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여행
여행일 : ‘18.4.1(일)-4.3(화) 소재지 : 전남 진도군, 해남군, 강진군 일원 산행코스 : 진도타워→대흥사→두륜산 고계봉→강진 가우도→강진 회진포구→강진 금곡사 벚꽃 길
함께한 산악회 : 가족여행
특징 : 꽃피는 춘사월 첫째 주 일요일은 우리 집안의 시사(時祀)가 있는 날이다. 시사란 4대 봉사(奉祀)가 끝나 기제(忌祭)를 잡수시지 못하는 조상을 위하여 사당이나 집안이 아닌 묘(墓)에서 5대조 이상의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이다. 여기에다 난 행사를 하나 더 추가했다. 4대조까지의 제사까지 가족 납골당에서 지내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고모님과 시집간 여동생들까지도 참석하게 되는 큰 가족행사가 되어버렸다. 그냥 모임을 파해 버릴 수 없었던 이유이다. 그래서 매년 시사가 끝난 후에는 2박3일간의 가족여행을 떠났었고, 올해는 그 대상지를 남도의 끝자락으로 잡았다. 진도의 국립자연휴양림에다 숙소를 정하고 진도와 해남, 그리고 강진에 있는 유명 관광지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 지방의 대표적인 먹거리도 빠짐없이 맛보았음은 물론이다. 힐링여행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아름다운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니 말이다.
▼ 2박3일 여정의 본부는 팽목항의 뒷산에 위치한 '국립진도자연휴양림‘이다. 산림청이 작년(2017)에 문을 열었는데 산림문화휴양관(1동 14실)과 숲속의 집(8동 8실)을 비롯해 남도소리 체험관 1동, 방문자 안내센터, 잔디광장, 산책로, 다목적 운동장 등을 갖췄다. 특히 거북선 모양으로 지어진 산림문화휴양관과 판옥선을 벤치마킹한 숲속의 집이 눈길을 끈다. 아무튼 산책삼아 밖으로 나오니 볼에 스치는 바람이 차갑다. 봄의 한가운데라는 춘분(春分)이 지난지도 벌써 2주가 다 되어 가는데도 말이다. 꽃피는 춘사월인데도 느낌은 봄 같지가 않다는 얘기이다. 왕소군(王昭君)의 마음이 설마 이러기야 했겠는가마는 문득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각난다. 왕소군(王昭君, 본명은 왕장王嬙, ’소군‘이란 칭호는 사흘 밤낮을 그녀와 함께 즐긴 황제가 내려준 시호이다)의 슬픈 사연을 노래한 당(唐)나라 시인 동방규의 시(詩) ’소군원(昭君怨)‘에서 유래된 말이다. 즉 한(漢)나라 원제(元帝) 때 궁녀였던 왕소군이 남흉노의 호한야(呼韓邪) ’선우(單于)‘의 왕후가 되어 흉노 땅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처량한 심정을 읊었다는 싯귀(詩句)이다. ’오랑캐 땅엔 꽃과 풀도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는 것이다. 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녀나 나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녀가 꽃과 풀이 없어 봄을 느끼지 못하는 대신, 난 날씨가 추워 봄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 숙소인 ’국립진도휴양림‘으로 들어가는 길에 ’진도 타워‘부터 들러보기로 한다. 이순신 장군이 대승을 거둔 명량해협이 한눈에 조망되는 망금산의 정상에 지어졌는데, 진도대교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빠져나가면 된다. 2013년 같은 자리에 있던 녹진전망대를 허물고 타워(tower)를 새로 세우면서 진도의 랜드마크(landmark)로 탈바꿈했다. 높이 60m에 지하 1층, 지상 7층의 규모로 1층에는 안내데스크와 티켓부스가 있고, 진도의 특산물을 구입할 수 있는 특산물 판매장이 마련되어 있다. 3층부터 5층까지는 카페테리아와 레스토랑, 다목적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 주차장의 한쪽 귀퉁이에 만들어 놓은 계단을 오르자 널따란 광장이 나타난다. ’승전광장‘이란다. 광장에는 여섯 개의 이순신장군 어록비(語錄碑)와 당시 해전의 장면을 연출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이순신 장군을 도와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우리 조상과 진도군민들의 호국정신을 계승하자는 의미에서 조성된 광장에 걸맞는 조형물이지 싶다. ▼ 7층에 있는 전망대에서는 진도대교와 울돌목 해협, 우수영 관광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울돌목 방향에는 ’명랑대첩 해전도‘를 세워놓아 눈앞에 펼쳐지는 울돌목해협과 비교해가며 보는 재미를 더하게 했다. 반대방향으로는 진도의 들녘이 펼쳐진다. 널고 반반한 것이 섬 같아 보이지 않는다. 풍요로워 보인다는 얘기이다. 참! 한쪽 귀퉁이에 만들어놓은 ’명랑대첩 승전관‘에 들어가 보라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명랑대첩 해전도‘로 부족했던 부분을 메꿔주고도 남을 것이다. ▼ 진도의 관문의 ’진도대교‘이다. 옛날 이곳 진도는 해남에서 철부선(鐵艀船)을 타야만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84년 저 다리가 놓임으로써 한반도의 최남단 지역이 된 이후, 외국인을 포함하여 연간 약 260만여 명이 찾는 국제적 관광명소가 되었다. ▼ 2층은 전시관 구역이다. ’진도군 역사관‘과 ’옛 사진관‘으로 나누어져 있으니 꼭 들어가 보자. 이왕에 진도에 왔으니 하나라도 더 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진도의 역사와 주민들의 삶, 그리고 진도의 명소들을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진도는 이순신장군의 명량해전 승전지만 있는 게 아니다. 고려시대 이 땅을 침략해온 몽고에 끝까지 항거한 삼별초의 근거지였던 용장성(龍藏城)이 있는가 하면, 한국의 동양화를 이끌어왔던 소치 ’허련‘선생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운림산방과 수평선 넘어 황금빛을 띄우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세방 낙조(細方 落照)‘, 그리고 바다를 바라다보며 등산할 수 있는 동석산과 남망산, 첨찰산, 여귀산 등 볼거리가 참 많은 섬이다. 특히 우리민족의 혼과 한을 담은 진도아리랑 등 진도에는 문화(동양화 및 소리)가 섬 전체에 배어있는 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 진도를 일러 ’보배의 섬‘이라 한다. ▼ 밖으로 빠져나오니 들어갈 때 무심코 지나쳤던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순신장군과 함께 싸웠던 장수들의 초상화와 함께 그의 약력을 적어 넣었다. 참! 이왕에 진도에 왔으니 최근에야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어란(於蘭)‘이라는 충기(忠妓)에 대해 알아보자. 정유재란 당시 1597년 9월 16일 ’13대 133‘이라는 절대 불리의 여건에서 이루어진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승인의 한편에는 ’어란‘이라는 충기(忠妓)의 숨은 공로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왜군은 어란진에 주둔한 채로 출정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때 포로로 잡혀가 왜장 ’칸마사가게(管正陰)의 연인으로 있던 어란이 왜군의 출정 기밀을 이충무공에게 알림으로써 ‘명랑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전투가 끝난 후 자신의 첩보로 인해 ’칸마사가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명량이 바라보이는 여낭터 벼랑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나라에는 충절을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풀었던 여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군가 평양의 계월향, 진주의 논개와 함께 정유재란의 ’3대 의녀‘로 꼽고 있던데, 그 말에 공감이 간다. ▼ 둘째 날은 대흥사부터 찾았다. 해남군 삼산면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사찰로 대둔사(大芚寺)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20개 시군에 말사 50여 곳을 거느린 종찰(宗刹)에다가 ’사적 제508호‘로까지 지정되어 있는 명소를 어찌 찾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흥사에 이르는 길의 이름은 장춘(長春) 숲길. ’봄이 오래 머무는 숲‘이라는 뜻이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는 길에 스님의 끝에다 ’놈‘자까지 붙여가며 흉을 보는데 집사람이 눈치를 준다. 혹시라도 부처님을 믿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의 매주 등산을 다니면서 쌓여온 내 반감은 남의 눈치를 볼 정도로 약하지가 않았다. 절간에는 들어가 보지도 않은 채로 입장료를 꼬박꼬박 물어야 했으니 얼마나 억울했겠는가. 그렇게 내뱉던 불만의 결과는 참담했지만 말이다. 부처님 앞에서 합장을 하고 있는 고모님을 보고 난 어찌할 줄을 몰라 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는 때와 장소를 가려가며 말을 해야겠다. ▼ 숲길은 1923년에 지어졌다는 ‘유선여관’ 앞을 지난다. 간판은 ‘유선관(遊仙館)’으로 달고 있다. 안마당에 조그만 정원을 지닌 운치 있는 한옥(韓屋)으로 90년대 초의 정화사업 때 모든 여관과 식당이 대흥사매표소 아래쪽 집단시설지구로 이사했는데도 이 여관만은 본래의 위치에 그대로 남아있다. 아무튼 지금도 구들장을 장작불로 데우기 때문에 옛것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단골로 찾는단다. 또한 이 여관이 지닌 전통 한옥의 미는 영화 ‘서편제’에도 등장한 바 있다. 2009년에는 KBS-2TV의 인기프로그램인 ‘해피선데이-1박2일’에 나오는 등 각종 TV프로그램에도 자주 등장했음은 물론이다. 이곳은 소리꾼들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한다. 임방울(1905-1961)과 김연수(1907-1974) 등 해방을 전후하여 이름난 소리꾼 가운데 이곳을 다녀가지 않은 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 잠시 후 대흥사(大興寺)의 경내로 들어선다. 창건 설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사찰이다. 426년 신라의 승려 정관존자(淨觀尊者)가 창건한 만일암(挽日庵)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544년(진흥왕 5)에 아도(阿道)가 창건했다는 설과 508년(무열왕 8)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비구승이 중창하였다고도 한다. ’혜장선사(惠藏禪師)‘가 엮은 ’대둔사지(大芚寺誌)‘에 나와 있는 얘기들이다. 하지만 이는 절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더 끌어올려 보려는 욕심에서 나온 얘기들이 아닐까 싶다. 당시 이곳은 백제 땅이었을 텐데, 신라의 승려들이 구태여 이곳까지 찾아와서 절을 세웠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긴 대둔사지의 자료를 모았던 혜장(惠藏)까지도 이들 기록이 창건자의 활동시기와 맞지 않는다며 신빙성이 없다고 보았는데,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그래선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절의 역사가 전해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이곳에 승군(僧軍)의 총본영을 두면서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서산이 자신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전한 후 크게 중창되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의심(義諶)·삼우(三遇)·도안(道安)·문신(文信)·추붕(秋鵬) 등 13인의 대종사(大宗師)와 원오(圓悟)·광열(廣悅)·영우(永愚) 등 13인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시킨 명찰이 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보전·침계루(枕溪樓)·명부전(冥府殿)·나한전(羅漢殿)·백설당(白雪堂)·천불전·용화당(龍華堂)·도서각(圖書閣)·표충사·서원·서산대사기념관·대광명전(大光明殿)·만일암 등이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응진전(應眞殿) 앞의 ’3층 석탑‘, 북미륵암(北彌勒庵) ’3층 석탑‘이 있고 국보로 지정된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이 있다. ▼ 대흥사에 대해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대흥사는 유학자들과 스님들의 교유의 장이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조 500년의 사상사는 유학과 불교의 대립 속에서 유학이 지배했다고 할 수 있다. 유학이 귀족계층인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었다면 불교는 서민계층의 전유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반사대부가와 불교의 교유가 쉽지 않았음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하지만 이곳 대흥사는 조선후기 유학자들과 승려들의 활발한 교유의 장이 되었던 곳이다. 18세기를 전후 한 대흥사는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선사가 기거하고 있었고 초의를 중심으로 그와 절친한 사이였던 추사 김정희, 그리고 강진에 유배와 있던 다산 정약용 등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대흥사를 중심으로 활발한 교유를 가졌다. 이뿐만 아니라 추사의 가장 아끼는 제자였던 남종문인화의 대가 소치 허련 또한 대흥사에서 그 인연의 끈을 맺어 예술가로서의 길을 가게 된다. '다선일미(茶禪一味)'를 추구하며 차를 중흥시킨 초의선사가 그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에 차를 매개로 하여 이러한 교유를 가능하게 하였지만 이를 통해 유학과 불교가 사상적으로도 교유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마디로 대흥사는 18세기 이후 학문과 예술의 중심 도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대웅전으로 가기 전, 종루의 옆에 거대한 나무 두 그루가 보인다. 그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연리근(蓮理根)‘이라고 적어놓았다. ’천년의 인연, 만남, 약속‘이라는 부제까지 달았다. 가까이 있는 두 나무가 서로 만나 합쳐지는 것을 연리(蓮理)라 하는데, 뿌리끼리 만났으니 ’뿌리 근(根)‘자를 붙여 ’연리근‘이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연리목(蓮理木)이나 연리지(連理枝)는 많이 보아왔으니 연리근은 처음이어서 신기하기까지 하다. ▼ 대흥사를 둘러보고 난 뒤에는 근처에 있는 ’두륜산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이동한다. ’명승(제66호)‘으로 지정되었다는 두륜산을 올라보기 위해서이다. 마침 두륜산의 여러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고계봉의 꼭대기까지 케이블카가 놓여있다니 힘들이지 않고도 두륜산 일대를 둘러볼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탑승장 아래에 조성된 널따란 주차장에 이르니 사방에 벚꽃잔치가 벌어져 있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벚꽃나무들이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는 것이다. ’명승‘에 걸맞는 풍경을 보여주려는 모양이다. ▼ 케이블카의 선로는 1.6km로 국내에서 두 번째로 긴 거리이다. 하지만 속도가 제법 빨라서 10분이 채 안되어 해발 638m에 있는 상부역사(上部驛舍)까지 편하게 오를 수 있다. 역사 안에는 매점이 있어 컵라면 등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술은 팔지 않는단다. 음주로 인한 안전사고를 막아보려는 예방조치가 아닐까 싶다. ▼ 상부 역사에서 고계봉(高髻峰) 정상까지는 길고 긴 나무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286개의 계단을 10분 이상 올라야 하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일이다. 그렇다고 미리부터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속도를 조금만 떨어뜨리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길가에 세워놓은 명언들을 읽어가며 오르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그래도 힘들다면 중간에 만들어놓은 쉼터에서 잠시 쉬었다가 오르면 될 일이고 말이다. ▼ 계단의 끝에는 ’관광홍보관‘이 만들어져 있다. 전라남도와 해남군에서 공동으로 만든 모양인데 관광포스터 몇 장을 붙여 놓았을 뿐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일기가 좋지 않을 때 비나 눈 등을 피하는 장소로나 이용하면 딱 좋겠다. 그래선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앉을 수 있도록 아예 의자를 붙인 채로 벽면(壁面)을 만들어 놓았다. 홍보관의 옥상은 전망대로 꾸몄다. 한가운데에는 ’하늘, 바람, 사람‘이라는 주제의 조형물도 세워놓았다. 조형물을 가운데 두고 여덟 곳으로 나눈 다음 그쪽 방향에 있는 나라들의 이름을 적어 놓기도 했다. ▼ 전망대에 오르면 이웃한 강진과 완도, 진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내려다보인다. 이제 막 푸름으로 물들어가는 너른 들판이 황홀한 풍경을 만들어 놓는다. 누군가는 멀리 제주도의 한라산까지도 시야에 잡힌다고 우기지만 설마 그럴 리야 있겠는가. 아무튼 케이블카 덕분에 발품을 크게 팔지 않고서도 남도 땅의 아름다운 산세를 한눈에 아우르는가 하면, 푸른 다도해 위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섬의 오밀조밀한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 두륜산(頭輪山)의 여러 봉우리들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오심재 너머로 우뚝 솟은 바위봉우리는 능허대(凌虛臺)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노승봉(老僧峰, 685m)이다. 그 외에도 가련봉(迦蓮峰, 703m)과 두륜봉(頭輪峰, 630m) 등 눈에 들어오는 봉우리마다 그 자태가 자못 빼어나다. 고계봉의 왼편에 보이는 바위봉우리는 호준암(虎蹲巖)일 것이다. 오심재에서 바라보면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형상과 흡사하다는 바위이다. ▼ 정상표지석은 전망대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다 세워놓았다. 고계봉은 두륜산의 네 번째 봉우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난 2008년 연말 KBS 2-TV 1박2일 프로그램에서 강호등과 이승기 등 출연진들이 케이블카를 타고 고계봉에 올라 두륜산의 설경을 소개한 뒤로 다른 봉우리들보다 오히려 더 유명해졌다고 한다. 그나저나 정상에서의 또 다른 볼거리는 진달래가 아닐까 싶다. 그 범위는 넓지 않지만 무리지어 피어난 진달래가 사진의 배경으로 삼을 만은 하다. ▼ 대흥사 근처의 유명 맛집에서 ‘닭 코스요리’로 점심을 먹은 뒤 강진만(康津灣)에 있는 ‘가우도(駕牛島 : 강진군 도암면 신기리)’로 이동한다. 강진만은 영어 대문자 ‘A’로 표현된다. 어떤 이는 빨래집게 모양이라고도 하는데, 사선으로 갈라진 두 지형을 연결하는 지점에 ‘가우도(駕牛島)’가 자리 잡고 있다. 강진읍 뒤편 보은산이 소의 머리라면 가우도는 멍에에 해당된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단다. 강진만의 8개 섬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섬이 육지와 연결되면서 강진만의 심벌인 ‘A’자가 완성된단다. 아무튼 면적 0.32㎢에 해안선의 길이가 2.5㎞인 이 섬이 이젠 육지나 다름없게 되었다. 섬의 양쪽에다 ‘망호 출렁다리(716m)’와 ‘저두 출렁다리(438m)’라는 두 개의 해상 인도교를 놓아 하시라도 드나들 수 있게 해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량은 들어갈 수가 없고, 오로지 사람들만 통행이 가능하다. ▼ 도암면에 있는 망호마을 주차장에다 차를 대놓고 ‘망호 출렁다리’를 건넌다. 다리의 이름을 듣고 출렁거리는 다리를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함께 걷는 여성들을 놀려주려고 말이다. 특히 길이가 716m나 된다니 오랫동안 그 즐거움을 만끽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는 오해이다. 다리의 대부분이 쇠기둥 교각(橋脚)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리가 출렁거리는 ‘현수교(懸垂橋)’는 중간에다 만들어놓았는데, 이마저도 짧은 탓에 다리가 후들거리는 스릴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고 재미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다리의 중간쯤에 바닥에다 ‘강화유리’를 깔아 바다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넘실거리는 파도를 내려다보며 스릴을 만끽해 보라는 모양이다. ▼ 중간지점에 만들어놓은 전망대에 서면 너른 강진만(康津灣)의 서정적인 풍경이 굳어있는 감성을 일깨워준다. 강진군의 중앙부까지 깊숙이 만입(灣入)되어 군의 전체적인 모습을 ‘사람 인(人)’ 자 형태로 만들어 놓은 바다이다. 영암에서 발원한 탐진강이 장흥을 거쳐 바다와 만나는 강진읍부터 남해와 접한 마량면까지, 직선거리 약 20km에 달하는 강진만이 길다란 ‘인(人)’ 자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만(灣)의 안에는 8개의 섬이 있는데 유인도는 이곳 ‘가우도’뿐이란다. ▼ 건너편으로는 가우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가우도는 강진만(康津灣) 안에 들어앉은 작은 섬으로 후박나무와 편백나무 군락지 및 곰솔 등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주변의 무인도들을 바라보는 재미 또한 쏠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섬 정상에 있는 청자타워(높이25m)에서는 해상을 나는 친환경 레저시설인 짚트랙을 즐길 수도 있다. ▼ 오른편 다리의 아래에는 푸른 물결 위에다 둥그렇게 좌대(座臺)를 만들어 놓았다. 가우도 마을회에서 운영하는 ‘복합낚시공원’이라는데 공원(公園)이란 글자가 들어가 있는 게 특이하다. 낚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강진만의 비경도 함께 즐길 수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단다. 아무튼 5월부터 11월까지 운영하는 유료 낚시터인데, 감성돔 등 다양한 어종이 잡힌다니 세월을 낚는다고 너스레만 떨 것이 아니라 한번쯤은 찾아봄직도 하다. ▼ 다리를 건너면 ‘종합안내판’과 ‘가우도 안내판’, 이정표(가우마을← 0.4Km, 청자타워 짚트랙 0.4Km, 북쪽산책로 1.7Km/ 남쪽산책로→ 0.8Km, 영광나루쉼터 0.4Km)와 함께 ‘가우도 함께해(海)길’ 안내도가 길손을 맞는다. 트레킹코스를 그려놓았으니 꼭 살펴보고 길을 나서는 게 좋다. 해안선을 따라 한 바퀴 도는 외곽코스와 전망대까지 갔다 오는 안쪽코스가 있다. 그다지 길지도 않은 외곽코스도 부담스럽다면 가우도마을 앞으로 내놓은 사잇길을 이용해 전체거리를 단축시킬 수도 있다. ▼ 오른편(남쪽)으로 향한다. 섬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2.5km 길이의 생태탐방로, 즉 ‘함께해(海)길’이라는 이름의 둘레길이다. 남쪽산책로는 코스의 대부분을 데크로 만들어놓았다. 그만큼 바다 가까이로 길을 내놓았다는 얘기이다. 이 코스는 산과 바다를 감상하며 걸을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그래선지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 해안가로 난 데크로드를 잠시 걷자 첫 번째 쉼터가 나온다. 명랑나루 쉼터‘라는데 이 또한 데크로 만들어 놓았다. 바다 쪽의 난간 앞에다 벤치를 놓고 그 위에 강진이 낳은 시인인 김영랑의 동상(銅像)을 앉혔다. 사진 찍기 딱 좋은 곳이라 할 수 있겠다. 해맑게 웃고 있는 영랑의 동상 주변으로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동백닙에 빗나는 마음'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 등 아름다운 서정시 세 편이 걸려 있다. 영랑은 강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살이를 했고, 6·25전쟁 때 당한 부상으로 47세에 세상을 등졌다. ▼ 반대편에는 ‘저두출렁다리’가 놓여있다. 이웃인 저두리(대구면)로 연결되는 길이 438m의 다리이다. 이 다리도 역시 튼튼한 철제 교량이다. 바람이 세고 물살이 거친 바다 위를 가로지르기 때문이란다. 삐죽 솟은 교각은 쇠뿔을 형상화했다. ‘가우도(駕牛島)’라는 섬의 이름과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 섬에는 여러 채의 펜션이 지어져 있는가 하면, 이정표에는 마을식당도 표기되어 있다. 저두출렁다리 근처의 경치 좋은 곳에는 휴게실도 만들어 놓았다. 그만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지난해(2017년)에만 89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 저두출렁다리를 지나면서 산책로는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맨발로 걸어도 괜찮을 정도로 바닥이 고운 흙길이 이어진다. 하지만 바닷가 풍경이 잠깐씩 눈에 들어올 뿐 볼거리는 별로 없다. 누군가 ‘특별히 예쁜 것도 그렇다고 꼭 봐야 할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닌 섬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그는 또 작은 섬 마을의 고즈넉함에 육지와 연결됐다는 달뜬 분위기가 조금 겹칠 뿐이라고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5분쯤 더 걷자 왼편으로 ‘청자타워’로 올라가는 갈림길이 나타난다. 짚라인을 탈 계획이 없으니 그냥 직진한다. ▼ 그렇게 얼마를 걷자 가우마을을 100m쯤 남겨둔 지점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해안산책로 0.4Km)는 해안가를 따라 난 산책로임을 알려준다. 갈림길을 무시하고 곧장 직진하니 잠시 후 가우마을이 나타난다. 섬의 서쪽 편에 옹기종기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다. 마을에 이르면 청자타워로 올라가는 길이 또 다시 나뉜다. 고려청자 모양으로 지은 25m 높이의 타워인데 대구면 저두해안까지 ‘집트랙’을 설치해 아찔함과 짜릿함을 즐기려는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곳이다. 2만5천원이면 973m의 와이어에 매달려 바다 위를 가로지를 수 있다니 한번쯤 시도해볼 만도 하겠다. 거기다 5천원은 ‘강진사랑 상품권’으로 되돌려 주어 강진에서 이용할 수 있게 했다니 ‘꿩 먹고 알 먹고’가 아니겠는가. ▼ 마을 앞에서는 오른편으로 향한다. 아까 그냥 지나쳐버렸던 해안산책로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이때부터 강진만 건너편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만덕산의 바위 능선이 우람하게 펼쳐진다.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품고 있는 만덕산은 해발 408m로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험준한 바위산이어서 등산은 만만치 않다. ▼ 마을 앞 해변에는 ‘다산 정약용 쉼터’가 만들어져 있다. 갯벌에는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이 장남 학연을 만나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품을 세워놓았다.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다산 정약용이 1802년에 이 섬을 찾았던 인연 때문이지 싶다. 당시 다산은 섬의 생태계와 어부들의 삶을 ‘목민심서’와 ‘경세유표’에 기록했다고 한다. 아무튼 학자 이전에 지아비이자 아버지였던 이유로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다산은 아들에게 ‘나는 벼슬을 하지 않아 너희에게 남겨줄 게 없다. 오직 두 글자의 놀라운 부적을 줄 테니 소홀하게 여기지 마라. 한 글자는 근(勤)이요 또 한 글자는 검(儉)’이라는 글을 적어 보냈다고 전해진다. 아들을 유배지에서 맞이하던 다산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그리고 한평생을 공직에 머무르며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이라는 초심을 잃지 않았던 나 자신에게 자부심을 가져본다. ▼ 강진만의 너른 갯벌이 눈앞에 펼쳐진다. 만으로 흘러드는 탐진강(耽津江)을 비롯하여 장계천(長溪川)·강진천·도암천 등 여러 하천들이 만들어놓은 갯벌이다. 이로 인해 주위의 해역보다 염도가 낮아 영양염도(營養鹽度)가 2.4도, 평균수온이 17.8℃로 해조류 및 어패류의 서식에 적합하단다. 강진만은 1978년에 청정수역으로 선포되었으며, 대합·꼬막·굴·갯장어·새우·낙지·숭어·농어 등의 산지이다. 특히 칠량면 봉황리에서는 양식 바지락이 많이 생산된다. ▼ 다리 건너 저두마을 쪽에도 화장실을 갖춘 널따란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가우도 출렁다리 저두장터‘라는 이름표를 단 상가도 보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물고기 조형물‘이다. 강진만 주변의 바다 쓰레기와 생활 쓰레기들을 주워 모아 만들었다는데, 쓰레기의 종류가 참으로 다양하기도 하다. 참! 아쉽게도 ‘가오리빵’은 맛볼 수가 없었다. 관광객들이 뜸한 월요일이라서 빵 굽는 아저씨도 쉬는가 보다. 참고로 강진 쌀과 단호박으로 만든 '노랑 가오리빵'은 앙증맞은 생김새와 그 안에 들어있는 팥 앙금의 부드러움으로 인해 인기 메뉴로 꼽힌다. KBS-2TV의 ‘생생정보'에까지 나왔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 저녁식사를 위해 찾은 곳은 강진만의 동남쪽에 위치한 마량항(馬良港), 수심이 깊은데다 전면에 위치한 고금도(古今島)와 조약도(助藥島)가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어 해상교통의 요지로 꼽힌다. 조선 초기 태종 때인 1417년에는 마두진이 설치되어 만호절제도위가 관장하였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을 당시에는 거북선 1척이 상시 대기하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유서 깊은 만호성터가 남아있고, 까막섬이 수묵화처럼 떠있는 등 아름다운 주변경관으로 인해 천혜의 미항으로도 꼽힌다. ▼ 해질녘 금빛 햇살을 머금은 바다는 잊지 못할 풍광을 선사한다. 하루 일을 끝내고 들어온 고깃배들은 한가롭기만 한데, 바닷가를 오가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볼거리를 찾아온 관광객들일 것이다. 이왕에 마량에 왔으니 포구 풍경에 대해 한걸음 더 나가보자. 마을을 둘러보다 보면 강진을 대표하는 청자 조형물은 물론이고, 제주와 관련된 조형물(말, 돌하르방)까지도 눈에 띈다. 바로 이곳이 조선 시대 때 제주에서 실려 온 제주 말들이 육지에 처음 발을 디딘 곳이어서란다. 탐라에서 뱃길을 따라 실려 온 말들이 육지에 처음 내려 먹이를 먹었던 곳 이라 ‘마량’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마량에서 내린 말들은 일정 기간 동안 육지 적응 훈련을 받고 한양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마량항 인근에는 말들이 쉬어가던 쉼터인 신마 마을이 아직까지도 자리하고 있단다. ▼ 포구에는 ‘까막섬’이라는 작은 섬이 있다. 숲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섬은 큰까막섬과 작은 까막섬으로 부르는 두 개의 작은 섬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썰물 때는 바닷길이 열려 걸어서도 섬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 섬은 천연기념물 제172호로 지정된 ‘상록수림’으로 유명하다. 섬 전체에 상록수들이 고루 분포하고 있는데, 특히 높이 10∼12m의 후박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그밖에도 사철나무와 돈나무, 육박나무, 참식나무, 사스레피나무 등 열대성 난대리 120여 종이 우거져 자란다고 한다. 상록수림의 보호를 위해 현재는 공개 제한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관리 및 학술 목적 등으로 출입하고자 할 때에는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 ▼ 마량항은 최근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됐다. 야외공연장과 목조 산책로 등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만한 시설들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방파제를 따라 청자 가로등과 형형색색의 조명을 설치했는가 하면, 각종 대형 행사가 가능한 200여m 길이의 중방파제와 폭 40m의 대형 야외공연장을 새로 만들었다. 고금도를 잇는 대교(大橋)가 완성되면서 철부선이 오가던 마량항의 기능이 상실되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추진된 ‘마량항 미항사업’의 결과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을 예상했는지 회센터는 물론이고 횟집도 많이 보인다. 오늘 저녁 메뉴는 ‘회정식’, 싱싱한 회를 기본으로 수십 가지의 반찬들이 올라오는 백반 차림상이다. 남녘의 해안 도시들에서나 만날 수 있는 별미라고 해서 들렀지만, 낮에 먹은 닭 코스요리가 소화가 덜 되었던지 ‘엄지 척’까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맛이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입맛이 덜 돌아온 와중에서도 중간 점수 이상을 줄 수는 있었으니까 말이다. ▼ 마지막 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강진에 있는 금곡사에 들렀다. 한국불교태고종에 속하는 사찰로 신라 선덕여왕 때 밀종(密宗)의 승려 밀본(密本)이 성문사(城門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신빙성은 없어 보인다. 해남의 대흥사에서 얘기했던 대로 신라의 승려가 백제의 영토까지 찾아와서 절을 세웠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승군의 훈련장으로 활용하다가 왜군의 침습으로 소실되는 등 한때는 폐사(廢寺)되기도 했으나, 일제강점기에 절터에 건물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보물 제829호인 삼층석탑이 있다. 그나저나 이곳은 절보다는 절 앞으로 난 도로가 더 유명하다. 군동면 호계리에서부터 작천면을 거쳐 풀치재까지 나있는 지방도 827호선의 길가에 벚꽃 길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이가 무려 삼십 리에 달하는데, 봄이면 흐드러지게 핀 벚꽃들이 주변을 온통 환상적인 분위기로 바꿔놓는다. 강진군에서는 이런 점을 살려 올해부터 벚꽃축제를 개최한단다. 그 날이 바로 3일 후이니 우리가 때를 맞춰 잘 찾아온 셈이다. 아무튼 아름답기 짝이 없는 풍경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좋아할 수만도 없는 게 솔직한 내 마음이다. 온 나라가 벚꽃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자칫 일본인들이 봄놀이를 하러 한국으로 여행 온다는 기사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 에필로그(epilogue),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강진을 ‘남도답사 1번지’로 꼽았다. 천혜의 자연 환경을 갖춘 이 땅이 역사와 문화의 보고(寶庫)였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시대 학자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 생활 동안 600여 권의 명작을 남겼고,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영랑 김윤식은 이 땅에서 탯줄을 끊었다. 고려청자의 고향도 강진이고, 칠량옹기의 유명세도 대단하다. 그래선지 나 역시 강진을 여러 번 찾았었다. 다산이 머물렀던 초당은 백련사와 묶어서 네 번이나 찾아봤고, 김영랑의 생가도 두 번을 찾았다. 그러나 고려청자의 흔적들은 아직까지도 찾아보지를 못했다. 하다못해 사당리 41호 ‘청자가마’와 여러 출토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청자박물관’이라도 둘러봐야 했지만, 그마저도 실행에 옮기지를 못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그냥 지나쳐버릴 수밖에 없었다. 가족모임이기에 내 취향만을 고집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청자박물관(대구면 소재)’ 앞을 지나왔으면서도 말이다. 아무튼 대구면과 칠량면 일대에는 고려 초기부터 도자기를 만들던 가마터가 188개나 발견된 청자의 보고다. 바다와 가까워 해상 운송에 편리하고, 무엇보다 도자기의 주원료인 고령토와 규석이 산출돼 청자를 빚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란다. |
출처: 가을하늘네 뜨락 원문보기 글쓴이: 가을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