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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순간
구청에서 시행하는 은퇴자 준비학교의 첫 강의 선생님이 질문하셨습니다. 서울서 부산을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러 답변이 있었으나 저는 문득 좋은 친구와 함께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답했더니 선생님은 준비한 선물까지 주셨습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신기하기도 했으나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이미 노년의 삶에 접어들어 외로움이 깃든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어 이 글을 써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함께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좋은 사람과의 시간은 금세 지나가겠지요. 더욱이 기차로의 여행이라면 기차의 안락함과 내 마음의 어릴 적 설렘 그리고 거기에 더해지는 낭만적 만남의 즐거움에서 오는 기쁨과 끝나고 나서 좋은 추억까지 더해진다면 그것은 삶의 호사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일상의 시간에서 누릴 수 없는 그런 즐거움에 빠져보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묘미이자 노년의 기쁨이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짧은 인생의 시간을 상대적으로 압축해 더욱 더 빠르게 보내는 것이야말로 삶에 무수한 이득을 가져다주는 활동력이라고 봅니다.
인간의 삶이란 것도 결국은 인생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시간의 소비입니다. 즐겁거나 아쉬움의 시간에서는 그 길이를 줄이겠으나 고통이나 곤경에 처하여있다면 시간은 한없이 늘려가겠지요. 서울서 부산을 과거에는 8시간 걸리던 것을 지금은 두시간만에 갈 수 있습니다. 결국 행위의 시간을 줄인다는 것은 그만큼 삶의 시간을 버는 꼴이 됩니다. 그것이 현대인의 딜레마입니다. 시간적으로는 많은 줄임을 통해 여유가 생겼으나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얻지 못함에 의해 삶의 안정성은 떨어집니다.
시간을 초월한 존재인 신에게 영원성이 있다면 시간안의 존재인 인간에게는 현실성이 있겠지요. 하지만 인간은 포기할 줄 모르는 존재입니다. 결국 신의 영원성에 대응하는 영혼이라는 정신세계를 만들어 냈지요. 영혼은 신을 받아들일 마중물이며 정신을 통치하는 조절자이기도 합니다. 영혼 안에 인간의 모든 몸과 마음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무한히 이어놓으며 신과 같은 능력으로 인간의 마음을 조절합니다. 영혼의 일부라고 할 인간의 마음은 운명의 시간을 벗어나려 애써왔습니다. 주변의 모든 상업적인 제품들이 시간과 관련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이 시간 속에 노출되어 있다면 인간은 시간 속에 갇혀있습니다. 즐거운 마음은 시간을 감각에서 지워버립니다. 세상사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할 때에 시간의 길이도 마음먹기에 따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는 말도 되겠지요.
그것은 시간을 속도로 치환했을 때에 잘 보여줍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변화를 거부하던 사람들의 최우선 순위가 그것을 잘 보여주었지요. 지구가 태양주위를 돈다고 하면 그 속도가 총알의 30배라고 하는데 왜 우리는 그런 느낌을 갖지 못하느냐는 거였습니다. 즉 하늘로 던진 돌멩이가 그 자리에 그대로 떨어지고 왜 우리의 머릿결은 휘날리지 않느냐는 심각한 의문이었습니다. 시속 100km로 달리는 기차를 타고 갈 때 기차 안에서는 모두가 고정되어 있으니 모릅니다. 그것은 등속운동을 하기 때문이지요. 창밖의 풍경을 보고서야 자신이 달려가고 있음을 깨닫지요. 바로 그와 같은 상대적인 삶을 살아가려 노력한다면 그것도 현대를 살아가는 좋은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는 자동차 운전 중에 앞차와의 충돌로 부딪치는 순간을 당하면 그 찰나의 짧은 순간이 우리의 뇌에서는 급박하게 빠른 속도로 돌아가면서 시간 축 상의 미세한 상황들을 머릿속에 그대로 기억되도록 작동합니다. 마치 1m 단위로 측정하던 것들이 갑자기 1mm 단위로 설정되어 측정되는 것과 같겠지요. 슬로우 비디오처럼 녹화되었다고 하는 것은 순간에 대응하는 뇌의 반응속도가 대단하게 평소와 달리 고속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그 기억은 생생하게 재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뇌는 녹화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응해 신체의 곳곳으로 그 반응에 따른 대응명령도 또한 함께 내립니다. 하지만 상황은 끝나고 몸에 반응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급격하게 종료합니다. 그러나 내려진 명령은 회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보니 신체 곳곳의 관절이나 장기 등에서는 이미 뇌의 명령에 의해 충격에 대응할 신체에서의 작동이 한번 이루어진 것입니다.
회피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에 당면했을 때 우리의 두뇌는 시간의 길이를 한정 없이 늘려 거기에 대응하려 합니다. 순간의 시간span을 무수한 미세단위로 쪼개어 기억시키지요. 그렇게 시간의 단위를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생생하게 기억까지 시키는 이중의 고통이 두뇌에서 작동됩니다. 거기에 더해 뇌의 반사작용은 온몸의 신경세포로 당면한 고통에 대응하도록 관절과 근육과 혈관 등에 이미 명령이 전달된 이후가 되겠지요. 상황은 끝나도 신경세포들은 그 명령을 한번은 수행해야 합니다. 신체적 변화를 스스로 감지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신체에는 이미 어마어마한 충격이 한번 쓸고 지나간 꼴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고통에 반응하는 물질들이 충격에 대응할 신체 모든 곳에서 일제히 나오면서 충격에 대비하는 마비효과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교통사고에서 크게 다치지도 않았는데 하루 지나면서 온몸이 무력해지고 뼈마디마다 아파와 꼼짝 못하는 것은 몸에서 나온 반응 분비물에 의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 다른 예로서 눈앞에서 갑자기 번쩍하는 빛에 노출된 두 눈은 처음에는 그냥 아무것도 안보이며 머릿속이 하얗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괜찮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우리의 두뇌에는 그것에 반응해 모든 신경세포들이 움직였으며 - 눈에 보임이 없었으니 녹화는 없습니다. - 그 결과로 눈 주위에 모든 방어동작들을 지시했겠지요. 단지 그것을 우리가 감지하지 못할 뿐입니다. 결국 생명에 위협되는 충돌상황에서는 24시간, 생명에 위협이 되지 않는 특수상황에서는 12시간 이후에 그 반응으로 어떤 물리적 증상을 우리 몸은 보여줍니다. 그것은 뇌의 명령으로 나온 어떤 대응물질들에 의한 신체적 증상입니다. 결국 12시간 후에 갑자기 두 눈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계속해서 나오는 증상을 보입니다. 어떤 충격에서 우리의 신체는 그와 같이 늦게 보호증상들이 나타납니다. 두뇌는 신속한 대응속도를 보여주며 지나가지만 신체는 늦은 대응과 그 마무리로서 치유를 위한 고통의 증상까지 보여주는 겁니다. 신체는 경험의 수용체로 세속적인 고달픈 삶에 놓여있고 정신은 오로지 지성과 관념으로 천상의 세계를 향유한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의 구조 자체가 이와 같이 근본적 부조리의 조화로서 구성되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즐거움에서는 반대현상이 나타나겠지요. 즉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켜 영원히 지속되는 차원으로 몰고 갑니다. 몸에서는 시간이 동일하게 흘러가지만 두뇌에서 느끼는 시간은 짧으니 그것도 결국은 부조리로서 몸과 마음이 서로에게 충격을 주는 효과가 발생되겠지요. 그러나 그 충격은 즐거운 시간(짧은 시간)이 종료된 이후에 일상의 시간으로 돌아온 다음에 느끼는 것이니 위의 경우와 정반대의 효과를 보여줍니다. 이때 신경세포들은 온 몸에 시간의 이질감을 고통이 아닌 더욱 느린 속도로 몸이 원상태로 돌아갈 수 있도록 즉 몸에 휴식을 취하도록 하는 효과를 부여해주겠지요. 노동 후의 늘어진 휴식이 인생의 보람이요 기쁨이듯이 즐거움 이후도 그런 현상을 보이겠지요. 당연히 육체로 전달된 기쁨의 신경들은 온 몸의 조직들과 신경세포들에서 축제의 한마당을 만들면서 아드레날린이라는 호르몬을 배출하겠지요.
서구에서 시간의 단위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시작한 것이 기차가 운행되면서 부터라고 합니다. 누구나가 정확한 시간에 출발과 도착을 가져야하니 기계적인 확고함으로 승객들의 시간을 소비시키지 않기 위함이며 최초로 시간이 보편성을 획득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결국 시간개념은 서구 근대의 사고인 기계론적 합리주의로서의 이성적 시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순간에 대응하는 개인의 느낌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무수한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감성적 시간이라 느껴집니다. 근대까지의 삶이 오직 하나의 시간단위만이 존재했다면 현대의 삶은 개인의 역량에 따라 무수한 상대적 계층적 시간의 단위가 존재합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시대가 우연으로서의 현대입니다. 근대까지는 신과 과학으로부터의 교리와 법칙에 의존해 살아왔다고 한다면 현대는 그런 의지처가 사라진 시대이며 내 능력의 활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절입니다. 결국 내가 내 삶을 조절하고 시간을 조절해 내 존재를 고통 속에서 구원해야 하는 실존의 시대입니다. 그런 시간의 조절에 윤리적 즐거움이 연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의 시간은 절대적 시간이 아니라 상대적 시간일 따름입니다. 시간의 제약에서 잠시 벗어남이 시간의 정지요 지속되는 시간의 궤도에서 동시간의 속도를 마주함이 시간의 멈춤인 것입니다. 우리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우리는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즐거움의 대상과 내가 동일한 속도로 동조된 상태이며 동일한 시간을 소비할 때이니 그러한 공진 속에서 즐거움은 무한대로 늘어납니다. 시간은 흘러가나 느끼지 못하는 즉 지동설로 지구는 계속 초속 30km의 속도로 달려가고 있으나 인간은 전혀 그 느낌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이며 그것은 함께하는 운동의 효과라고 하겠지요.
어떤 몰입의 순간은 우리에게 시간의 정지라는 마취효과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분열의 고통에 처하면 시간은 늘어납니다. 우리가 시간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어떤 즐거움이나 몰입에 의해 흥분하고 긴장한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능력은 그런 몰입이나 즐거움을 지속할 수 없다는 한계 역시 가지고 있지요. 절정의 시간은 순간에 지나가고 몰입의 시간도 순간만으로 한정됩니다. 그 순간을 다른 사람보다 늘릴 수 있는 재능이야말로 능력 있는 사람이라 하겠지요. 바둑이나 탁구와 같은 운동의 세계에서 보면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는 사람들은 그 집중하는 시간이 상대보다 길기 때문에 이길 확률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프로의 세계에서 실력은 거의 모두 비슷하다보니 집중력이 좋아야한다지요. 단지 상대의 결정적인 공격을 순간의 집중으로 내 시간의 길이를 늘려 유연하게 볼 수 있다면 언제든지 이길 여유가 생길 겁니다. 즉 시간제한이 한 시간인데 그것을 열 시간으로 늘릴 수 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거나 상대의 공격 볼이 내 앞에서 슬로우 비디오처럼 다가오고 있다면 얼마든지 거기에 대처해 공격이 가능하겠지요. 몰입은 그와 같이 시간을 늘리며 흥분은 그와 같이 시간을 줄입니다.
즐거운 흥분의 시간들은 정지된 시간으로 다가오며 그 정지는 인간의 몸이 우주적 질서로 들어서는 즉 영혼에 닿는 순간입니다. 육체는 시간 속에서 노쇠해가지만 정신은 즐거움 속에서 영혼을 만납니다. 육체의 건강을 유지하기위해 부단히 운동한다면 정신의 건강을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두뇌 속 개념의 총량수를 증가시키는 노력도 마땅히 해야 할 겁니다. 건강만으로 노년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개념의 탐구에 몰두하며 시간가는 줄 모르는 고통 속에서 희열의 삶도 있습니다. 개념은 우리에게 현실이 아닌 추상적 세계를 보여주며 그 확장된 추상적 개념들은 현실적응과정에서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적 능력으로서의 바탕을 일구어 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노년의 삶의 길이는 그런 추상성의 증가와 현실과의 대면에서 오는 사색의 즐거움이 깊은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앎으로 선택하는 인문학에의 도전은 세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지식의 증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지식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지식의 진보는 결국 그 끝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볼 뿐이죠.
인생이라는 삶의 궁극적 가치는 즐거움에 있다 하겠습니다. 그 즐거움의 도구로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하는 문제만이 놓여있죠. 즐거움에도 어떤 자격과 능력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시간안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는 시간에 대응하는 우리의 관념이 즐거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침에는 분명합니다. 정신적이고 순간적이며 직관적인 시간성 안에 우리 인간의 즐거운 삶이 놓여있습니다. 어떤 지성적 논리적 관념적 시간성 안에는 정지되고 고정된 이념들만이 넘쳐나겠지요. 즉 정체되지 않는 자기 동일성의 유지를 지속함에 의해 현재라는 시간의 정거장에서 그 활동력을 키워나갈 때 즐거움도 덩달아 커져가겠지요. 시간을 파악하는 주체는 정신이며 정신 속에서 시간은 얼마든지 연장과 단축을 가질 수 있습니다. 타의적이 아닌 자의적인 우리의 의지에서 시간은 삶의 역동성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심리적 도전 상태에 따라 시간의 단위는 바뀝니다. 하루가 십년이거나 십년이 순간이거나.
영원은 신의 세계이고 시간은 인간의 세계입니다. 영원은 신의 전능이고 시간은 인간의 활동입니다. 시간은 우리 앞에서 다가오고 있지만 우리는 자꾸 자신의 존재를 과거에서 연역하려 합니다. 어지러움은 그런 때에 발생합니다. 내가 타고 있는 기차는 정지해있으나 옆의 기차가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면 내가 뒤로 가는 느낌을 가집니다. 가상현실이 현실이 되는 순간입니다. 결국 미래와 과거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중적 혼란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인과율로 재단하려 할 때에 어지러움 증은 재발되며 가중됩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혼란과 과거에 대한 소회라는 혼란입니다. 현대는 미래의 희망에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는 만큼이나 과거의 소회에도 그 가치를 닫아놓고 있습니다. 그것이 현대로 나타나 사람들에게 목표와 성과로 다가올 때에 우리는 어지러움 증과 차멀미로 구토를 일으켜주겠지요. 인간이 시간을 도입할 때에는 항시 언제when에서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현재를 기준으로 삼았음을 무의식적으로 의식하며 던지는 말이지요. 우리의 모든 삶의 근거가 현재임을 현대 이전의 사람들은 그 두려움으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며 과거의 진리와 본질에 몰두했으며 근대는 인간의 무한한 능력이라고 생각한 이성에 의한 미래의 희망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적나라함에서 활동을 어떻게 시작하여야할 것인가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앞에 놓여있는 운명입니다.
시간은 모든 것을 창조하지만 결국 모든 존재하는 것을 소멸시킨다고 셰익스피어는 말했다지요.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 안에 존재하는 어지러움의 시간에서 우리 마음의 안정은 자기동일성의 활동성에 있습니다. 즉 심리적 시간은 인간의 마음상태에 의해 좌우되는 관계망을 형성할 따름입니다. 마음이 불안하다면 시간은 무한으로 늘어날 것이며 즐거움이 배가되면 최소를 향해 짧아지는 것입니다. 과거는 시간의 결과로서 미래는 시간의 계획으로서 그 존재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나 현재는 그 존재가능성을 찾을 근거를 어디에서고 가져올 수 없는 불확정의 시절입니다. 현실이 불안함은 그와 같이 우주적 시간의 흐름에 자신의 시간을 일치시킬 근거를 찾지 못함에 따른 현상이라 생각됩니다. 자신의 시간을 우주적 질서의 시간과 일치시키는 과정은 인간의 마음의 활동력에 좌우되겠지요. 결국 각자의 개별적인 노력에 의해 그 임자 없는 영역을 개척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무도 도울 수 없는 영역입니다. 현실에서의 인내를 수반하는 자기동일성 운동이야말로 현실에서의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행위이며 그런 상태에서 시간은 영원성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허무와 미래의 불안이 현재의 무의미를 가져왔다고 봅니다. 마음의 방향이 물리적 시간이 아닌 심리적 시간을 향할 때에 우리에게 구원(영원)의 삶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현재라는 시간은 결국 사라지지 않는 영원이고 지속되는 현재만이 우리의 피부에 와 닿을 수 있고 실감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과거나 미래는 우리의 상상 속에서나 접촉이 가능한 세계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발자국이 정지하면 과거요 너무 성급하게 달려 나가면 미래이니 같은 등속도로 우리의 마음이 우주적 시간의 속도와 일치되어 달려가면 그것은 정지의 순간이 되며 삶이 영원에 닿는 순간이 됩니다. 어쩌면 종교에서의 회심이라는 메타노이아도 그런 신과의 일치된 순간의 경험이 바탕이 될 때에 일어나는 인간의 정신현상이라고 봅니다.
심리적 시간의 속도는 각자의 개별적 영역이지만 그것이 친한 친구와 함께하는 여행길이라면 서로가 가지는 시간의 속도는 동일해지며 각자의 정신세계에 정지명령을 내립니다. 바로 그 정지의 시간이야말로 영원의 시간이 되는 순간이며 부동의 동자가 되는 순간이라 생각됩니다. 결국 현실의 자신을 가장 잘 명확하게 알기위해서도 우리는 취미로서의 자기동일성의 확장에 나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취미인이 되어야하며 그것이 상대(친구나 이웃)에게 행복감을 몰아줄 수 있는 무한한 에너지원이 되며 그런 자격을 갖추어가는 노력이 현대인의 삶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리적 시간 속에서 원하는 것을 얻은들 그것은 소멸을 전제하는 과거의 회한으로 남을 따름입니다. 꿈이자 한순간의 머무름일 뿐입니다. 덧없는 쾌락이자 그 뒤를 이어 발생할 지속적인 고통의 순간이며 미리 선불해서 쓰는 빚일 뿐입니다.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기차에서 서로의 창으로 상대를 바라볼 때의 속도감은 배로 증가하지요. 그럴 때에 우리의 마음은 어지러움 증으로 반응하며 눈을 돌려 뇌가 반응하지 않도록 보호합니다. 결국 인간의 마음은 상호 동조되었을 때에 안정감이 최고조에 달하며 그것은 상호 손실 없는 결합이 되어 서로를 기쁨으로 물들여줍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운명은 평행해서 달려갈 기차를 도입해야할 요청의 순간에 놓여있습니다. 부조리속의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대답 없는 세계에 우리가 만들어가는 요청만이 필요합니다. 변화와 운동 속에서 서로가 동조되는 느낌의 순수한 현실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은 신의 능력이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가상세계를 창조해 그 속에서 시간의 길이를 줄여가는 활동으로 삶을 즐기는 것이 현대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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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ㅎㅎ열차타고싶내,,,,,,,,,,,,,,
와 ! 대단한 장문 입니다 !
이어지는 궁금에 연속 읽혀지는 ‥ ‥
수고 하셨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