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을 둘러싼 논쟁
일본 東京大 교수였던 江上波夫(에가미나미오)는 1948년 한 세미나에서 일본의 최초 고대국가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기마민족에 의해 세워졌다는 설을 발표하여 일본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는 이후 이를 정리하여『기마민족국가』(中公新書)라는 책으로 펴냈다.
江上씨는『기마민족국가』에서 일본국가의 기원을 우선 제10대 崇神천황이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崇神은 북방 대륙계 기마민족 출신으로, 4세기 초, 신예의 무기와 기마병을 동원하여 한반도를 경유하여 남한의 임나지방에 이르렀으며, 그곳을 근거지로 하여 일본 원정에 나서 우선 북규슈의 筑紫(후쿠오카현)를 정복했다. 그 후 후기 고분문화가 시작되는 5세기 전후에 제15대 應神천황이 야마토(大和)를 평정하여 야마토조정을 열었으며 이것이 일본 고대국가의 기원이다. 江上씨는 그 근거로 다음의 8가지를 들고 있다.
- 전기고분문화와 후기고분문화는 서로 이질적이라는 점
- 그 변화가 상당히 급격하여 그 사이에 자연스러운 추이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점
- 일반적으로 농경민족은 자기의 전통적 문화에 집착하려는 경향이 강하여 급격하게 타 민족의 이질적인 문화를 받아들여 자신의 전통적 문화의 성격을 변혁시키려는 경향이 극히 적다는 점. 이것은 농경민인 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 일본의 후기고분문화에 있어서의 대륙계 기마민족문화복합체는 한반도의 그것과 공통되며, 그 문화복합체가 부분적으로, 또는 선택적으로 일본에 수용되었다고는 인정하기 어렵다는 점. 즉 그 문화 전체가 고스란히 누군가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다고 해석되는 것이다.
- 야요이시대 또는 전기고분문화시대에 牛馬가 적었던 일본이 후기고분문화시대가 되면 갑자기 말을 사육하게 되었지만, 이것은 말만 대륙에서 도래하고 사람은 오지 않았다고 해석하기 어려우며, 기마를 습관으로 하던 민족이 말을 동반하고 대륙에서 일본으로 도래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부자연스럽다는 점
- 후기고분문화가 王侯貴族的, 기마민족적인 문화로, 그 전파가 무력에 의한 일본의 정복, 지배를 암시케 한다는 점
- 후기고분의 분포지역이 군사적 要地라고 인정되는 곳이 많다는 점
- 일반적으로 기마민족은 육상의 정복활동뿐만 아니라 해상을 건너서라도 정복욕을 만족시키는 예가 적지 않다는 점. 따라서 남조선까지 기마민족의 정복활동이 미쳤을 경우, 일본으로의 침입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라는 점
그런데 일본의 사학계에 또 하나 큰 영향을 미친 것이 井上光貞의『일본국가의 기원』(岩波新書)이라는 책인데 그는 이 책에서 江上씨의 기마민족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崇神의 재위연대를 4세기 초라고 볼 때 미심쩍은 것은 江上씨가 후기 고분을 형성한 것은 4세기 말 내지 5세기 초일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 후기고분문화의 출현 시기를 이렇게 보는 것은 옳다. 그러나 崇神을 선두로 한 기마민족의 침입과 동시에 후기적 문화가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될 터인데 사실은 1세기 가까이 늦어져, 4세기 말 또는 5세기 초에 후기 문화가 출현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이와 같은 자기모순과 관련하여 고고학자 小林行雄의 기마민족설에의 반론은 흥미롭다. 즉 小林씨에 의하면 <왜인전>에 ‘牛馬가 없다’고 기술되어있지만 말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말 타는 법을 알게 되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던 것 같다. 기마의 풍습을 고고학적으로 보면 應神陵 陪冢 출토의 금동제 馬具는 그 제조수법으로 보아 應神陵 자신의 연대보다도 조금 더 후세의 물건이다. 仁德陵 출토의 馬形 토우가 기마풍습 유물의 가장 빠른 예가 아닐까? 이상과 같이 小林씨는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應神. 仁德, 즉 5세기전반 이후 이른바 후기고분의 시대부터 기마의 풍습이 행해졌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 풍습이 행해졌다고 하는 증거는 없다. 江上씨에 의하면 4세기 초의 崇神이 정복자이므로 전기고분시대에도 기마의 풍습이 행해지고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 증거가 없다는 것이 江上說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이와 같은 井上光貞의 반론에 대하여 江上씨는『기마민족국가』에서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고분 및 그 출토품을 중심으로 고찰해보면 거기에 동복아시아계 기마민족이 조선반도를 경유, 일본에 침입하여 기마민족문화를 갖고 그 정복사업에 종사한 일이 인정된다. 그리고 그것이 일본에 있어서 통일국가의 성립과도 직접 결합되는 것은 시기적인 일치뿐만 아니라 후기 고분의 이른 시기를 대표하는 것이 應神.仁德陵이라는 것에서도 분명하다. 그러나 應神.仁德陵은 그 규모에 있어서 피라미드를 능가하는 기념비적인 대 건조물로, 거기에는 당시 이미 절대적인 권력을 자랑하고 있던 야마토조정의 엄연한 존재와 일본에 있어서 통일국가의 기초 확립이 명시되어있으므로 창업의 시기는 그 보다 훨씬 전에 경과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창업의 시기는 자동적으로 고분시대 전기로 소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논리가 되지만 그렇다면 고분시대 전기에, 기마민족의 일본열도침입의 사실을 반영하는 고고학적 유물이 있는 것일까? 이것을 적극적으로 실증하는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missing ring(계열 상 결여되어 있는 요소)에 틀림없으며, 장래 반드시 발견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이에 대하여 井上光貞은『일본국가의 기원』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江上씨는 고구려의 남하, 백제. 신라의 대두 등, 모두 북방기마민족의 정복과정의 일환으로 보고 있는 바, 고구려가 낙랑군을 쫒아낸 것은 313년, 백제의 흥기는 근초고왕 代, 신라는 그보다 약간 늦은 시기이다. 그렇다면 기마민족에 의한 일본의 정복도 4세기 초라기보다는 그보다 약간 뒤로 하여 중엽 이후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점에서도 崇神보다는 應神을 초대 왕이라고 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井上光貞은 일본에 있어서의 통일국가는 4세기 후반 이후 백제. 신라보다 뒤에 출현한다고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황실계보는 應神까지는 거의 신용할 수 있으나 神功 이전은 의심스럽다는 것이 津田左右吉 이래의 정설이다’ 라고 하면서 江上說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전기고분문화와 후기고분문화의 갭은 정복왕조의 주인공을 應神천황이라고 한다면 굳이 missing ring이나 정복왕조론을 내세우지 않고도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井上光貞은 ‘5세기 전반 이후 후기고분시대부터 기마의 풍습이 행해졌으며 그 이전에 이 풍습이 행해졌다고 하는 증거는 없다’고 江上씨를 비판했다. 그리고 고고학에서 말하는 전기고분문화와 후기고분문화의 갭을 ‘4세기 후반에 유래가 없을 정도의 대규모 조선경영의 결과 다수의 귀화인이 일본에 도래 토착한 결과’라고 보았다. 그는 ‘4세기 후반 조선경영의 주인공이 應神이었음은 확실하며, 야마토조정은 應神의 재위 시에 조선반도에 손을 뻗어 임나를 영토로 하였으며, 신흥의 백제. 신라를 제압하고 북방의 대국 고구려에 도전하는 기세를 보였다’고 하면서 ‘조선에서의 활동이 상세하게 알려진 반면 국내의 사정은 확실치 않다’고 서술했다(일본국가의 기원).
즉 그는 4세기 후반에 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제압하고 변한지방을 지배했다는 일본서기의 이른바 ‘가라7국 평정’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것이며, 그 결과 다수의 ‘귀화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후기고분시대를 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야마토조정의 왕을 應神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4세기 후반에 야마토조정의 왕이 應神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백제는 근초고왕의 在位 중이었으며, 한창 국력이 뻗어가던 시대로, 고구려의 대군을 물리쳤으며, 신라도 이에 버금가는 국력을 갖고 있었다.
井上光貞은 국내의 사정은 확실치 않다고 말하고 있지만 일본의 전기고분문화(유물)는 江上씨가 지적한 것처럼 주술적, 평화적, 동남아시아적인 이른바 농경민적 특징이 현저하고 무력적 요소가 결여되어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로 미루어 당시 일본은 농경적 사회였으며, 적어도 5세기 이전(전기고분시대)에는 기마의 풍습이 행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5세기 이전으로 소급하는 馬具의 유물은 일본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井上光貞은 應神을 4세기 후반의 인물로 간주하고 있지만 일본서기에도 이른바 가라7국평정(369)은 神功황후 재위시의 일로 하고 있으며, 應神의 즉위는 39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나는 應神을 396년에 백제에서 독립한 마한세력의 왕(진씨)이라고 보고 있으며, 그가 407년 이후 北九州 筑紫(후쿠오카현)로 건너가 그곳에 왕국을 건설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일본열도에서 5세기 이전의 기마민족의 유물은 앞으로도 영원히 나오지 않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井上光貞은 농업적. 후진적 일본이 이미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확립하고 철제무기와 기마병으로
무장한 백제와 신라를 깨고 가야를 지배했으며, 남한주민의 이민을 촉진하여 야마토국가가 성립한 것이라고 했지만 상식적으로 이것은 앞뒤가 뒤바뀌고 주객이 전도된 논리라고 생각되며, 실제는 北九州 왕국의 진씨가 東征하여 河內. 大和(近畿)를 평정함에 따라 남한주민의 대규모 열도이주가 발생한 것이라고 본다. 그렇지 않고서는 古代에 남한 주민이 지금의 近畿지방(오사카. 나라현)에까지 대규모로 이주를 할 이유가 없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江上씨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북방기마민족의 일본열도 침입 등에 관한 전승은 없다. 역으로 神功에 의한 삼한정벌의 전승이 있다. 江上씨는 이러한 일본서기의 내용을 무시하면서까지 기마민족왕조설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그는 마땅히 고분문화 후기의 개시와 연대를 같이 하는 應神을 기마민족의 초대 왕으로 비정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應神이 北九州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서술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보다 앞 시대인 崇神천황을 초대 왕으로 비정한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應神이 잉태되었을 때 천지신명으로부터 삼한을 수여받았다는 전승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産月이 가까워진 神功황후는 돌을 사타구니에 끼고 신라정벌에 나섰으며, 신라왕의 항복을 받은 다음 九州에 개선하여 '가타' 또는 ‘우미’라는 곳에서 應神을 낳았다. (‘우미’는 황후가 그곳에서 應神을 낳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전승이 있다. 우미는 ‘낳다’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神功황후는 일본서기 편자들이 조작해낸 가공의 인물이다. 그러므로 위의 전승에서 神功황후가 應神을 잉태했다는 내용을 빼면, 應神이 천지신명으로부터 삼한을 수여받았다는 것만 남는다. 아마도 이것이 北九州에 전해오던 應神에 대한 원래의 전승이었을 것으로, 應神이 재기를 도모하기 위하여 北九州로 건너가 국가를 세운 것에서 그런 전승이 남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