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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낙월도(下落月島)
전국 최고의 묵석 산지
낙월도는 영광군의 유일한 도서면인 낙월면의 면소재지이다. 낙월도는 상낙월도와 하낙월도로 분리된 두 개의 섬이면서 하나인 섬이다. 약 500m 정도의 좁은 수로를 끼고 두 섬은 물이 빠지면 길이 생기고, 물이 들어오면 바닷물로 뒤덮여 사라지기에 하나이면서 둘이다.
상낙월도와 하낙월도는 썰물 때 1.2km 정도의 모래바닥이 드러나면서 하나의 섬으로 변한다. 이때 상낙월도는 섬의 모습이 지네 형상을 띠었다가 하낙월도와 연결이 되면 흡사 초생달 모양이 된다. 그런데 예로부터 지네는 닭에게 발견되면 꼼짝없이 죽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두 섬이 연결되는 것을 한사코 반대한 노인들의 성화 앞에 좌절되어 오다가 1989년도에 두 섬 사이에 방조제가 놓여 차들도 다니는 등 하나의 섬이 되었다. 다리로 연결할 수 있는 섬이 아니었기에 제방을 쌓을 때 양쪽에 해수가 관통하도록 대형 관을 묻었으면 좋았을 터이다. 제방을 쌓은 뒤 해수가 유통되지 않아 갯벌이 죽어가고 있어서이다. 방조제를 건너 하낙월도에 갔는데, 모든 행정기관은 상낙월도에 있으며 유일하게 교회가 하나 있고 중학교는 폐교되었다.
상낙월도는 북쪽에 있고 하낙월도는 그 아래쪽에 위치하여 주민들은 ‘아랫섬’이라 부른다. 서해의 끝에 위치하기 때문에 육지 쪽에서 관찰하면 마치 달이 섬 안으로 들어가는 광경으로 보였을 것이다. 예전에는 일명 진달이섬 또는 진월도라 불러왔는데 이 명칭은 섬 자체가 떨어진 달로 보였음을 의미한다.
향화도에서 출발한 배는 각시도와 낙월도를 거쳐 마지막으로 하낙월도에 댄다. 잘 만들어진 선착장과 물양장을 지나 마을로 들어가면 마을 입구에 정자쉼터와 함께 마을표지석이 있다. ‘새우의 섬 하낙월도’라고 새겨져 있다. 표지석 맨 위에 새겨진 ‘새우’란 글자 바로 위에 등이 굽은 그림이 있는데, 보는 이에게 피식 웃음이 나오게 한다. 그 옆에는 별도의 표지석으로 섬에 대한 유래가 적시되어 있다.
섬은 너무 고요하지만 그 대신 바람소리와 파도소리 그리고 갈매기 소리가 요란하다. 바다에 고기잡이 갔다가 돌아오는데 수많은 갈매기들이 먹이를 달라고 배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며 따라온다. 갈매기를 데리고 귀가하는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함께 달이 지는 섬의 달빛을 바라보며 하룻밤 묵어가면 좋겠다.
하낙월리는 자연 부락이 2개 마을로 상촌, 하촌이 있으며 30여 세대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주소지가 이곳 하낙월리로 돼 있는 주민까지 더하면 40세대가 넘지만 배를 가지고 사업을 하는 주민들은 어획물 판매와 교육 때문에 목포나 영광, 광주 등에 거주하면서 이곳을 오고 간다.
특히 멀리 목포에서 하루에 한 번 여객선이 다닐 때와는 달리, 현재의 항로인 염산면 향화도에서 불과 23.5km를 하루에 3번이나 다닐 수 있다. 거기에서 섬 주민들은 여객선비가 할인되어 육지와 섬을 수시로 오간다. 바람이 많이 부는 추운 겨울에는 육지로 나가 살다가 봄이 되면 고기잡이가 시작되기 때문에 하낙월도로 돌아와 생활하는 주민들이 많다. 하낙월도는 전형적인 어촌 마을로 노인들이 대부분이지만, 배를 운영할 수 있는 주민들은 바다로 나가 생계를 꾸린다.
하낙월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새우잡이 어선인 해선망어선 일명 멍텅구리배이다. 자기 맘대로 움직일 수 없는 무동력선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이 배는 동력선이 끌어주지 않으면 자기 스스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멍텅구리배는 주로 새우를 잡는 배를 말하는데 공식 명칭은 해선망어업(醢船網漁業)이라고 한다. ‘해선(醢船)’이란 ‘젓을 담그는 배’, 즉 젓배를 말하는 것이다.
멍텅구리배는 조류가 빠른 곳에 닻을 내리고 오랫동안 같은 장소에 머물며 새우를 잡는다. 거센 물살과 높은 파도에서 배를 고정시켜야 하기 때문에 큰 닻을 내린다. 배의 길이가 15m 정도인데 닻의 크기가 커서 배의 절반에 해당하는 8m 길이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큰 닻일 것이다. 새우는 스스로 물길을 헤쳐 나가며 이동하지 못하고 조류에 따라 이동한다. 이때 새우가 지나가는 길목에 이 거대한 닻을 내리고 모기장처럼 촘촘한 그물을 바다에 내린 다음 하루 네 번 들어올려서 새우를 잡는 고된 노동이다.
배의 규모는 보통 15~20t 가량이고, 직사각형 상자 모양으로 그물을 끌어올리기 수월하게 배 앞쪽이 뭉툭하다. 그 당시 멍텅구리배 한 척에는 선장을 포함해 5명 정도씩 탔는데 이로 인한 유동 인구가 수백 명이나 되었단다. 돈섬으로 불리던 하낙월도는 새우잡이로 돈을 많이 벌 수 있어 이 배를 타려고 육지 사람들이 많이 몰려왔기에 방이 없어 셋방살이도 못할 지경이었단다.
50~60년 전에는 두 섬을 합하여 멍텅구리배가 모두 130여 척에 이르렀을 때 낙월도는 흥청거렸다. 1980년대 후반에는 여기서 생산하는 새우젓이 연간 6억여 원에 달할 정도여서 수입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멍텅구리배에서 하는 일이 고되기에 어부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인생의 쓴맛을 본 전국의 사내들이 막장으로 생각하고 절망과 희망을 안고 찾아왔다. 조금 과장되게 알려졌지만 종종 어수룩한 자들을 소개소를 통해 데려다가 그들이 중간에 돈을 가로채거나 제때 주지 아니하고 일을 시키다가 발각되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1987년 7월 갑자기 불어닥친 ‘셀마호’ 태풍으로 이 섬의 멍텅구리배 6척이 파선하여 선원 27명이 수장을 당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하였다. 낙월도 사람들의 수백 년 동안의 밥줄인 전통 새우잡이 멍텅구리배가 빗나간 기상 예보 탓에 기인한 사고였다. 이때 국민들의 원성과 비난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 뒤 안전문제와 인권유린 문제, 어족 자원 보호 차원에서 연근해 어업구조조정을 단행하였다. 이런 사연 속에서 멍텅구리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현재 목포의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강화도의 강화역사관 등에 멍텅구리배가 전시되어 있다. 셀마호 태풍은 멍텅구리배 6척만 휩쓸고 간 것만이 아니다. 선원들이 27명이나 죽고 나서는 보상을 받은 후에 하나둘 육지로 떠나갔다. 중학교도 폐교 조치되고, 이제는 상낙월에 있는 초등학교마저 없어지기 직전이라니 이러다가 무인도가 될 가능성도 남아 있다. 그래서 태풍이 남긴 상처와 아픔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멍텅구리배를 보상 받은 후 육지로 떠나간 사람도 많았으나, 일부는 동력선으로 바꾸어 새우잡이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예전처럼 많은 인력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배에서 사람을 쓰고 관리하는 데에는 보통 까다롭고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즘에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다. 근해에서 많이 잡히던 새우와 고기들의 어획량이 예전 같지 않아 먼 바다에까지 배를 타고 나가야 한다. 때문에 시간과 기름값 등 경비도 만만치 않거니와 영해를 침범하여 어구마저 가져가버린 중국어선들 때문에 위험한 어장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한다.
아름다운 돌 묵석의 명산지 하낙월도
멍텅구리배 다음으로 유명한 것이 하낙월도의 묵석이다. 이 섬은 전국에서 이름난 묵석의 명산지로 알려졌다. 석질이 다이아몬드 다음으로 강해서 묵석 애호가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 1970년대 초반에 수석 붐이 일어나 이곳 낙월도를 요란하게 하였다. 수천 년 동안 서해의 높은 파도에 시달린 검은 돌들이 무수히 널려 있었는데 그걸 줍겠다고 전국에서 하루에도 수백 명이 몰려든 것이다.
하낙월도 해안에는 그 성질이 다이아몬드처럼 강한 돌들이 높은 파도 속에 시달리면서 예술적 가치가 있는 수석으로 인정된 것이다. 낙월도라는 섬이 없다면, 우리나라에 묵석이란 말이 없을 정도라는 말까지 들렸단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검은 색들은 낙월도 검정색 묵석의 아름다움에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묵석은 속까지 검어야 한다. 묵석은 깨뜨려서 봐야 진정한 묵석의 검정색을 볼 수 있다.
1970년대 수석 붐이 일기 시작하여 이곳 낙월도에까지 미쳤다. 그때 낙월도 사람들은 묵석에 대한 개념이 없을 정도로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도회지 사람들이 채취를 하는 것을 도와주고 방치하고 있었다. 묵석에 대하여 무지하여 찾아오는 친구나 친척들에게 선물로 한두 개 나누어 줄 뿐 팔아서 이익을 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바닷가에 널려 있는 수많은 묵석은 그냥 바닷가의 검은 돌에 지나지 않았다. 그만큼 낙월도 사람들은 묵석에 대하여 무지하기도 했지만, 멍텅구리배에서 새우를 잡아 풍족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돌의 가치에 대하여 무관심했다.
이런 묵석이 많이 있는 곳은 하낙월도로 가는 방조제 근처와 상낙월도의 선창이 있는 큰멀과 재개미다. 지금은 묵석의 채취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거대한 태풍이 오면 파도로 인해 해변의 지형이 변하여 깊이 묻혀 있던 묵석을 볼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지금 묻혀 있는 묵석의 양도 그리 많지 않다고 하는데 너무 무리하게 채취해 갔기 때문이란다. 마치 조기의 씨를 말려버린 것과 같은 셈이다.
이제 낙월도 사람들도 묵석을 좋아하고 채취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예전처럼 묵석을 찾을 수 없다. 만약에 낙월도에서 수석을 찾는 분들이 있다면, 바닷가에 가지 말고 동네를 돌아다니면 화단이나 돌담에 있는 묵석을 찾는 편이 빠를 것이라고 어느 주민은 말한다. 동네 안에 온통 돌로 만들어진 집이 있다. 어느 민박집인데 개집도 돌로 만들어졌고 슈퍼도 돌로 만들어진 집이다. 온통 돌천국이다. 이 돌들은 해변에 나뒹구는 자갈들이었다.
이곳 출신인 한국섬 선교회 대표 최종민 목사는 이곳 돌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일화를 들려주었다. 낙월교회 목회자가 광주 시내를 걷다가 수석 가게에 진열된 돌을 보니 낙월도의 그것과 비슷해 가게 주인에게 그 말을 했더니 몇 개만 주워 오라고 했단다. 며칠 후에 가지고 간 돌을 본 주인은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알리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했다. 며칠 후 그 사람은 동호인 몇 명과 함께 비밀 공작원처럼 낙월도에 잠입하여 보물 캐듯이 돌밭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낙월도 주민들은 돌의 가치를 몰랐다. 할 일도 없이 돌이나 줍는 미친 사람 보듯 했다고 하였다. 그렇게 날이면 날마다 묵석을 찾아 실어갔다. 마침내 섬 주민들조차 묵석을 보기 힘들어지게 되었다. 사라지거나 사라질 우려가 있게 되면 그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곳의 묵석이 그랬다. 모두 가져가버린 이후에 보호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 실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연 상태의 고운 돌과 향기로운 난을 볼 권리가 있다고 더 일찍 소리쳐야 했던 것을 뒤늦게 후회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은 반출이 금지되어 있는데 이 묵석 기사를 보고 낙월도에 들어왔다간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다음은 수석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한국수필작가회장을 지낸 수필가 임병식은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하였다.
수석산지인 영광 낙월도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어떤 이가 명석 한 점을 탐석하게 되었다. 한데, 그 명석은 다름 아닌 마을 사람들이 노상 딛고 다니던 노둣돌이었다. 거꾸로 처박혀 있는 바람에 가치를 몰랐던 것이다. 소문은 삽시간에 마을 전체에 퍼져 나갔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반출을 막고 나선 것이다. 이유인즉 이 돌이 낙월도를 빼닮았으니 마을에 보관되어야지 다른 곳으로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갈림길에 선 탐석자는 중대한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돌을 갖느냐, 그렇지 않으면 직장을 버리느냐.
그는 과감히 후자의 길을 택했다. 그렇게 직장과 맞바꾼 명석을 수년 동안 애지중지 잘 간직했다. 그런데 생활고에 허덕이게 됐다. 하여 그는 하는 수 없이 그걸 팔기로 하고 상경해 수소문하던 중 어느 갑부를 만나 그에게 기백만 원을 받고 넘겼다. 직장과 맞바꾼 대가치고는 많다고 할 수 없으나, 그래도 당시로써는 꽤 큰 액수의 돈을 쥐게 되었다. 하지만, 비록 생활이 궁핍하여 팔아먹긴 했지만 늘 돌이 눈에 선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다시 찾아가서 되돌려 줄 수 없겠느냐고 여쭈었다. 그 말을 들은 그 갑부는, “여보쇼, 한번 판 물건을 가지고 장난하는 거요” 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리더란다. 모르면 모르지만, 그 명석은 지금도 그 갑부의 거실에 잘 모셔져서 최고의 완상물(玩賞物)이 되고 있을 게 분명하다.
2013년 하낙월에서 최초로 이장선거를 하여 선출된 이장이 이순애(57세) 씨이다. 마을이 너무 작고 대부분 노인네들이기 때문에 시키면 마지못해서 하기도 하고, 희망하는 사람이 이장을 맡기도 한다. 이순애 이장은 “우리 하낙월리는 공기가 좋고, 경치도 좋은데다가 인심까지 좋아 살기 좋은 동네”라며 “마을주민들도 가족처럼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다”고 자랑한다.
작년에 마을 한가운데 새롭게 건축된 유산각은 임자도와 상낙월도의 경치를 한눈에 감상하면서 쉴 수 있는 명당이다. 매일 이곳에 모여서 다과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데 지루하지 않단다. 종종 오는 관광객이 유용하게 쓰고 있으며 마을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하낙월도에는 조그마한 장벌해수욕장이 있는데 가족과 친구들끼리 즐기기에 딱 좋은 아담한 피서지이다.
이 이장은 지난해 마을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묵은 밭을 일구어 고구마를 심었다. 그러나 워낙 바람이 많이 불고 파도가 쳐서 많이 거두지 못했다. 평생 바다만 바라보고 살아왔기에 농사일을 잘 몰라서 절반은 실패했다고 한다. 고구마뿐만 아니라 고추와 양파, 대파 등을 심으면 육지가 가까워서 내다 팔기에 좋을 것이다. 50대 후반의 나이에 마을을 위해 애쓰는 모습이 생각나서 저절로 미소가 나온다. 고구마 농사뿐만 아니라 옛 명성을 되찾아 명품 새우젓을 하낙월도의 이름으로 인터넷을 통해 판매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달이 지는 쪽으로 한없이 떠나고 싶은 낙월도(落月島)
2017년 8월 섬학교 <2박3일 여름휴가특집>
프레시안 알림 | 기사입력 2017.06.10. 23:49:20 최종수정 2017.11.01. 13:04:31
달이 지는 섬 낙월도(落月島). 8월의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 제62강은 8월12(토)∽14일(월), <여름휴가 2박3일특집>으로 영광의 아름다운 섬 낙월도로 떠납니다. 올해 여름휴가를 계획하시는 회원님들이 참고하실 수 있도록 미리 공지합니다. 숙박시설이 많지 않은 관계로 30분을 선착순 접수, 마감합니다.
낙월도는 새우의 고장입니다. 새우 덕에 일제 때는 “뱃사공 부인도 비로도(비단)치마를 입고 다녔다” 할 정도였고 “전라도 세 번째 갑부가 살았”을 정도로 부유했던 섬.
지금도 여전히 새우의 고장이지만 섬은 한적하고 소박합니다. 물놀이하기 좋은 해수욕장이 세 개나 있지만 한 여름에도 한산해서 여름휴가를 즐기기 더없이 좋은 섬입니다. 섬에는 내내 바다를 바라보면 걸을 수 있는 해안 둘레길이 잘 조성되어 있어 트레킹하기도 좋습니다. 신령한 기운이 도는 당산 숲도 아름답습니다. 최고로 높은 곳이 109m밖에 안 되니 가파른 길도 없습니다.
낡고 허름하지만 세속의 때에 물들지 않은 섬 토속음식을 차려내는 민박집 밥상은 더없이 맛깔스럽습니다. 더위에 가출했던 입맛을 되돌아오게 만들기 충분합니다. 마당을 나서면 바다와 갯벌, 거기서 뒤안길로 50미터만 걸으면 아담하고 예쁜 해수욕장이 있는, 섬마을로의 휴가. 한적한 섬에서의 여름휴가를 계획하고 계신 분들을 초대합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8월 답사지인 <낙월도-2박3일 여름휴가특집>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달의 후예들이 사는 곳
굴은 달이 차고 기우는데 따라 여물기도 하고 야위기도 한다
섬사람들도 굴처럼 살이 올랐다 야위었다 한다
섬사람들은 달의 자손이다
달이 바닷물을 밀었다 당겼다하며 바다 것들을 키우면
사람들은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고 소라고둥과 굴들을 얻어다 살아간다
(강제윤 詩 <달의 후예>)
영광 향화도 항에서 출항한 낙월도행 여객선은 직항하지 못하고 먼 길을 돌아간다. 밀물 때면 물에 잠기고 썰물 때만 형체를 드러내는 모래평원 풀등, 이 바다 속에도 100ha에 이르는 거대한 풀등이 있다. 여객선은 풀등에 걸려 좌초할까 두려워 우회하는 것이다. 낙월도가 새우젓의 산지가 된 것도 새우들의 산란장인 이 풀등 덕이다.
상낙월도항에 잠시 기항한 여객선은 하낙월도항에 정박한다. 낙월도는 한 섬의 지명이 아니다. 상하낙월도 두 섬을 동시에 일컫는 이름이다. 낙월도(落月島)의 옛 이름은 진다리(진달이)섬 혹은 진월도(珍月島)다.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진월도로, 고산자 김정호(1804∼1866)가 편찬한 <대동지지>에는 낙월도로 표기되어 있다. 낙월도가 진다리섬이 된 것은 백제가 폐망할 무렵 백제의 왕족들이 배를 타고 피난을 가다 달이 지자 항로를 잃고 이 섬에 정착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전설은 전설일 뿐. 달과 밀접해 보이는 이름들이 실상 달과는 무관하다. 낙월도 인근 해역은 너른 갯벌이 분포해 있다. 진다리는 진들, 즉 갯벌을 뜻한다. 진들 한가운데 있어서 진들섬, 진다리섬이라 불리다가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진월도(珍月島), 낙월도(落月島)로 바뀐 것이다.
별개의 섬으로 있던 상하 낙월도는 갯벌 사이에 제방을 쌓아 만든 연도제로 하나의 섬처럼 됐었다. 하지만 두 섬 사이를 막은 제방이 해수 유통을 방해해 갯벌이 점차 물러져 늪이 되어 갔다. 갯벌에 의지해 살던 섬사람들은 작업을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근래에 다시 제방의 일부를 트고 다리를 놨다. 물은 흘러야 마땅하다. 그래야 갯벌도 살고 사람도 산다. 갯벌은 다시 점차 본모습을 찾아가는 중이다. 낙월도는 전남 영광군 낙월면의 소재지다. 11개의 유인도와 41개의 무인도를 아우르는 낙월면 전체 인구는 700여 명에 불과하다. 1965년 인구가 4,000명이었으니 급격한 인구 감소를 겪었다. 섬은 달이 차고 기우는 것처럼 그렇게 저물어 갔다.
옛 모습 살아 있고 인심은 소박하다
하낙월도 민박집에 여장을 풀었다. 상하 낙월도 두 섬 다 관광객들은 거의 없다. 섬에 빼어난 풍광이나 역사 유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적한 어촌 마을이다. 그래서 오히려 평화롭고 여유롭게 쉬다 가면 좋은 섬이다. 낙월도에는 장벌, 재계미, 큰갈마골 등 해수욕하기 좋은 해변이 있어서 여름이면 피서객들도 제법 찾는다. 그밖에는 주말이나 연휴에 섬 둘레 길을 걷거나 캠핑을 하기 위해 조금씩 찾아들 뿐이다. 그러니 식당도 따로 없다. 민박집 시설도 부족하다. 하지만 관광객이 적은 만큼 섬은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고 인심 또한 소박하다.
새우젓의 고장답게 낙월도 곳곳에는 새우잡이에 쓸 어구들이 잔뜩 쌓여 있다. 낙월도는 옛날부터 새우의 산지로 유명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는 전라도의 세 번째 갑부가 낙월도에 살았을 정도다. 전성기 때는 새우잡이 배가 400여 척이 넘은 적도 있었다. 지금 인구(320여 명)보다 어선이 많았다. 그중 멍텅구리배(해선망어선)는 80척. 요즘 새우젓 산지로 유명한 임자도 전장포에는 당시 멍텅구리배가 15척 정도밖에 없었다. 보통 멍텅구리배에는 5명씩 승선해서 조업했으니 낙월도 배의 선원들만 400명이나 됐다. 그래서 한때 낙월도에는 술집과 다방이 10여 곳에 이를 정도로 유흥업도 덩달아 번성했었다.
낙월도 사람들은 오랜 세월 전통 어선인 '멍텅구리배'로 새우를 잡았다. 바지선처럼 다른 배가 끌어주어야만 움직일 수 있어서 멍텅구리배로 불렸던 무동력선. 그 배로 새우를 잡을 때는 상하 낙월도 두 섬이 전국 새우젓 시장의 50%를 점유할 정도였다. 하지만 1987년 '셀마' 태풍 때 멍텅구리배가 난파되어 선원들이 떼죽음을 당하면서 멍텅구리배는 어업의 역사에서 영영 퇴장 당하고 말았다.
낙월도 사람들은 임자도 전장포보다 낙월도가 새우잡이의 원조라고 자부한다.
“전장포는 낙월서 헌 어구 가져다 새우잡이를 시작했어. 그런데 이제는 거기가 더 커져버렸어.”
낙월도는 여전히 새우의 고장이다. 현재는 하낙월에 20척, 상낙월에 17~8척 정도의 새우잡이배가 있다.
면사무소 부근에서 만난 노인은 평생을 섬에서 살았다. 노인은 낙월도를 비롯한 영광바다의 어장이 황폐화된 것이 1986년 영광원전이 들어서면서부터라고 주장한다. 원전이 건설된 뒤 뜨거운 물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에 바다의 수온이 너무 높아져 물고기들의 서식 환경이 파괴됐다는 것이다. 게다가 냉각수를 뽑아들이는 취수구로 부화된 물고기 유생들이 빨려들어가 죽으면서 어장은 완전히 초토화되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원전 저것이 어민들 다 죽이는 살인무기여."
그래서일까. 지금 영광의 칠산바다에는 어선 한 척 떠있지 않다.
염산의 천일염과 낙월의 새우가 만나니
과거 낙월도 새우젓이 명성을 얻은 데는 염산면의 소금이 한몫을 했다. 염산면에서 나는 천일염과 낙월도의 질 좋은 새우가 결합되어 맛이 뛰어난 새우젓이 생산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낙월도는 일제 때부터 부자섬으로 이름 높았다. 그때는 일본인들이 낙월도에 거주하며 어업조합을 관리했다. 일본 상선들도 낙월도까지 찾아와서 새우를 사갔다.
"낙월서 난 니보시(삶아서 말린 새우)는 아지노모도란 일본 조미료 공장에서 수입해 갔어."
일제 때 낙월도에서 동경 유학생이 6명이나 나왔고 "뱃사공 부인도 비로도(비단) 치마를 입고 다닐 정도"였다. 해방 후에도 낙월도는 여전히 부유한 섬이었다. 모두가 새우 덕이었다.
"낙월도에는 전라도에서 세 번째 가는 갑부가 있었어. 김달선 씨라고. 새우잡이배 선주였지. 돈을 가마니로 져 날랐다고 해. 아주 왕 노릇을 했었지."
낙월도에는 논이 전혀 없고 밭만 있다. 예전에는 밭에 거름으로 새우를 쓸 정도로 새우가 많았었다. 농사는 전적으로 여자들 몫이었다.
"남자는 배에 다니다가 집에 오면 손님이었어."
낙월도 사람들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전통 새우잡이 어선 멍텅구리배가 위험한 배였다고 알려진 것이 억울하다. 1987년 7월 셀마 태풍으로 조업중이던 낙월도의 멍텅구리배 12척이 난파돼 선원 51명이 때죽음을 당한 적이 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섬 앞바다 물살이 센 어장까지 동력선이 끌어다줬다. 어장에 도착한 배는 거대한 나무닻을 내려 정박했다. 좌우로 길게 뻗은 날개에 줄을 매달아 그물을 내리고 조류를 따라 그물 입구로 새우가 들기를 기다렸다가 새우를 건져 올렸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바다에 내려앉은 비행기 같았다.
당시 일부 멍텅구리배에서 선원들에 대한 구타 협박 등 인권침해가 컸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셀마 태풍 때 멍텅구리배가 난파되는 사고를 당한 것은 배의 구조에 결함이 있어서도 선주가 사고가 나도록 방치해서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고는 잘못된 일기예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멍텅구리배 선원들은 일기예보에서 태풍이 비껴간다고 해서 피신하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마치 태풍이 오는데도 선주들이 무리하게 조업을 시켜서 사고가 난 것처럼 알려져 억울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셀마 태풍으로는 난파된 멍텅구리배에서는 낙월도 주민인 선장 3명과 선원들도 여럿 함께 타고 있다가 수장을 당했으니 주민들의 증언도 일면 타당해 보인다. 사건의 실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주민들은 그때의 사건이 거론되는 것을 꺼려하지만 낙월도 이야기를 하면 결코 비껴갈 수 없는 사건이라 다시 기록한다. 아픈 역사도 역사다.
둘레길, 산책로처럼 여유롭다
하낙월도와 상낙월도 두 섬 다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으나 찾는 이들이 많지 않다 보니 관리는 소홀한 편이다. 하낙월도 둘레길은 장벌해변에서 당너매, 전망대, 외양마지, 진월교로 이어진다. 시야가 탁 트여 걷는 내내 바다와 섬들을 바라볼 수 있다. 가파른 비탈도 없고 거리도 3km 남짓이니 여유롭게 산책하기 좋다. 상낙월도 둘레길은 상하 낙월도를 연결해주는 진월교에서 시작되는데 쌍복바위, 누엣머리, 당산, 큰갈마골해변, 큰애기고랑, 재계미해변, 달바위를 거처 상낙월항까지 그대로 섬을 한 바퀴 돌게 되어 있다. 7km 남짓한 길이니 천천히 걸어도 두세 시간이면 충분하다. 상낙월도의 최고봉은 98m, 하낙월도의 최고봉은 109m에 불과해 산이라기보다는 구릉에 가깝다. 그런 까닭에 둘레길은 그저 산책로처럼 걸을 수 있다. 걷는 중간중간 해변에서 놀 수도 있고 당산숲 그늘 아래 쉬었다 갈 수도 있다.
상낙월도 당산숲은 신령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이 당산의 수호신은 현풍 곽씨 할머니다. 16세기 말 재계미로 처음 들어와 살았던 입도조 할머니다. 예전에는 정월 초하룻날이면 무당을 불러 당산나무 아래서 곽씨 할머니를 신주로 모시고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대동제를 올렸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당제도 지내지 못하게 됐다. 미신 타파를 이유로 정부에서 금지했기 때문이다.
"당제가 없어지면서 마을이 더 삭막해졌어. 대동의식도 없어지고. 유대가 잘 안 돼."
그래서 섬 노인들은 다시 대동제를 부활시키려 노력 중이다. 박정희 시대 파괴된 우리 전통문화가 어디 대동제뿐일까. 독재자들의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더 늦기 전에 되살려야 할 우리 전통 문화들. 거기 우리의 오래된 미래가 있다.
영광군 낙월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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