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이야 천국에서 만나자
나는 구례를 떠나 무궁화편으로 전주에 도착했다. 오랫만에 남도 땅을 벗어난 것이다. 전통 한옥식 전주역사는 아름답고 웅장하다. 관광안내소에서 지도를 얻어 돌아볼 곳을 체크했다. 전주에서는 무엇보다 전동성당을 중심으로 풍남문, 치명자산, 숲정이 성지 그리고 경기전과 한옥마을을 빼놓을 수없다.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전동성당은 인근 풍남문과 함께 많은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며 피를 흘린 성지다. 한국교회 첫 순교자들인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현 야고버가 1791년 순교한 후 1801년 신유박해 때는 호남의 천주교 지도자 유항검과 아우 윤관검 등 5명이 뒤를 따랐다. 우리나라 최초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문화재인 전동성당은 프랑스 선교사 보두네 신부에 의해 1908년 기공된 후 23년 만인 1931년 완공되었다. 특히 성당 주춧돌은 백년 전 순교자들의 피가 서린 전주성곽 돌을 사용해 의미를 더해 준다.
순교자 윤지충은 고산 윤선도 6대손으로 권상연과 외종사촌간이다. 이들은 윤지충 모친이 그해 5월 진산에서 별세하자 고인의 유언과 교회 가르침에 따라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른바 廢祭焚主(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태움) 사건은 당시 유교이념으로 통치되던 조선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윤선도 후손으로 25세에 급제하여 당시 실력자 좌상 채제공의 신망을 받아 장래가 촉망되던 윤지충이였기에 조정의 놀라움은 말할 수없었다. 전라감사가 그에게 제사를 폐한 이유를 묻자 음식은 육신의 양식으로 영혼에게 바치는 것은 허례허식이며 신주는 목수가 만든 나무조각으로 거기에 영혼이 깃들 수없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끝까지 신앙을 굽히지 않다 12월 8일(양력) 풍남문에서 목이 잘렸다. 이들의 목은 풍남문에 효수되고 시체와 9일 간이나 방치되었는데 12월 혹한에도 응고되지 않은 순교자들의 선혈은 죽어가는 사람을 낫게하는 등 많은 일화를 남겼다.
전라감사는 임금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윤지충과 권상현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소리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서도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라고 했다. 이들의 순교는 그후 많은 신자들이 죽음의 두려움을 물리치고 신앙을 고백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이땅에 천주교를 알리는 장엄한 나팔소리였다. 또한 이들이 순교한 12월 8일은 한국교회 수호자인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없으신 잉태 대축일'이라 더욱 하느님의 섭리를 느끼게 한다. 이들이 순교한지 10년 만에 조선에는 1만 명 이상의 신자가 생겼다. 조정은 전국적인 오가작통법을 동원해 신자를 색출해 신유년인 1801년과 이듬해 3백여 신자들이 순교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는 그후 백년이나 계속된 박해와 1만 명이 넘는 순교자의 피를 토대로 지금 6백만 명이 넘는 신앙공동체로 성장했다. 8월 한국을 방문하는 교종 프란치스코는 초기 순교자 124위 시복식을 거행한다. 이분들 중 절반 이상인 67위가 1801년 기해박해 전후 순교자들이다.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나는 배낭을 성당 사무실에 맡기고 우산만 들고 홀가분하게 치명자산으로 향했다. 성지로 꾸며진 해발 3백미터 가파른 산길에는 십자가의 길이 세워져 나는 순교자들이 치명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실감있게 기도할 수있었다. 산으로 오르는 길 양편에 만발한 동백꽃의 빨간잎을 타고 떨어지는 빗방울은 순교자의 피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산은 원래 승암산 또는 중바위산이라 불렸는데 순교자들이 정상에 묻힌 후 치명사산 또는 루갈다산이라 불린다. 여기에는 한가족 일곱 순교자들이 한 무덤에 모셔져 있다. 호남에 처음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 영입에 앞장서다 대역부도죄로 능지처참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부인 신희, 큰아들 유중철 요한과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 그리고 둘째아들 유문철 요한, 제수 이육희, 조카 유중성 마태오 일곱 분이다. 이분들은 1801년 9월부터 4개월에 걸쳐 전동성당 자리와 전주옥, 숲정이에서 처형되었다. 친지와 노복들이 몰래 수습해 고향 초남땅 건너편 재남리에 매장한 시신들을 1914년 4월 보두네 신부와 신자들이 이곳에 이장한 것이다. 당시 이분들을 산꼭대기에 모신 것은 특별한 뜻이 있다. 프랑스 출신인 보두네 신부는 이곳이 자신 고향에 있는 유명한 몽마르뜨르 성지처럼 순교자들의 덕행과 순교정신을 높이 받들면서 산아래 보이는 전주시를 이분들이 수호해 주기를 기원한 것이다.
나는 언제나 이분들 중 첫째 아들 유중철과 아내 이순이를 생각하면 가슴 뭉클한 감동에 젖는다. 세계교회가 순교자들 가운데 '진주 중의 진주'라며 감탄하지 않는 이들 부부는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동정부부'이다. 그들은 열심한 가정에서 태어나 천주교를 익인 후 평생을 동정으로 하느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동정생활은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는 것으로 인간 본능인 성욕을 신앙으로 승화시켜 평생 정결을 지키는 생활을 말한다. 현재 가톨릭 성직자 수도자, 성공회와 정교회 수도자들이 그러하다. 또한 불교 비구승들도 온전한 수도를 위해 동정을 지킨다. 예수님도 마태오 복음에서 이를 말씀하셨으며, 바오로도 권장했다. 그러나 동정생활 자체가 인간으로서는 너무 가혹한 일이다. 특히 18세, 16세의 한창 피가 끓는 젊은 부부가 이를 지킨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부유한 양반가정에서 태어난 유중철은 부친 유항검을 따라 어려서부터 하느님을 믿었다. 그는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결심하고 당시 중국인으로 몰래 입국해 활동하던 주문모 신부와 상의했다. 2년 후 주 신부는 서울에 살던 이순이로부터도 같은 결심을 듣게 된다. 서울 양반집 딸인 그녀도 가족과 함께 일찍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양반집 자녀로 독신으로 산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불가능했다. 주문모 신부는 두사람 부모와 의논하여 둘을 결혼시켜 한집에 살되 오누이처럼 지낼 것을 부모와 신부 앞에서 약속하게 했다. 이들은 모두 순교할 때까지 4년 간을 동정부부로 지냈다. 이순이의 서한에는 본능을 참기어려워 동정을 깨뜨릴 뻔한 위기가 여러차례 있었으나 그때마다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했다고 쓰여있다.
또한 옥중에서 이순이가 언니에게 쓴 편지에는 "우리 다섯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천주를 위해 순교하자고 언약하고 철석같이 굳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 결과 우리 뜻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자연히 온갖 근심 걱정이 잊혀졌습니다. 날이 갈수록 천주의 은혜와 은총은 쌓이고 우리 마음에는 神樂(하느님이 주시는 기쁨)이 더해지며 아무 걱정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처음 아녀자들은 함경도 유배형으로 결정되었으나 그녀가 친척들을 대표해 법에 따라 처형해 줄 것을 호소했다. 판결이 뒤집혀 사형이 결정되자 그녀는 뛸 듯이 기뻐했다. 남편 유중철이 1801년 11월 14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옥에 있는 아내에게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고 썼다. 아내 이순이도 두달 후 1802년 1월 31일 숲정이에서 처형되어 천국에서 남편과 만난다. 관에서는 능지처참으로 사지를 여섯토막내어 처형된 아버지 유항검과 그들의 넓은 저택을 파헤쳐 그 자리를 물웅덩이로 만들고 재산들은 몰수했다. 지금까지 이들 부부의 서한이 다수 남아 있으며 믿기 어려운 이들 동정부부의 삶은 한국 천주교의 아름다운 전설로 남았다. 또한 이들부부의 삶은 '누이여 천국에서 만나자' 등 소설로도 쓰여졌다. 지금도 이들의 묘에는 순례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날도 비오는 가운데 몇몇 순래자들이 젖은 땅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묘 윗쪽에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형상의 자연석 바위와 그 앞에 세워진 돌십자가가 신비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무덤 아래는 기념성당이 세워져 매일 순례자들이 미사를 드리고 있으며, 오른편 밑에는 전주교구 성직자 묘지가 있다. 사제와 신자들이 순교정신을 늘 마음에 새기도록 이곳에 묘지를 조성한 전주교구는 한국의 장례문화를 선도하는 의미로 한 묘지에 여덟 명의 화장한 유해를 안장하고 있다. 성직자 묘지에는 낮익은 이름의 사제들이 여럿 있어 나는 또 한번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나는 치명자산을 내려오면서 두세기 전 순교자들을 생각한다. 과연 신앙이 무엇이길래 기쁘게 자신의 목을 칼날 앞에 내밀 수있었을까. 나는 과연 진짜 신앙인일까 무늬만 신앙인일까. 이들처럼 순교할 수있을까. 많은 상념들이 머리 속을 스쳐간다. 산을 내려오자 비는 그치고 오색 무지개가 전주 시내 상공에 드리우고 있다. 옷은 비에 젖었지만 마음은 개운했다. 치명자산은 천주교 신자 뿐 아니라 전주 시민 모두의 사랑 받는 한국의 순교자 산 몽마르뜨르이다.
(2014.6.18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