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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7. 묵상글 ( 대림 제3주일. - 욕심이 아니라 사랑으로 만나는 기쁨.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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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7. 대림 제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욕심이 아니라 사랑으로 만나는 기쁨
오늘 바오로 사도는 어떻게 보면 실천 불가능한 권고를 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그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어떻게 언제나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실제를 보면 어쩌다 한번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도 ‘언제나’가 아니라 ‘어쩌다’ 한 번입니다.
기쁨이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주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누구 덕분에 이루어졌을 때 감사하게 되는 것인데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드물 뿐 아니라 누구 덕에 이루어지는 것보다
누구 땜에 오히려 잘못되는 경우가 많으니 기쁠 일은 적고 감사할 일은 더 적지요.
그러니 그것이 순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기쁨과 감사 사이에 기도를 껴 넣고
기도하는 사람만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사야서를 보면 이것이 더 분명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님 밖에선 언제나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순 없다는 밀이 되지요.
그러나 이 말도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언제나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없지만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언제나 다 이루어주셔서
기뻐하고 감사하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엄밀하게 얘기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일치하지 않으면 들어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약을 달라는 우리에게 절대 마약을 주지 않으시는 하느님이시잖습니까?
그리고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지 않으실 뿐 아니라
달걀보다 훨씬 더 좋은 성령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러니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는 말 대로
안 주실 것은 아예 청하지 말고 주실 것을 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면,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주시고,
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이지요.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서 언제나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 청을 다 들어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애인과 있으면 그 자체로 기쁘고 즐거운 것처럼
하느님 안에 있으면 그 자체로 언제나 기쁘고 즐겁습니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하느님 그분 자신이지 그분이 주시는 그 무엇이 아니고,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 무엇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십니다.
그리고 보석을 바라고 애인을 만난다면 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듯
내 바라는 것과 욕심을 채워주시는 분으로 주님을 만나면 참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우리는 욕심이 아니라 사랑으로 기다리고 만나고
그래서 언제나 기쁘고 늘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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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7. 대림 제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대림 3주일을 맞이하는 자선주일에 독서와 복음은 무엇보다도 기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자선은 무엇보다도 기쁨을 함께 나누는데 있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먼저 기쁨을 지니고 있어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지를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빛과 사랑이 영혼안에 흘러 들어올 때 영혼은 기쁨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쁨의 원천은 하느님의 사랑이고 사랑의 본질은 기쁨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였기에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흘러 나왔고 거룩하신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에 한없이 기뻐는 것이 가장 훌륭한 끊임없는 기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불을 끄지 않음으로써 마음안에 자리한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됨을 체득하게 됩니다.
성 토마스아퀴나스는 하느님의 선 자체에 이르렀을 때 기쁨을 지니게 되고 이는 하느님 사랑의 응답을 받은 것이고 이것이 참된 행복임을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한 기쁨을 지닐 때 참된 행복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기쁨은 신앙의 으뜸가는 증거임을 말합니다. 바로 가장 깊고 고요한 데서 오는 내밀할 기쁨 그래서 눈에, 얼굴에, 태도에, 몸짓에 즉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기쁨이 기도가 되고 사랑이 되어 다른이들을 기쁨으로 감염시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참되고 완전한 기쁨을 다른이들로부터 멸시와 오해를 당할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흥분하지 않고 고통을 참아 견디며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데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고통, 죽음, 병고, 그밖의 다른 모든 것들을 하느님 사랑 때문에 기쁨으로 품어안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고통을 받아도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주 행복한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기쁨을 맛봅니다.
자선주일은 무엇보다도 자비의 마음을 지니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타인의 어려움과 고통을 나의 것 처럼 여기는 이 자비로움은 내적 기쁨을 누리도록 영혼을 준비시켜 줍니다.
이 내적 기쁨은 하느님 사랑에서 오는 것임을 알게되고 이런 기쁨을 주신 주님께 찬미와 영광과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됨으로써 이 기쁨은 참되고 순수한 기쁨이 됩니다. 이 참되고 순수한 기쁨을 가지고 이웃과 함께 나누면서 사랑과 기쁨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한주간 되기를 빕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그리스도교 신자로 개종한 중국인 아 록
신 대영제국, 비스마르크 군도 –1905년
어느 날 그의 독일인 집정관은 아 록이 벌써 오랫동안 농장을 떠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이상히 여겼다. 집정관이 그를 만났을 때 아 록은 그에게 자신이 세례를 받을 때까지는 농장 일에서 손을 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아 록의 결심을 들은 닥스 신부는 그러한 굳은 신념에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1907년 4 월 12일에 아 록은 세례를 받았다.
사도 바울로(Paulus) 와 똑같은 그의 세례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 록은 아직 개종하지 않은 주민들에게 사도의 소명을 열심히 실천하였다. 그는 신아일랜드와 주위의 섬에 있는 중국인들을 자신의 넓은 농장으로 불러모아 진실한 신앙심을 갖고 그들을 가르쳤다. 또한 그는 주민들에게 자식들을 부나포네에 있는 선교학교에 보낼 것을 권유했고 자녀들이 선량한 크리스찬이 되도록 교육시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아이들에게 모든 교육비를 보조해 주었다. 후에 그는 신아일랜드에 이민온 중국인들을 위해 최초의 가톨릭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중국으로부터 가톨릭 교사를 초빙해 왔고 교재와 교리서를 들여왔다. 이에 대한 모든 비용을 자신이 지불하였으며,더우기 그 스스로가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다른 곳에서와 같이 전원도시인 라바울(Rabaul)에 있는 가난한 아이들을 가톨릭 신자로 교육시키기 위하여 그의 막대한 재산을 그들에게 보조해 주었다. 중국에 있는 두 가톨릭 학교가 내부 사정으로 인하여 문을 닫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와 그의 형제들은 학과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보내 주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결코 개전의 빛이 보이지 않던 이교도가 이제는 수천 명의 가난한 아이들을 돌보는 선교사가 되었고 외국인 가톨릭 학교의 창립자가 되었다.
아 록은 또한 많은 명망있는 친구들이 진실한 신앙을 갖도록 인도하여 주었다. 그러나 그의 동생 아카이(Achai)는 그의 가르침과 부탁을 모두 거절하였다. 그래도 그들은 서로 일을 같이 하였기 때문에, 종종 신앙에 대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아 록은 동생의 영혼이 구원되도록 마음을 썼고 그를 위하여 수많은 기도를 올렸다.(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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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7. 대림 제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오늘은 ‘기쁨주일’(gaudete) 입니다. ‘핑크 빛’ 대림초에 불이 붙여졌습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을 기쁨으로 태웁니다. 빛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도 기쁨입니다.
<입당송>에서는 노래합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필리 4,4.5 참조)
<제1독서>에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이사 61,10-11)
<화답송>에서는 성모님의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내 마음 기뻐 뛰노네.”(루카 1,46)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기뻐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아버지의 뜻입니다.”(1데살 5,16-18)
<복음 환호송>에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기쁜 소식을 노래합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이사 61,1 참조)
그렇습니다. 이토록 오늘 말씀은 기쁨의 선포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기쁨으로 나서야 하는 곳은 당혹스럽게도 광야입니다. 우리는 설레는 기다림과 고대하는 기쁨의 핑크빛 옷을 입고서 어처구니없게도 텅 빈 광야로 나서야 합니다. 그곳에서 광야처럼 텅 빈 사람, 요한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을 증언하며 기뻐합니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요한 3,29)
참으로, 요한은 자신을 온전히 비워버린 이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외치는 이’가 아니고, 그저 ‘외치는 이의 소리’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비워져 있기에, 참된 소리가 되었습니다. 비어 있는 자 만이 온전한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소리를 내는 이는 피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입니다. 피리가 결코 스스로 소리를 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붓이 스스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붓을 쥔 이가 글씨를 쓰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그처럼, 요한은 자신이 ‘외치는 이’가 아니라, ‘외치는 이의 소리’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그저 비어 있는 피리에 지나지 않으며, 글을 쓰는 이의 손에 쥐어져 있는 붓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진정 비어있는 이였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말이 아니라,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 퍼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비어졌기에 말씀을 반겨 맞아들였고, 들어 온 그 말씀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씀의 참된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비어져 있음은 겸손과 낮춤으로 드러납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다른 이의 발밑으로 내려가려고 하나, 그 자격마저 없는 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종의 일마저도 할 만한 조격조차 없는 부당한 몸이라고 고백합니다.
한편, 그는 자신이 비어져 있는지라 다른 이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분을 알아보고서 선포합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그렇습니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시건만, 우리는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감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분을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
그렇습니다. 어둠은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빛이 들어와 눈이 열려야 그분을 보게 됩니다. 마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눈을 뜨고도 “그들과 함께 걸으시는”(루카 24,15)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야 “눈이 열려”(루카 24,31) 알아보았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믿음 안에서 영의 눈이 열려면, 보게 됩니다. 곧 빛이 비추어 눈이 열리는 것이 “깨어남”입니다. 그러니 “깨어있기” 위해서는 먼저 깨어나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쁨도 함께 깨어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 주님의 현존을 보게 되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기쁨’ 안에서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말을 너희에게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다.”(요한 15,11).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한 1,23)
주님!
화살표 같은 존재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붓이 되어 당신의 말씀을 삶으로 쓰게 하소서.
피리가 되어 당신의 노래를 온몸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주인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생명의 춤이 되고, 당신 축복의 강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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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7. 대림 제3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얼굴 없는 천사 」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한3,16). 이 시간 내어주는 삶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사랑의 주님을 만나시길 희망합니다.
자선은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한 방법입니다. 가난한 사람, 고통받고 소외당한 이들에게 실질적으로 사랑을 주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온전히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성체성사를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끊임없이 주고 계십니다. 바로 그 내어주는 주님 사랑을 사는 것이 자선입니다.
요한 비안네 성인은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선을 되도록 많이 해야 합니다. 자선을 하되 올바른 지향으로 하느님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자선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내고 암흑에 빠지지 않게 해 줍니다. 누구든지 자선을 베풀면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됩니다”(성 암브로시오). 우리 성당 자선함은 언제나 알맞게 채워집니다. 이번 젊은이들의 일일주점 수익금 전액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헌되었습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았습니다.
신명기24장19절에서는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더라도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몫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손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3장2절을 보면“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라고 기록 되어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4,4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라면 자선은 꼭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깝다는 생각으로 하지 말고 (신명15,10), 기쁜 마음으로(로마12,8)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고린13,3). 그러므로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2코린9,10).
그러나 만약 이만큼 도우면 나에게 그만한 대가가 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그것은 자선이 아니라 장사입니다. 그저 베풀 수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태19,21).
성탄이 오기 전 자선을 베풀어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이번 주에는 우리의 옷장이나 서랍에서 꼭 필요한 것이지만 한 가지씩 골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연말연시를 맞이하여 선물을 주고받는데 버림받은 예수님께도 한 가지씩 준비하셔서 나누시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배고픈 예수님, 아파하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받들어 모시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내 눈썹이 내 눈 가까이 있는데도 보지 못합니다. 내 코가 눈 가까이 있는데도 또한 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아주 가까이 있는데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들은 보는데 내가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은 나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입니다.” 이기심을 버리고 나를 내 줄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올해도 어김없이 자선함이 비치되어 있고 익명의 얼굴 없는 천사가 금일봉을 넣었습니다. 그는 드러나지 않게 소리소문없이 큰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래서 존경스럽습니다. 생색내기에 익숙한 세상에 천사들은 여전히 감동을 줍니다. 우리도 얼굴 없는 천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너희 가운데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1,26).고 요한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계시지만 여전히 그분을 몰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알아보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자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유한준)고 했습니다. 관심을 두는 만큼 보이고 또 아는 만큼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이나 관심 있는 사람은 금방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옆에 있어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십시오(이사61,10).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7-18).
예수님은 어디 계실까요? 1)천당 2)지옥
예수님께서는 지옥에 계신답니다. 온갖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들의 고통과 죽음을 대신하시고자 지옥에 계십니다. 험하고 어려운 곳을 찾아다니시며 어둡고 더럽다고 생각되는 곳, 괄시받고 버림받은 이들을 찾아 나서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협력을 바라고 계십니다. 자선을 베풀어 그분의 사랑에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말고 여러분 자신을 송두리째 내 놓으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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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7. 대림 제3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한 주가 벌써 지났습니다. 이제 대림 제3주일입니다.
날은 점점 추워지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점점 예수님의 탄생도 다가오네요. 기다려 지시나요? 주님의 탄생 말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주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곧 오실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왜 예수님을 기다릴까요? 요한은 왜 예수님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믿는 모든 사람을 하늘나라로 이끌어 주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기에 요한은 기다리고 기다렸답니다.
그렇기에 요한은 자신을 하나의 소리라고 표현합니다. 사실 이 표현으로 우리는 요한의 겸손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리’라는 이 표현에는 다른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이 소리로서 전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소리’는 우선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뿐인 당신의 아드님 예수님을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소리’는 주님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천국으로 가는지를 들려줍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주님에 앞서 보낸 ‘소리’는 겸손함으로 주님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도 기다려 볼까요? 주님이 탄생하시길 말이에요. 세상에도, 우리 마음에도 주님이 탄생하셔서 우리가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성탄절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다 안다고 좋은 건 아닐지도.
코로나 시대를 겪어낸 우리들은
한동안 마스크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 마스크 시대에 등장했던 신조어가 바로
‘마기꾼’입니다.
마스크 사기꾼.
마스크로 사기를 친다는 말입니다.
마스크를 착용하면 얼굴의 절반은 가려집니다.
절반은 확인할 수 있지만 절반은 상상에 맡겨야 합니다.
내 상상과 너무 달랐을 때, 그 실망감을 담아 우리는 ‘마기꾼’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마스크 때문에 결혼한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요?
얼굴의 반과 상상의 반을 합쳐서 사랑하게 된 사람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사랑은 상대의 마음을 알게 되고 더욱 깊은 사랑에 빠졌다면….
꼭 다 안다고 좋은 건 아닐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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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7. 대림 제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펭귄은 새일까요? 아니면 물고기일까요? 작지만 날개가 있는 것을 보면 ‘새’ 같기도 하고, 전혀 날지 못하고 헤엄을 잘하는 것을 보면 ‘물고기’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날지 못해도 분명히 ‘새’라고 합니다. 헤엄을 치면서 물속에 있는 물고기, 낙지, 새우 따위를 먹지만 말이지요. 더군다나 땅에서 뒤뚱거리며 걸어 다니는 모습에 우리는 우스꽝스럽다고 말합니다.
사실 남극은 너무 추워서 하늘 나는 것이 전혀 도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먹을 것이 그래도 풍부한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펭귄은 하늘을 날게 하는 날개를 줄여서 바닷속에서 헤엄을 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겉모습만을 보고서 우스꽝스러운 ‘새’라고 말하지만, 환경에 적극적으로 변화하는 열린 마음을 가진 놀라운 ‘새’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좋아 보이는 것이 많습니다. 돈도 좋고, 세상의 높은 지위도 부러움을 삽니다. 명품이라는 물건들은 멋져 보이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 많은 재능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멋진 것은 지금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좋아하는 물질적인 세속적인 가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주님의 가치를 따르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 안에서는 그 판단이 훨씬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인·성녀가 주님의 가치만을 따랐습니다.
오늘 대림 제3주일의 복음 말씀에서도 세상에서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주님으로부터는 큰 인정을 받게 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구세주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스스로 “내가 구세주다.”라고 한마디만 했어도, 사람들은 하느님으로 떠받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의 가치보다 주님의 가치가 더 중요하기에 가장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6)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도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자기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항상 맨 끝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우리의 삶 안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롭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오늘의 명언: 우리 인생의 옷감은 선과 악이 뒤섞인 실로 짜인 것이다(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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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7. 대림 제3주일. 키엣 대주교님.
빛의 증거자
진정한 겸손
세례자 요한, 그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거부했습니다. 자신은 위대한 엘리야도 예언자도 아니며 온 백성의 구원자도 아닌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일뿐 자신은 “구세주를 위해 신발을 들고 다니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이러한 겸손이 그의 말을 더 설득력있게 만들었고 그가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겸손과 영광까지 밝게 비추었습니다.
삶의 고행을 통해 비추는 의지의 빛
사막은 금욕을 의미합니다. 그는 황량한 황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사는 삶, 세상에서 가장 빈곤한 고행의 삶을 택했습니다. 고행 속에서 자신을 극복한 의지의 빛은 자신뿐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밝혔습니다. 거룩한 인간으로서의 희망의 빛은 고단한 삶 속에 점점 나약해지는 인간의 삶을 고귀하고 의미있는 삶으로 만들어 줍니다.
자신을 아는 것
그는 군중들에게 존중받는 화려한 삶이 아닌 고행의 삶을 살았습니다. 훗날 헤로데왕이 형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비난하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결국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삶과 행동은 자신의 증거를 더욱 밝게 빛나게 했습니다. 그의 빛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빛을 볼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를 버리고 나를 잊는 것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을 아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은 단지 주님이 오시는 길을 여는 사람일뿐이라는 자신의 본분을 알았기에 군중들이 오직 구원자 그리스도만을 믿고 받아들이고, 따를 수 있도록 군중들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만을 증거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가장 완벽한 증거자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주님을 높이기 위해 자신은 겸손해져야 하며,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 어둠이 되어야 함을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을 따르던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떠났을 때 그는 자신의 임무를 완성했다고 만족해했습니다. 이처럼 그분은 주님의 길을 열어주신 빛의 증거자입니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주님이 오시는 길을 여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길을 만들기 위해 먼저 세상에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을 알려야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주님의 길이 아닌 나를 위한 길만 열고 있습니다. 주님을 증거하는 대신 나 자신을 증거하고 주님을 알리는 대신 나를 먼저 알리고 있습니다.
대림시기, 주님이 오시는 길을 만들고 그 빛을 증거한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도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함을 알고 그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세례자 요한은 자신은 단지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2. 세례자 요한은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을 버리는 겸손한 삶을 살았습니다. 과연 나는 어떻습니까?
3. 주님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단지 나 자신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4. 아주 작은 일이라도 주님을 증거하는 일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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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7. 대림 제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에 보물을 쌓는
시(詩)같은 인생
-기뻐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겸손하십시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사랑하는 모든 분들 만세!”
만세칠창으로 시작하는 대림 제3주일, “기뻐하여라(Gaudate) 주일”로 일명 기쁨을 상징하는 장미색 제의가 가리키는 것처럼 “장미주일”로 불리기도 합니다. 또 오늘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첩경의 지름길인 자선을 권장하는 “자선주일”이기도 합니다. 입당송도 화답송 후렴도 우리를 한껏 기쁨으로 부풀립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필리4,4.5 참조)
“내 영혼이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나이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12월17일부터는 대림2부의 첫날로 저녁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그 아름다운 기쁨의 노래 “O후렴”이 시작됩니다.
“오, 하느님이여, 이스라엘 집안을 다스리시는 분이여, 불타는 가시덤불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산에서 그에게 당신 법을 주셨으니, 오소서, 팔을 펼치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어제부터 책 제목이 흥미로워 읽기 시작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김상욱)이란 에세이집입니다. 작가의 변도 멋집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윤동주 시인의 유고시집 제목이다...그래서 책의 제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으로 정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가득한 책이지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두 죽어가는 것의 경이로움을 담아보려 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은 필자의 마음을 담은 제목이라 할 수 있다.”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 시가 인간으로 바뀌었네. 시같은 인생! 참 멋지겠다.”깨달음과 더불어 “시”를 “주님”으로 바꿔 읽어도 좋을 참 좋아하는 “詩가 찾아왔네!”라는 얼마전 인용했던 자작시도 생각났습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 바친 헌시獻詩입니다.
-“詩가 찾아왔네!
나를
은총처럼 사랑하는 詩가
가슴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詩가
나 외로울 때, 그리울 때, 기다릴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참 반가운 손님, 참 기쁜 선물, 참 좋은 연인, 참 좋은 친구인 詩
늘 詩를 생각하며 시詩와 함께 살아왔고 살고있고 살것이라네
詩덕분에 하루하루 날마다 늘 평생 한결같이 살아왔네
詩없이 이 삭막한 광야여정 무슨 맛, 무슨 기쁨, 무슨 재미로 살것인가
눈이 열리니 온통 詩인 천국이라네
세상에 나보다 평화롭고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이 없을 것이라네
나 언제나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詩를 사랑하고 섬기듯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행복한 하늘나라의 삶이라네.”-
말씀(言)의 절(寺)인 시(詩), 한자 뜻도 얼마나 깊고 멋집니까! 하느님의 참 좋은 시가 예수님이요, 예닮의 여정을 살아가는 이들은 시같은 인생이 됩니다. 시처럼 살고 싶은 것은 이미 예전부터 제가 소망한 삶이었습니다.
-“詩처럼 살고 싶다
하얀 여백餘白
종이위에 시처럼
침묵의 여백
시공時空안에 시처럼 살고 싶다
여백을 가득 채운 수필隨筆이나 소설小說이 아닌
詩처럼 살고 싶다”-1998.1.24.
어제 아름다운 분이 방문하여 면담고백성사와 더불어 친필로 쓴 성탄카드를 미리 선물했고 즉시 다음의 덕담을 선물했을 때 순간 꽃처럼 기쁨으로, 웃음으로 활짝 환하게 피어나던 그 자매의 얼굴을 잊지 못합니다.
“자매님 자체가 최고의 성탄카드요, 자매님 삶자체가 시같은 인생입니다. 주님의 시같은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하늘에 보물을 쌓는 주님의 詩같은 아름다운 인생”을 소망할 것입니다. 어떻게?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그 참 좋은 방법을 소개합니다.
첫째, 기뻐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십시오. 바로 대림시기, 주님을 기다리는 희망의 기쁨이요 주님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희망이자 기쁨입니다. 다 지녔어도 마음에 희망이, 기쁨이 없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 신자의, 참 영성의 표지가 기쁨입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강권하는 제2독서 기쁨의 사도 바오로가 그 모범이요 제1독서의 기쁨의 예언자, 이사야를 통한 주님의 말씀도 우리를 기쁨으로 격발激發케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고백으로 삼아 대림시기 내내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이 또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시같은 삶입니다.
“주 하느님의 영이 내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1.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고, 2.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3.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4.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이런 생명과 빛, 희망과 기쁨을 팍팍 심어주는 시가 진짜 참 좋은 시입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시인 이사야 예언자요, 역시 하느님의 참 좋은 최고의 시인인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이사야 예언자를 좋아했는지 알겠습니다. 하느님이 아니곤 도대체 이런 기쁨의 선물, 어디서 받을 수 있겠는지요!
둘째, 감사하십시오.
이 또한 참 신자의, 참 영성의 표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입니다. 감사에서 샘솟는 기쁨입니다. 다 지녔어도 감사하는 마음 없으면 행복하다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감사의 삶 역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감사 역시 발견이자 선택입니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 있는 감사의 발견이요, 이런 감사는 역시 선택이 됩니다. 삶이 선택이고 행복이 선택이듯 감사도 선택입니다. 이렇게 살아 있다는 자체가 감사입니다. 이런 감사의 선택과 훈련, 습관의 영성훈련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기쁨의 사도이자 감사의 사도인 바오로의 강권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참으로 감사의 생활화가 일상화가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이래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자선주일입니다. 금을 쌓아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은혜에, 사랑에 자연스런, 당연한 응답이 감사요, 감사의 표현이 자선입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발적 사랑의 자선이야 말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첩경의 지름길입니다.
얼마전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전언이 향기처럼 길이 남아있습니다.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어프(enough)! 충분하다!” 말씀하셨다는 인어프의 사람, 베네딕도 교황은 말그대로 감사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인어프! 충분하다!” 감사하는 행복한 사람을 유혹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인어프(ENOUGH!)! 충분하다!” 늘 잎에 달고 사시기 바랍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 행복한 날, 감사한 날입니다.
셋째, 겸손하십시오.
이 또한 참 신자의 표지이자 참 영성의 표지입니다. 다 지녔어도 겸손이 없으면 참 기쁨이 없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입니다. 인자무적仁者無敵이듯 겸자무적謙者無敵입니다. 겸손한 삶 역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참으로 맑고 향기로운, 아름답고 멋진 매력적인 사람이 예수님을 닮은 이런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입니다. 바로 그 겸손의 빛나는 모범이 빛이신 주님을 증언하러 온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진정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당신은 누구요?”
묻는 다면 여러분은 뭐라 대답하겠습니까? 참으로 세례자 요한의 대답이 통쾌하여 신선한 감동이요 감탄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도, 엘리야 예언자도 아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바로 우리가 대림시기 기다리는 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거울에 자신을 자주 비춰봐야 자기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겸손한 참나의 얼굴입니다. 예수님 없는 세례자 요한을 상상할 수 없듯이, 예수님 없는 우리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런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마중나가며 날로 예수님을 가까이 닮아갈 때 겸손하고 온유한 참나의 모습입니다.
영혼 건강에 최고의 식食이자 약藥이, 하늘에 끊임없이 보물을 쌓는 삶이, 기쁨과 감사, 그리고 겸손의 삶입니다. 이래야 영혼의 치유는 물론 날로 영혼을 튼튼하게 하니 저절로 육신의 건강도 뒤따릅니다. 이래야 육신한테 끌려가지 않는 영혼 주도의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대림시기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날로 당신을 닮아 기쁨과 감사, 겸손의 참사람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때까지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없이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1테살5,23-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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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7. 대림 제3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비록 아니어도>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7-8)
빛이 오시네
빛에 앞서
빛이 아닌 나 있네
빛을 닮아
오시는 빛을
온 누리에 드러내려고
얼이 오시네
얼에 앞서
얼이 아닌 나 있네
얼을 닮아
오시는 얼을
온 누리에 드러내려고
참이 오시네
참에 앞서
참이 아닌 나 있네
참을 닮아
오시는 참을
온 누리에 드러내려고
길이 오시네
길에 앞서
길이 아닌 나 있네
길을 닮아
오시는 길을
온 누리에 드러내려고
사랑이 오시네
사랑에 앞서
사랑이 아닌 나 있네
사랑을 닮아
오시는 사랑을
온 누리에 드러내려고
살림이 오시네
살림에 앞서
살림이 아닌 나 있네
살림을 닮아
오시는 살림을
온 누리에 드러내려고
기쁨이 오시네
기쁨에 앞서
기쁨이 아닌 나 있네
기쁨을 닮아
오시는 기쁨을
온 누리에 드러내려고
희망이 오시네
희망에 앞서
희망이 아닌 나 있네
희망을 닮아
오시는 희망을
온 누리에 드러내려고
주님이 오시네
주님에 앞서
주님이 아닌 나 있네
주님을 닮아
오시는 주님을
온 누리에 드러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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