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닦는 나무 / 공광규
은행나무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부르면 안되나
비와 바람과 햇빛을 쥐고
열심히 별을 닦던 나무
가을이 되면 별가루가 묻어 순금빛 나무
나도 별 닦는 나무가 되고 싶은데
당신이라는 별을
열심히 닦다가 당신에게 순금 물이 들어
아름답게 지고 싶은데
이런 나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불러주면 안되나
당신이라는 별에
아름답게 지고 싶은 나를
수종사 뒤꼍에서 / 공광규
신갈나무 그늘 아래서 생강나무와 단풍나무 사이로
멀리서 오는 작은 강물과
작은 강물이 만나 흘러가는 큰 강물을 바라보았어요
서로 알 수 없는 곳에서 와서
몸을 합쳐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는 강물에
지나온 삶을 풀어놓다가
그만 똑! 똑! 나뭇잎에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지요
눈물에 반짝이며 가슴을 적시는 나뭇잎
눈물을 사랑해야지 눈물을 사랑해야지 다짐하며
수종사 뒤꼍을 내려오는데
누군가 부르는 것 같아서 뒤돌아보니
나무 밑동에 단정히 기대고 있는 시든 꽃다발
우리는 수목장한 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던 거였지요
먼 훗날 우리도 이곳으로 와서 나무가 되어요
나무그늘 아래서 누구라도 강물을 바라보게 해요
매일매일 강에 내리는 노을을 바라보고
해마다 푸른 잎에서 붉은 잎으로 지는 그늘이 되어
한번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는 삶을 바라보게 해요
가죽 그릇을 닦으며 / 공광규
여행준비 없이 바닷가 민박에 들러
하룻밤 자고 난 아침
비누와 수건을 찾다가 없어서
퐁퐁으로 샤워를 하고 행주로 물기를 닦았다
몸에 행주질을 하면서
내 몸이 그릇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뼈와 피로 꽉 차 있는 가죽그릇
수십년 가계에 양식을 퍼 나르던 그릇
한때는 사람 하나를 오랫동안 담아두었던
1960년산 중고품 가죽그릇이다
흉터 많은 가죽에 묻은 손때와
쭈글쭈글한 주름을 구석구석 잘 닦아
아름다운 사람 하나를
오래오래 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소주병 /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리고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낙원동 / 공광규
평생 낙원에 도착할 가망 없는 인생들이
포장마차에서 술병을 굴린다
검은 저녁 포장도로
죽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붉은 비닐포장 꽃에서
잉잉거리며 일벌 인생을 수정하고 있다
꽃 한번 피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열매도 보람도 없이 저물어가는 간이의자 인생을
술병을 바퀴 삼아 굴리는 사이
포장마차는 달을 바퀴 삼아 은하수 이쪽까지 굴러와 있다
소주를 주유하고
안주접시를 바퀴로 갈아 끼우고
술국에 수저를 넣어 함께 노를 젓고
젓가락을 돛대로 세워 핏대를 올려도 제자리인 인생
포장마차가 불을 끄자
죽은 꽃에서 비틀비틀 접힌 몸을 펴고 나온 일벌들이
술에 젖은 몸을 다시 접어 택시에 담는다
얼굴 반찬 /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 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공광규 시인 약력
* 1960년 서울 돈암동에서 태어나 충청남도 청양에서 자랐음
*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단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 1986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당선
* 신라문학대상, 윤동주상 문학대상, 동국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김만중문학상,
고양행주문학상, 디카시작품상, 신석정문학상
* 시집 : 『대학일기』『마른 잎 다시 살아나』『지독한 불륜』
『소주병』『말똥 한 덩이』『담장을 허물다』, 『파주에게』,
『서사시 금강산』과 산문집 『맑은 슬픔』
* 어린이를 위한 책으로 『성철 스님은 내 친구』『마음 동자』『윤동주』
『흰 눈』『청양장』『담장을 허물다』『할머니의 지청구』『엄마 사슴』 등
첫댓글 좋은 작품 올려주셔서 잘 보았습니다.
이 시간 시를 감상하면서 많은 생각이 드네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