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日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 회고전]
딸인 건축가 유이화씨, 생전 작업실 그대로 옮겨와
"책상엔 늘 韓日·日韓 사전… 모국어 잊지 않으려 애쓰셨죠"
2011년 6월 26일, 이타미 준이 세상 떴을 때 모습 그대로 2년 반 동안 멈춰 있던 그의 도쿄 아틀리에가 고국에서 재현됐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전에서다. 모형·서예·소품 등 500여 점도 함께 전시됐다.
"2년 반을 그대로 남겨뒀다가 귀국 이사 전문업체를 통해 다 실어 왔어요. 도쿄 사무실을 완전히 정리했죠. 우리 아버지, 이제 진짜 귀국하셨네요." 4일 전시회장에서 만난 건축가 유이화(41·ITM유이화건축사무소 대표)씨가 헛헛하게 웃었다. 이타미 준이 생전에 "자식, 애인,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이자, 뮤즈"라고 말했던 딸이다. 초등학교 때 한국에 온 이화씨는 아버지 뒤를 이어 건축가가 됐다. 부녀가 각각 도쿄와 서울을 거점으로 협업했다.
아버지는 딸이 완벽한 한국인으로 크길 바랐다. "오죽하면 이화여대 들어가 조신하게 자라 좋은 한국 신랑 만났으면 해서, 제 이름을 이화로 지으셨다잖아요.(결국 딸은 이대에 들어갔고 한국 남자와 결혼했다)" 초등학교 2학년, 서툰 아비의 한국어를 추월했을 때부터 딸은 건축 현장을 따라다니며 아버지의 입이 됐다. 그러길 서른 해, 아버지의 걸어 다니는 건축철학집이 됐다.
"조선 백자를 보면 눈이 한없이 들어간다 하셨어요. 그 '한없는 깊이'를 아버지는 자연의 건축에 담으셨어요. 건물을 짓는 게 아니라 물·바람·돌 같은 자연을 공간 안에 컬렉트하신다고 말씀하셨죠." 이타미 준은 "건축은 사람과 자연이 소통할 수 있도록 이어주는 다리일 뿐"이라고 했다.
딸은 아버지를 당신 건축의 시작이었던 고국산천에 돌려 드렸다. 아버지 유해의 절반은 할아버지의 고향 경남 거창에, 절반은 아버지가 '제2의 고향'이라 말했던 제주 바다에 뿌렸다. 인터넷 뒤져 한국식으로 제사상도 차렸다.
"아버지는 늘 대지 앞에 겸손하라고 하셨어요. 땅의 문맥을 추출해 사람의 온기를 담아 '감동'을 주는 건축. 이타미 준 건축의 요체지요." 그녀 뒤로, 이타미 준 책상에 올려진 글이 눈에 들어왔다. '일생연소(一生燃燒), 일생감동(一生感動), 일생불오(一生不悟).' 한평생 불태우고, 한평생 감동해도, 한평생 깨닫지 못한다. 전시 7월 27일까지. (02)2188-6000
☞이타미 준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무사시공업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1968년 처음 고국에 왔다가 한국 고건축에 매료됐다. 2003년 프랑스 국립 기메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프랑스 예술문화훈장인 슈발리에를 받았고, 일본 무라노 도고상, 김수근문화상을 수상했다. 1970년대 조선의 민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의 건축 소재이자 주제인 ‘물, 바람, 돌’은 ‘제2의 고향’ 제주에서 절정에 이른다. ‘수풍석미술관’ ‘방주교회’ ‘포도호텔’<사진> 등이 제주에 지은 대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