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꺼내보는 명품시조 129「초록이 비치네요」외
신웅순(시인․평론가․중부대명예교수)
저것 봐,
잔가지에 초록이 비치네요
사르르 올라오는
생명들의 연한 소리
자연의 귀한 작품이
태어나고 있어요
-이정자의 「초록이 비치네요」
나무는 봄을 용케도 알아본다. 저것 보라. 잔가지에 초록이 비치지 않는가. 봄이면 나무는 겨울 내내 눈바람 맞으며 작곡한 멜로디를 세상에 선보인다. 사르르 올라오는 생명들의 연한 소리, 겨우내 빚은 연두빛 가락이다. 봄의 왈츠곡 같은 음악,바람 불면 들려오는 빠르지만 여리디 여린 목소리이다. 자연의 귀한 작품이 태어나고 있는 어느 따뜻한 봄날이다. 시조는 이미지 자체에 그림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창만이 아닌 다른 음악도 있다. 경계가 없다. 종합 예술, 이것이 시조이다.
머리위에 쏟아져
봄비인 줄 알았어
내 앞에 바싹 붙어
다리 한쪽 드는데
어마나
망측도 해라
내가 왜 거기 피었지
-권선애의 「개불알꽃」
개불알꽃이 오줌을 싼다. 머리 위에 쏟아져 비가 오는 줄 알았다. 누가 내 앞에 바싹 붙어 다리 한쪽 드는데 어마나 망측도 해라. 내가 왜 거기 피었지? 그게 바로 나였구나. 자기가 오줌 싼 줄도 몰랐다니 시침 뚝 뗀 재치가 번뜩인다.
재밌다. 개불알꽃을 이렇게 묘사할 수도 있구나. 긴 말이 필요 없다. 시조의 매력은 짧은 데에 있다. 석 줄로 순간을 스케치한 크로키 같다. 시조는 못할 게 없다. 무거운 것도, 가벼운 것도 다 수용할 수 있다. 그것이 시조이다.
-주간문학신문, 2024.4.24.(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