김계원의 최초 인터뷰 “나보고 갑자기 최태민이를 아는가”하고 물으셨다. 김재규한테 들었다는 소리는 안 하고 ‘예, 압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 놈이 말이야, 근혜를 홀려 가지고 내가 혼을 좀 내줬지.’하셨다. 경상도 사투리로 도깨비한테 홀린다는 표현을 쓰지 않나. 대통령은 ‘그년(근혜)이 그놈한테 홀려 도무지 시집 가려고 해야 말이지. 그
러니 내가 어떻게 재혼할 수 있겠나’하셨다.” 육영수 여사가 죽은 뒤 사실상의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대통령의 딸이 관계된 스캔들이라 쉬쉬하며 공개하지 않아 베일에 가려진 사건이다. 그러나 박근혜가 총재로 있는 새마음봉사단과 관계된 비리가 적지 않아 치안본부와 민정수석실과 중앙정보부 등이 직접 조사에 나서 비리사실을 대통령에게 보고까지 했다.
박대통령은 유부남인 최목사와 20대 중반이던 박을 나란히 세우고 직접 최목사 비리에 대해 증거자료들까지 내밀면서 친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박근혜가 극구 최태민을 변호하고 나서자 박대통령이 관계당사자들을 모두 불러 몸소 친국을 하는 헤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김계원 전 비서실장은 인터뷰에서 “김재규는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10·26 혁명을 일으킨 간접적인 동기가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가족, 즉 자식들 문제 때문이었다’고 주장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도 “김재규는 큰영애인 박근혜가 관련된 구국여성봉사단의 부정과 행패를 보고 분개했다고 해요. 이런 일들이 ‘대통령이나 박근혜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조사를 시켰다는 겁니다. 조사결과 로비나 이권 개입 등 여러 가지 비행이 드러나자 박 대통령에 게 그대로 보고했는데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이런 일까지 하느냐’면서 몹시 불쾌해 했다고 해요.
박정희는 영부인 육 여사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자식들을 애지중지하고 철저히 감싸고 돌았다고 해요. 구국여성봉사단 문제만 해도 그래요. 당시 항간에서 말이 많던 최태민이 총재, 박근혜가 명예총재를 맡고 있었는데 김재규가 구국여성봉사단의 문제점을 보고한 후 박근혜가 총재, 최태민이 명예총재가 됐습니다. 박정희가 최태민의 실권을 뺏는답시고 두 사람의 자리를 맞바꾼 거지요. 김재규는 자기가 괜히 조사를 해서 오히려 ‘개악(改惡)’이 됐다면서 뒷조사한 걸 후회했대요.”라며 김재규 전 정보부장은 구국여성봉사단의 비리 외에도 박근혜에게 불만이 많았다고 밝혔다.
그는 이와 함께 “박근혜가 지방 행사에 참석하면 할머니들이 전부 무릎을 꿇고 절을 했어요. 김재규는 ‘아무리 대통령 딸이라도 그렇지, 국모는 아니지 않습니까. 국민이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 제게 되묻기도 했어요. 촌로들이 그렇게 절을 하면 주위 사람들이 그걸 말려야 하는데 오히려 부추겼다는 겁니다. 김재규가 특히 이런 사건들 때문에 박근혜의 미움을 받았다. 박근혜씨가 당시 김재규의 경질을 바라고 박대통령에게 이를 조르고 있었다. 김재규는 항소심 공판에서 최태민 사건이 박정희 시해의 동기를 제공했다고 진술했다.
■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에 체포된 최태민을 박근혜가 간청해서 석방
전두환본부장의 지시로 최태민을 긴급체포하여 조사를 벌이던 중 당시 수사관이었던 이학봉 중령은 박근혜씨가 최목사 구속 이후 전본부장에게 찾아와서 석방해 달라고 간청하는 바람에 서울을 떠난 조건으로 풀려났다고 증언 한바가 있다. 따라서 당시 권력핵심을 중심으로는 최태민 목사와 박근혜씨의 새마음 봉사단이 상당한 골치거리로 남아 있었고 문제시 되었다
애리조나州 세도나에 최태민 목사 아들이라고 소문난 28-29 살 정도의 남성이 살고있다. 그곳에 최태민 목사가 운영하던 영생교 라는 교회 신도들이 몇 가구 살고있고, 그 교인들 입을 통해 소문이 났는데 최태민 목사의 아들이 맞다고 한다. 교인들 입을 통해서 나온 이야기이니까 최태민씨가 상당히 여색을 좋아해 많은 여성들을 편렵했으므로 어느 여성하고 사이에 태어난 아이인지 알수 없고,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박근혜 혼외자 이야기는 야당이 아닌 당시 한나라당, 다시말하면 자기 집안에서 나온 이야기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더욱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반대 속에 이어진 30년 관계, ‘최태민 미스테리’
오주르디 2012.08.23 10:03
공식적으로 ‘박근혜-최태민’에 대해 언급된 건 지난 대선 때다. 당시 이명박 후보측은 세간에 떠도는 ‘설’을 토대로 최태민과 관련된 다양한 의혹을 제기하며 공세를 폈다.
부실 검증, 현대사 미스테리가 된 ‘최태민 의혹’
당시 경선후보청문회에서 박근혜는 “최 목사(최태민)는 내가 어려운 시절 나를 도운 사람”이며 “고맙고 훌륭한 분”이라며 그를 끝까지 두둔했다. 2007년의 ‘최태민 검증’은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당내 선거에서 이루어졌을 뿐이다. 상대 후보에게 가벼운 ‘상처’ 정도는 줄지언정, ‘목숨’을 거두어서는 안 되는 일종의 ‘스파링’이었다.
‘진검’ 승부가 아닌 ‘목검’ 승부였던 만큼 의혹이 제대로 밝혀지긴 어려웠다. 그러나 보니 최태민과 관련된 무성한 의혹들은 아무것도 밝혀진 것 없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은 ‘최태민 의혹’을 현대사의 ‘미스테리’로 만들고 말았다.
이번 대선은 ‘최태민 미스테리’를 추적하는 선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최태민 의혹’에는 풍부한 얘깃거리와 함께 박정희 시절의 ‘어두운 흔적’까지 담겨 있어 ‘흥행성’도 높은 편이다. 박근혜 측은 ‘단순한 과거사를 가지고 정치공세를 편다’며 ‘문제될 것 없다’는 입장이다. 과연 그럴까? ‘최태민 의혹’을 들여다보면 ‘뇌관’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박정희 생전에 직접 친국한 사건
육영수의 사망 직후 박근혜는 최태민으로 부터 편지를 받는다. 편지에는 ‘육여사(육영수)가 3차례에 걸처 자신(최태민)에게 나타나 근혜를 도와주라고 현몽했다’고 적혀 있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된다. 박근혜는 그에게 구국봉사단 총재를 맡겼고, 최태민은 박근혜와의 관계를 내세워 기업들로부터 운영비와 입단찬조금을 걷으며 각종 이권에 개입한다.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이었던 선우련의 1977년 9월 20일자 비망록에는 박정희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백광현 정보부 7국장과 박근혜를 배석시켜 최태민의 비리와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직접 친국을 한 장면이 묘사돼 있다.
“박대통령은 오늘 나에게 큰 영애인 근혜양과 관련해 물의를 일으켰던 최태민 구국봉사단 총재를 거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통령이 나에게 지시한 내용은 세 가지였다. ‘최태민을 거세하고, 향후 근혜와 청와대 주변에 얼씬도 못 하게 하라. 구국봉사단 관련 단체는 모두 해체하라.’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나는 곧 근혜양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근혜양은 얼굴이 하얘지더니 낙담한 표정으로 눈물을 지었다.”
오죽했으면 아버지가 딸을 친국했을까? 박정희는 “최태민과 관련된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고 말했다고 한다. 최태민과 딸 박근혜의 관계가 어땠으며,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당시 세간에서는 최태민을 ‘박근혜의 그림자’라고 불렀다.
당시 중앙정보부도 특별수사를 했다
관련된 수사는 조심스럽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영애이자 퍼스트레이디인 박근혜와의 관계 때문이다. 중정에 의해 밝혀진 ‘인간 최태민’의 모습을 보면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훌륭하고 고마운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최태민은 해방 전후 경찰공무원으로 있다가 1949년 육군헌병대 문관으로 근무했다. 1954년에는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됐고, 이후 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이 되기도 했다. ‘영생교’를 만들어 사이비종교의 교주를 하다가 박근혜를 만난 뒤 목사 안수를 받았다. 7개의 이름을 가지고 활동했으며, 결혼도 6차례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사정기관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최태민 가계보'>
최태민은 박근혜와의 친분과 관계를 내세워 정계와 재계, 정부 관료와 접촉해 인사, 승진, 공천, 공사 수주 등의 명목으로 금품을 수수하고, 입회비와 후원금을 빼돌리는 등 공금을 횡령한 것으로 나타난다. 중정 수사자료에는 총 44건 3억1700만원(현재 약 40억원 상당)의 비리 사실이 적시돼 있다.
‘박정희 사살’ 이유 중 하나가 ‘최태민’
박정희에게 총격을 가한 김재규는 10.26사건의 정당성을 설파하면서 항소이유서에 ‘최태민 사건’을 거론했다. 사기횡령 등의 비위사실과 여자들과의 온갖 추문까지 있는 사이비 목사가 자칭 ‘태자마마’라며 청와대를 드나들고, 박근혜를 내세워 부정을 저질러 국민과 여성단체들의 원성이 되고 있어, 이를 박정희에게 호소했지만 박정희가 듣지 않았다는 얘기다.
김재규 변호인은 “(박정희가)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했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 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아 결과적으로 개악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밝혔다.
주변의 비리에 대해 직보 하고 충언을 했지만 딸을 감싸기만 한 채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는 박정희에 대해 그의 측근 중 한 사람으로서 크게 실망했고, 이것이 박정희 제거의 한 가지 이유가 됐다는 주장이다.
전두환까지 ‘박근혜-최태민’ 관계를 우려했다
박근혜가 최태민을 크게 의존했다는 주장과 증언이 있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은 자신의 저서에 ‘박근혜에게 최태민과의 관계를 끊도록 건의한 비서 3명이 모두 잘렸고, 최태민이 추천한 사람만 박근혜의 비서가 됐다’고 주장한 바 있다. 또 최태민은 탁명환(작고) 당시 현대종교연구소장에게 ‘박근혜의 지프를 타고 왔으며 청와대를 수시로 출입하고 있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박정희 피살 이후 ‘최태민 거세’가 흐지부지 되자 박근혜를 걱정한 청와대 비서관이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에게 최태민을 처리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선우련의 부탁을 받은 전두환은 최태민을 강원도 인제의 군부대로 보냈다가, 12.12직후 사기와 횡령 혐의로 구속 기소하고 1년6개월을 선고했다.
형제들도 ‘박근혜-최태민’ 관계를 걱정했다
박근혜는 1982년 전두환 정권의 암묵적 배려로 1969년 육영수가 설립한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한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두 동생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청와대 시절부터 ‘박근혜의 그림자’로 불리던 최태민이 육영재단 운영 등에 깊숙이 관여해 재산을 착취하고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갈등과 반목이 깊어지던 1990년, 드디어 일이 터진다. 박근령과 박지만 두 남매가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그 탄원서의 일부다. “진정코 저희 언니(박근혜)는 최태민씨에게 철저히 속은 죄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속고 있는 언니가 너무도 불쌍합니다. 대통령의 유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어디에 하소연 할 곳도 없고 또 함부로 구원을 청할 곳도 없었습니다.”
결국 박근혜가 이사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육영재단의 난’은 박근령과 박지만의 승리로 끝난다. ‘난’의 목적은 ‘박근혜 사퇴’ 보다 ‘최태민 제거’에 있었다. 형제들은 박근혜가 최태민에게 철저하게 속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주변의 반대 속에도 이어진 ‘30년 관계’
아버지 박정희도, 형제들도, 비서진도, 전두환도, 중앙정보부도, 당시 언론과 사회단체들까지 부정적으로 봤던 ‘박근혜-최태민’의 관계는 30년 동안 이어진다. 박정희의 사망사건이 터지고, 전두환 군부에 의해 최태민이 격리되며 소원해졌던 관계는 박근혜가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복원된다.
최태민은 육영재단의 이사로, 고문으로 활동하며 운영에 깊숙이 개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태민 뿐만 아니다. 그의 사위까지 육영재단에 관여했다. 최태민이 사망(1994년)한 뒤 그이 다섯째 부인의 딸인 최순실의 남편 정윤회는 1996년부터 2004년 까지 박근혜의 보좌관 혹은 비서실장으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2002년 박근혜가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고 총재가 됐을 때 정윤회는 총재비서실장이었다. 최태민의 딸 최순실은 강남에 빌딩 두채를 보유한 수백억대 재산가로 알려졌다. 최순실이 부동산을 사들인 때와 최태민이 육영재단의 운영에 깊숙이 개입했던 시점이 일치해 이와 관련된 의혹도 무성하다. 또 항간에는 2004년 이후에도 ‘정윤회 보고라인’이 가동돼 왔고, 4.11 총선 공천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설’도 있다.
최태민과 그 인척, 육영재단 영남학원까지 좌지우지
1980년 전두환 신군부는 박근혜에게 영남대 재단을 맡긴다. 이사장에 취임했지만 이에 반대하는 학생시위가 일어나 몇달 만에 이사장직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부정입학, 장학금 횡령, 영남대병원 비리 등이 불거져 관선이사 체제가 들어선 1988년까지 이사직을 유지했다.
부정한 방법으로 영남대의 ‘교주(校主)’가 된 어버지 덕분에 영남학원을 맡았지만, 여기에도 ‘최태민의 흔적’이 발견된다. 영남학원 비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재단운영을 좌지우지해온 4명 중 두 명이 최태민의 인척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영남학원 산하 영남투자금융 등을 관리하며 재단의 실세였던 조순제는 최태민 처의 전남편의 아들이었다.
영남대병원 관리부원장을 맡아 의료원 관련 비자금 총책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손윤호는 조순제의 외삼촌이었다. 편법과 비리가 판쳤다. 병원장 해외출장비가 박지만의 항공료로 지급되고, 육영재단에 수천만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육영재단이 발행하던 <어깨동무> <보물섬> 등에 영남투자금융이 장기 광고를 제재하거나 거액을 기부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맡은 곳 마다 부실, 이런데도 ‘빅토리아 여왕’?
박근혜가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 가졌던 직함 중 대표적인 게 육영재단과 영남학원 이사와 이사장이다. 두 곳 모두 부실운영으로 논란이 된 바 있다. 영남학원은 공금 횡령과 기금 전용, 부정 입학 등이 문제가 돼 1988년 사학재단 처음으로 국정감사를 받았다. 이후 20년 동안 관선이사 체제로 운영되다가 2009년에야 정상화가 됐다.
육영재단은 방만한 운영과 경영부실에 두 차례의 ‘형제의 난’까지 겹치며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2008년부터 박지만이 추천한 임시이사 9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선거에서는 ‘여왕’일지는 모르겠으나, 경영에는 재주가 없나 보다. 박근혜가 맡았던 두 기관 모두 풍비박산의 위기를 겪었다. 두 기관의 부실운영에 공교롭게도 최태민이 있었다.
육영재단과 영남학원, 모두 현존해 있는 기관들이다. 또 관련 인물들 상당수가 생존해 있다. 제대로 검증한다면 ‘미스테리’가 웬만큼 해소될 수도 있어 보인다. 아무튼 ‘최태민 미스테리’는 이번 대선의 최대 쟁점 중 하나가 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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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쯤으로.. ㅡ.ㅡ
마땅히 끝낼말을 생각해봤는데 이 말밖에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니까.... 어쩌라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