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속의 작은 유럽’이라 할 수 있는 구랑위는 샤먼에서 바닷길로 600여 미터 떨어진 작은 섬이다. ‘嶼(서)’가 작은 섬을 나타내는 한자이니, 지명 자체만으로도 코딱지만 한 섬임을 직감할 수 있다. 실제로 섬 전체 면적이 2㎢에 불과하다. 하지만 섬을 들어가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걷다보면, 베네치아와 같은 관광객 북적대는 유럽의 근세도시를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정말이다. ‘중국에도 이런 곳도 있었나?’ 할 정도로 이색적인 풍광을 지닌 독특한 지역이 샤먼의 부속 섬 ‘구랑위’이다.
제1차 아편전쟁(1839 ~ 1842)의 결과, 청나라 정부는 1842년에 영국과 난징조약을 맺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홍콩의 할양, 광저우(廣州)·샤먼(廈門, 하문)·푸저우(福州, 복주)·닝보(寧波, 영파)·상하이(上海)의 개항, 개항장에 영사관 설치, 막대한 전쟁 배상금 지불, 공행상인 폐지 등이었다. 세상의 중심은 자기들이라 자부했던 대국 청나라의 코가 쑥 빠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번 답사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샤먼이 난징조약 체결로 개항된 5대 개항장 중 하나라는 점이다. 우리가 인천 공항에서 출발해서 착륙하는 곳이 샤먼 공항으로, 샤먼은 현재는 육지와 다리가 놓여 져 뭍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섬이다. 현재 인구가 250만 정도 살고 있으니 섬 중에서도 상당히 큰 섬이다. 이런 섬이 난징조약 체결로 영국에게 개방 당했으며, 영국은 샤먼 해안에 조계를 설정하여 자기들 편할 대로 건물도 짓고 항만시설도 개설하며 유럽풍의 도시를 만들어 갔다. 하나 전후관계를 엄밀히 따지자면 제1차 아편전쟁 때 영국군은 구랑위를 점령하여 이곳을 기점으로 전쟁을 치르며 난징 조약 체결 이후 샤먼을 개항시켰다. 이런 연유로 샤먼에 조계지가 설정된 이후 영국군은 구랑위에서 철수했지만, 이 섬을 자기들 수중에 계속 남겨 두었고, 후에 중국인 거주지와 분리된 안전하고 쾌적한 외국인 거주지로 개발할 수 있었다.
구랑위가 본격적으로 개발된 시기는 1903년, 이곳이 국제 공공조계로 지정된 뒤부터이다. 1895년 청일전쟁 때 일본이 타이완을 점령하자 청나라 정부는 일본의 샤먼 진출을 경계하여 외국 열강들에게 샤먼 보호를 제안했다. 이에 대해 샤먼에 주재하고 있던 외국 열강 9개국 주재 영사가 화답을 하여 1902년 1월에 ‘샤먼 구량위 공공지계장정’을 체결했다. 9개 국가는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일본,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노르웨이연맹’이었다. 이로써 구랑위는 1854년에 설치된 상하이 공공조계에 이어 중국 땅에 두 번째로 설치된 공공조계지가 되었다.
이후 구랑위 공공조계는 샤먼의 영국 조계지가 1930년 국민당 정부에 넘어간 뒤에도 조계지로 계속 유지되었으며, 중일전쟁으로 1938년 일본군이 샤먼을 침공했을 때에 중국인들이 대거 구랑위로 피신하기도 했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일본군이 구랑위 공공조계 내에 직접 병력을 파견하여 주둔하기도 했다. 이러한 곳이 중국 영토로 재 편입된 것은 1945년 태평양 전쟁이 종결된 이후였다.
구랑위의 도시 개발 역사가 이러했기에 당연히 구랑위의 개발은 외국인이 주도했다. 또한 치안 유지, 세금 징수, 도시 건설 등의 역할을 맡은 행정 기관인 공부국(工部局)의 임원 역시도 거의 전부가 외국 사람들이었다. 여기에 구랑위 땅이 원칙적으로는 중국 소유여서, 주민들이 납부한 토지세 등은 중국 정부에 귀속됨이 당연했지만, 조계 당국은 구랑위의 기반 시설 구축을 이유로 섬에서 걷은 세금 전액을 중국 정부에 단 한 푼도 넘기지 않고 전액 모두 자기들 관할 하에 도로나 공원 조성과 같은 기반시설 확충에 사용했다. 이 말은 결국 구랑위가 중국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섬 전역이 공공조계지로 설정된 탓에 중국 당국의 입김이 미치지 못한 채 반환 이전까지 줄곧 외국인들에 의한 자치 도시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공공 조계 건설이 한창이던 때의 구랑위. 섬 내에서 가장 높은 곳인 일광암 정상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러다 보니, 도시 전체에는 현재도 노란 파스텔 풍의 서양식 건물들이 도심 곳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을 상징하는 건물이 구랑위 선착장에 내리면 건너편에 바로 보이는 옛날 영국 공사관 건물이다. 1841년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로 아직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또한 선착장에서 가까운 녹초로에는 1898년에 지어진 일본 영사관 건물이 있는데, 이것 역시 서양식 건축양식의 붉은 벽돌조 건물이다. 지금은 공동주택으로 쓰이고 있지만, 건물 앞에 옛날 일본영사관 자리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서 있어 일본 영사관 건물임을 입증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구랑위의 개발이 전적으로 외국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냐? 이렇게 물으면,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리도리 할 수밖에 없다. 동남아시아에서 돌아온 부유한 화교들도 샤먼에서 사업을 펼쳤고 이들 또한 외국인들과 손잡고 함께 구랑위 개발에 적극 뛰어들었다. 1920~30년 대에 샤먼 개발 붐이 일었을 때, 샤먼의 땅값은 상하이 조계 다음으로 중국에서 높을 정도로 개발 열풍이 불었다. 이 당시 샤먼을 기반으로 구량위 부동산 투자에 적극 나섰던 인물이 있었으니, 화교 출신 황혁주(黃奕住)였다. 동남아에서 설탕 제조업을 기반으로 부를 축적한 그는 샤먼에 부동산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샤먼과 구량위에 여러 건물을 짓고 사들여 소유한 건물만160여 채에 달했다. 현재 구량위의 상업거리인 일흥가(日興街)도 그가 주도하여 개발한 길이라고 한다.
화교들이 지은 건물은 외국인들이 지은 전형적인 서구식 건물들과는 다소간 차이가 있었다. 외국인들이 설계한 서구식 건물을 기본 모티브로 삼으면서도 중국 장식들을 건물 곳곳에 결합시켜 자신들의 정체성을 나름대로 드러냈다. 원래 석공이었다가 독학으로 건축 사업에 뛰어든 중국인 건축가 허춘초(許春草) 같은 인물이 이러한 동서양 절충식 건물을 지은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부유한 지방 유지들과 고향으로 돌아온 화교들을 위한 건축물을 다수 지었는데, 그가 설계하고 지은 대부분의 건물은 서양식과 중국식을 적당히 절충하고 있는 모습을 띠고 있다. 구랑위의 필가산(筆架山) 정상 부위에 허춘초가 지어 직접 거주한 집이 있는데, 이름이 ‘춘초당(春草堂)’이다. 이 건물이 구랑위에 있는 대표적 동서양 절충식 건물이다. 외관을 보면 서양풍이지만 내외부 장식들에서는 중국 양식이 많이 절충되어 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서양식 외관에 중국풍 장식들이 결합된 건축물로 구랑위에서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대표작은 복건로 32번지에 위치한 ‘황영원당(黃榮遠堂)’이다. 베트남 화교인 황중훈이 자신의 부동산회사 이름에서 따와 집 이름을 붙였는데, 이 건물은 원래 필리핀 화교 시광종(施光從)의 것이었다. 그런데 황중훈이 함께 탄 배에서 시광종과 카드 게임을 해서 이긴 대가로 집을 넘겨받았다고 한다. 1920년에 지어진 건물로 지금은 샤먼연기학교로 쓰이고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유럽을 풍미했던 신고전주의 양식에 중국풍 장식들이 절충된 건축물이다.
한편 공공조계 시절에 구랑위에는 13개국이 영사관을 설치했다. 당시 ‘동양의 파리’라 명성 자자했던 상해에 5개국 영사관이 있었으니, 구랑위가 가지는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구랑위 개발 초창기인 1888년에 이곳에 살았던 고든 커밍(Gordon Cumming)이라는 서양 사람이 남긴 글 중 일부이다.
“아열대기후에 잘 가꾼 정원들의 꽃과 잎, 대나무 군락이 그늘을 드리운 큰 주황색 바위들 사이로 크고 화려한 외국인 주택들이 가장 멋진 방식으로 흩어져 놓여 있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땅이 누렇게 떠 보인다. 하지만 서늘한 겨울철에 이 섬은 상대적으로 녹색을 띠고, 부지런한 농부들이 계단 논을 만들어 놓은 여기저기에 짙푸른 언덕이 보인다. 마차는 없지만 그 대신 힘 좋고 끈덕진 중국인들이 인력거를 끌고 다닌다. 항상 배가 준비되어 있어서 북적거리는 도시, 좁고 푸른 해협 너머에 그림같이 솟은 도시로 건너가야 할 사업가들이 이 배를 이용한다. · · · · ·”
사람이 끌어 짐을 실어 나르는 인력거는 지금도 구랑위의 이색적인 풍경 중 하나이다. 샤먼시 정부는 구랑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현재 환경개선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구량위 내에서는 차량을 볼 수 없다. 섬 내에 있는 호텔이나 상가에서 쓰는 물건들 모두 샤먼에서 배로 실어와 부두에 내리면, 인부들이 인력거에 실어 일일이 배달한다. 인부들이야 무지 힘들겠지만, 관광객 입장에서는 구불구불한 상가 사이를 구슬땀을 흘리며 누비고 다니는 인부 모습에서 또 다른 추억꺼리를 담아낸다. 현재 구랑위에는 약 2만여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출처 : 전남역사교사모임 해외답사자료집 - 장콩 전임 함평고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