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5~26일 가평 백련사 템플스테이에 참석하여 스님이 말씀하신 어귀가
귀에 다아 열심히 PC를 쳐서 올린 글입니다
내용이 지루하드라도 꼭 읽어보세요...."
남 영 현
수행은 눈멀고 귀먹은 듯이
무더위도 절기 앞에서는 한 걸음 물러서는 것 같습니다. 처서가 되니 조석으로 서늘한 기운이 온 몸을 엄습합니다. 우란분제 기도도 회향이 되어갑니다. 벌써 일 년 가운데 삼분의 이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남은 날은 많습니다. 한해를 시작하는 새해벽두에는 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계획한 일도 많았는데 뒤돌아보는 이 시간. 무엇을 하였는지 도무지 모를 일입니다. 봄에는 나른해서, 여름에는 더위와 장마로, 가을에는 좀이 쑤셔서, 겨울에는 추워서, 나름 항상 핑계는 있기 마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결코 같은 말뚝에 넘어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의 수행도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데도 항상 그대로 이니 안타까운 일이 아릴 수 없습니다.
선가(禪家)에서 수행하는데 크게 경계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혼침(昏沈)과 도거(棹擧)입니다. 혼침은 마음이 혼미하여 나른하고 수면에 빠지는 것을 말하고 도거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들떠있는 것을 말합니다.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불안하고 망상을 들끊는다거나 몸이 나른하여 졸음에 빠져 있다면 공부와는 십만팔천리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수행하는데 가장 무서운 것이 혼침과 도거의 두 가지 병이라 하여 늘 경계하였던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도 경계해야 할 두 가지의 병통이 있는데 바로 절제가 없는 욕망과 나른한 일상입니다. 인간의 절제되지 않은 욕망은 그 끝이 없어서 방향이나 목적도 없이 마구 날뛰며 앞으로 만 나아갈 뿐입니다. 절제되지 않은 거친 욕망은 자신을 파멸의 길로 이끌 뿐 만 아니라 가족이나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화를 미칩니다. 나른한 일상 또한 그 피해는 크지 않으나 마치 고인 물과도 같이 사람을 정제시키고 맙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저 멍청한 상태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상태가 지속되다가 어떤 일이 발생하면 두려움과 귀찮은 마음이 생깁니다. 물은 강에 도달해야 비로소 생명력이 있습니다. 강에 이르지 못하고 중간에 고인 물은 임 죽은 물입니다. 만일 산이 산으로만 존재하고 물이 물로만 존재한다면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끊임없는 생명활동, 즉 산은 푸르러야 하고 물은 흘러야 합니다. 만일 삶의 의미나 목적이 없다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수행자들이 들뜸과 혼미함을 경계하여 차분하고 또렷한 정신으로 정진을 하듯이 거친 욕망의 포로가 되지 않고 나른한 일상의 삶에 안주하지 않도록 활기있게 살아가는 것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입니다. 수행은 결코 거창하거난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을 살피고 세상을 살피면서, 자신을 놓지 않고 세상을 놓지 않는 것이 수행입니다. 제가 가끔 드리는 말씀가운데에 동념즉견(動念卽見)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마음이 움직이면 그 즉시 보라. 마음의 움직임을 놓친 사람은 이미 노예가 된 사람입니다. 내가 어디 있는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 마음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정신없이 산다면 어떻게 그 사람을 정신 차리고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수행은 작은 조각들이 모이고 쌓이는 것이지 결코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늘 수행은 작은 것에서 된다고 말합니다. 만일 수행이 큰 것이라면 아무도 수행을 하지 모수 할 것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다운 법입니다. 사람의 장점을 크고 화려한 것에서 찾는다면 결코 그 사람에게서는 장점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향기도 큰 것에서는 향기에 눈멀고 코가 멀어서 느낄 수 없습니다. 작은 선행이 그 향기는 더 멀리 퍼져 갑니다. 절집에 다니는 보살님도 남의 눈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행동이 그분을 돋보이게 합니다. 서양란은 꽃도 크고 화려합니다. 조화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꽃의 수명도 깁니다(호접란 등) 이에 비하여 동양란은 품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촉당 값을 비교하여도 서양란보다 더 비쌉니다. 이와 함께 그 기품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바로 꽃의 향기입니다. 단 한 송이만 피어도 향기가 방안에 가득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양란에는 불행하게도 향기가 없습니다.
대다수의 식물들은 꽃의 향기가 꽃의 화려함에 반비례한다고 합니다. 꽃이 화려하면 향기가 없고, 꽃이 눈에 잘 띄지 않으면 향기가 진하다고 합니다. 야생에서는 도라지꽃과 더덕꽃이 종종 비교가 되곤 합니다. 아름다운 조각품을 연상하게 하는 완벽한 자태로 곤충들의 시각을 사로잡습니다. 다른 풀들과 비교하여 단연 군계일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깊은 북사면의 언덕에 수줍게 숨어있는 더덕은 그 자라는 위치부터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꽃이라고 해야 작은 손톱만 하고 볼품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조금만 스쳐도 그 향기는 코를 찌릅니다. 10리 밖의 벌과 나비까지 불러들인다는 것이 바로 이 더덕꽃입니다. 더덕은 꽃만이 아니라 그 작은 잎사귀와 줄기에서도 향기가 풍깁니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들은 서로 부족함이 없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하나가 크면 하나가 작은 법인데 우리들은 매사를 너무 완벽하게 하려고 하는 데에서 괴로움이 생깁니다.
사람은 어떨까요? 꽃과 향기를 두루 갖춘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명예나 권력이나 돈 등의 꽃이 화려할수록 인간의 덕성에서 풍기는 향기는 빈약하기 그지없습니다. 모두들 크고 화려한 꽃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정작 화려한 꽃이 되면 그 품격을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덕성의 향기는 함께 나누고 아파하고 끝없이 낮추는 데에서 나옵니다. 고개를 들면 화려해 보일지 모르나 은근한 향기는 없는 법입니다. 덕성이란 낮고 그늘지고 약한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니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와는 짝하기 힘든 것이지요.
절에도 몇 십년을 다녔네. 몇 년을 수행을 하였네, 하면서 소리만 요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부처님을 모시는 사람은 가고 오는 것에 자취가 없고 그 머문 자리 또한 향기롭습니다. 외견상으로는 그윽한 향기를 택하였다고 하면서도 그 사람에게서 더덕의 은근한 향기를 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 자리나 자기 신발을 양보하는 경우가 찾기 어렵습니다.
눈멀고 귀 먹은 놈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주 신건 선사는 사미를 두지 았습니다. 어떤 스님이 묻기를 “스님께서는 나이도 많으신데 어찌하여 어린동자를 두어서 시붕을 받지 않으십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눈멀고 귀 먹은 놈이 있거든 나를 위하여 데려다 주십시오.”
신건선사는 시봉하는 사미를 두지 않고 모든 일을 손수 하셨는데 옆에서 이것을 지켜 본 스님이 딱한 생각이 들어서 신건스님에게 나이도 많이 드셔서 힘이 드실 텐데 사미를 두어서 시봉을 받으시라고 권유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신건선사는 내가 시봉을 받기 싫어서가 아니라 눈멀고 귀먹은 놈이 없어서 이러고 있는 것인데, 그런 사미가 있거든 나를 위하여 데리고 오면 나도 늘그막에 시봉을 받으면서 살겠다는 말씀이신데 아무리 주위를 둘려보아도 그런 사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노스님께서 어찌 실제로 눈이 멀고 귀가 먹은 사미를 찾았겠습니까? 다만 눈멀고 귀 먹은듯한 사미가 없다는 말이겠지요. 귀가 먹지 않았지만 귀 먹은듯한 사미가 없고 눈이 멀지 않았지만 눈이 먼 듯한 사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이가 들면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고 모든 일에 끼어들려고 하며 작은 일에도 서운해진다고 합니다. 그것으로 자가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려고 합니다.(제발 편하게 사시라고 해도 알았다고 해 놓고 금방 또 간섭하고 참견하고 묻습니다,)
요즈음 세상은 안 본 것도 보았다 말하고, 안 들은 것도 들었다고 거짓을 말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보고서도 짐짓 안 본 것 같이 하고, 듣고서도 짐짓 안들은 것 같이 하여 상대를 배려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수행자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보고 다 들으려고 한다면 언제 수행을 할 수 있겠습니까? 버리고 놓은 것도 중요하지만 참으로 어려운 것은 보고나 듣고서도 보고 들은 것에 얽매이지 않은 것입니다.
불교의 조각y상 가운데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있는 상을 보았을 것입니다. 안 볼 것이 너무 많고 안 들을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올곧은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덜 보고 덜 들어야 할 것입니다. 신건선사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벽암록 제 46칙에 미기축물(迷己逐物)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스스로 혼미하여 사물을 쫒는다는 말인데 거꾸로 읽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은 말입니다. 돈이나 물질, 명예나 지위 등을 쫒으면서 자기를 잊어버리고 사는 것을 경계한 말입니다. 자기 자신에 혼미하여 자기를 잊고 있었기 때문에 사물을 쫒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들은 몇 가지의 요소가 모여서 조직된 물질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현상이므로 실체도 없고 영원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에 현옥이 되어서 쫒다보니 자신을 망각하고 마는 것이지요. 영리한 개는 사람을 뭅니다. 그러나 멍청한 개는 흙덩이를 쫒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본질을 망각하고 현상에만 너무 집착하여 자신을 잊고 살아갑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은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소중한 것일수록 잃어바리지 않고 잘 지켜야 합니다. 귀머거리와 눈먼 봉사가 어느 때 보다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부처님의 지혜로 이 어려운 시기를 슬기롭게 혜쳐가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첫댓글 와! 남 居士 한번 듣고 정리를 이렇게 잘 할 수 있어요? 대단 하십니다.존경 합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 좋은 내용인데 근대 속 좁은 인간들은 좋은 말,글 들은 잘 아는데, 실제 하는 꼬라지 보면 같잖은 인간 많아요 우리 주변에도 아는것 보다 실천 실천 또실천 만 만세 !!!!!!!!
남영현친구"나이가들면 모든것을 알고싶어하고 모든일에끼어들려고 하며 작은일에도 서운해 한다고 합니다."이제 나이들어조심하라는글귀로 깊이마음속에 간직합니다.!감사해요!남영현동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