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용야오(유영요) 劉詠堯(1907 ~ 1998)「임시정부의 광복군 승인과 독립운동 적극 지원」
1907년 8월 18일 중국 후난성(湖南省) 리링현(醴陵縣) 야오자바향(姚家壩鄉)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전했을 때,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로서 광복군 승인을 비롯하여 다방면으로 한국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14년 죽산유씨(竹山劉氏)소학에 들어갔고, 1917년 리링현 청안진(清安鎭) 란의(兰谊)고등소학을 다녔다. 1919년 후난성 성립(省立) 웨윈(岳雲)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22년 졸업하였고, 그해 베이징(北京)의 차오양(朝陽)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23년 광둥성(廣東省) 광저우(廣州)로 가서 육군강무학교(陸軍講武學校)에 들어간 뒤, 1924년 8월에 황푸(黃埔)육군군관학교 제1기 제6부대에서 동기생 중 최연소 학생인 15세로 들어가 훈련을 받았다. 1925년 봄 졸업하자, 그해 12월 소련 모스크바로 가서 중산대학(中山大學) 제7반 즉 이론가반(理論家班)에 입학하여 1927년 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1927년 9월 육군중교(陸軍中校) 영장(營長)이 되었고 10월에 단장(團長)으로 승진하였다. 1928년 육군군관학교 정훈처(政訓處) 총교관이 되었다. 1929년 북벌이 끝난 뒤, 제4군 총지휘부 정치처 조직과 과장이 되었고 얼마 뒤에 선전과 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같은 해 50사(師)의 정치부 주임이 되었고, 이어 제5군 총지휘부 정치훈도처 주임이 되었다. 1930년 황푸동창회 주임비서가 되었다. 1931년 4월 육해공군 총사령부 ‘비적 진압(剿匪)’ 선전처 부주임을 겸임하였으며, 7월 국민정부(國民政府) 군사위원회 훈련총감부 정치훈련처 처장이 되었다. 이 무렵 누차오극사(怒潮劇社)를 설립하여 사장이 되었고, 『소탕보(掃蕩報)』를 창간하여 사장을 겸임하였다.
1931년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 난창(南昌) 분사를 설립하고 서기가 되었고, 1932년 삼민주의역행사의 중앙간사가 되었다. 7월 장시(江西)·광둥·푸젠(福建) 3성(三省)의 비적 진압 총사령부 훈정처 처장이 되었다. 1933년 2월 군사위원회 정훈처 부주임 겸 정훈연구반 주임이 되었고, 8월 중화부흥사(中華復興社) 중앙간사가 되었다. 1934년 4월 중앙육군군관학교 정훈처 처장이 되었고, 국립 중앙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35년 8월 군사위원회 중앙제군사학교 졸업생 조사처 처장이 되었다. 이 해에 수도 난징(南京)에 신생(新生)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 학교는 뒤에 중정(中正)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같은 해 중국 동자군(童子軍, 보이스카웃) 총회 상무이사 겸 비서장에 취임하였고, 루산군관훈련단(廬山軍官訓練團)에서 강의하였다.
1938년 1월 후난성(湖南省) 항일자위군 부총사령관에 취임하였고, 후난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39년 1월 중정학교를 복구하고 이사장 겸 교장에 취임하였고, 같은 해 중국농민은행 상무이사가 되었다.
1941년 5월 군사위원회 정치부 제2청 청장을 겸임하였다. 1942년 1월 중국국민당 중앙조직부 조직위원이 되었고, 3월에 육군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43년 5월 군사위원회 정치부 제1청 청장 겸 삼민주의청년단 제1기 중앙간사회 간사가 되었다. 같은 해 6월 사청 부청장에 취임하였고, 7월에 청장 서리가 되었다.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직을 역임하는 와중에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전했을 때 김구(金九)·이범석(李範錫)과 관계를 맺고 광복군의 승인을 획득하기 위한 지원을 비롯하여 한국의 독립을 위해 외교·정치·경제·군사·문화 등 다방면으로 적극 지원하였다. 이 과정에서 직위 해제의 위협까지 받기도 하였다.
1945년 1월 육군대학교 제1기 갑급 장군반을 수료하였다. 6월 국민정부로부터 육군 중장에 임명되었다. 1946년 8월 국방부 군직인사사(軍職人事司) 사장 겸 참모차장이 되었다. 11월 제헌국민대회 대표로 당선되었다. 이 무렵 난징에 다시 중정학교를 재건하고 이사장 겸 교장에 취임하였다. 뒤에 항저우(杭州)와 상하이(上海)에 분교를 설립하고 각 분교 교장을 겸임하였다. 12월 난징에서 중정대학교 설립을 준비하였다. 1947년 8월 삼민주의청년단 서북·간쑤(甘肅)·닝샤(寧夏)·칭하이(青海) 등 신사성(新四省) 지도감독 주임이 되었고, 9월 삼민주의청년단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48년 국방부 장관실 주임이 되었다. 1949년 5월 광저우에서 국방부장관 서리에 취임하였고, 12월에 타이완(臺灣)으로 갔다.
이후 타이완 총통부 육군중장 전략고문, 『국방총간(國防叢刊)』 사장, 국립 타이완대학교 교수, 타이완성 잡지사협회 이사장, 중국시사가련연구회(中國詩詞歌聯研究會) 명예이사장, 국군정치사상공작사(國軍政治思想工作史) 편찬위원회 위원, 국립 타이완사범대학교 교수, 중정대학교 동창회 회장, 중국사회학회 이사장, 중한(中韓)문화경제협회 상무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중국국민당당사(中國國民黨黨史)』, 『세계 각국 혁명사』, 『인사행정론총(人事行政論叢)』, 『인생철학론』, 『경제학개론』, 『아흔 살의 회억(九十憶往)』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수많은 시를 남겨 ‘유장(儒將)’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