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에, 사진을 통해서 보았던 자료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진을 떠올리면서 읽어 보십시오.
<조각>
고딕 양식이 끝나갈 즈음이면 팀파늄에 대형으로 조각하던 양식이 독립된 소형 양식(성인상)으로 바뀐다. 소형의 개인상에는 지금까지 표정이 없던 조각상이 표정을 가지는 조각상으로 바뀐다.
최후의 만찬
승천
성모 마리아
성인상
표정 있는 얼굴은 개별적인 특징이 되면서 조각이 사실성을 띠게 된다.
묘지에 조상하는 것이 유행하면서 죽은 자를 이상적인 모습으로 조각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석관, 장례식 등을 조각상으로 표현했다.
예수상도 젊은 청년상으로 조상하였다.
*인물의 개별화 — 육체를 가진 인간을 개별화하여 조각으로 표현하려니
개성미와 더불어, 인간의 몸을 통하여 종교적 神性을 드러내려 했다.
세밀삽화도 사실적인 표현을 하였다. 이때의 대표적인 조각상의 주제는 자비의 성모, 고통에 찬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매장 등 슬픔을 강조한 주제들이었다.
요약하자면 13세기에 보여주던 이상주의적 표현이 14세기 와서 사실적인 표현으로 바뀌었다. 15세기에는 다시 격정적인 표현으로 흘러갔다. 이것은 왕과 귀족의 특권 의식이 강조됨으로 특정 계층의 인물을 개성화하였기 때문이다.
브르고뉴 지방이 미술의 중심이 되면서( 브로고뉴의 공작 필립 2세가 플랑드로(네델란드) 지방까지 통합하자 디종이 중심 도시가 되면서 미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말하자면 플랑드로 미술 양식이 결합되면서 사실적 표현으로 흘러갔다.
(*솔루터는 네델란드의 유명한 조각가로 성경의 일화를 조각한 ‘모세의 우물’이 유명하다. 그는 감정 표현 뿐아니라 얼굴의 특징적인 생김새를 표현하여 사실적이고 세련되게 표현했다.)
조각상들
사르트르 성당 팀파늄
사르트르 성당 jamb
랭스성당 팀파늄 jamb(성인상)
랭스성당 수태고지
5. 솔루터의 모세의 샘
이 조각을 보면 고딕 양식을 외면하고 사실주의 양식을 도입하였다.
6. 아담과 이브(독일)
7. 대학강의 –일반 생활상
8. 중세의 기사(갑옷-영국)
발 아래에 마귀(용=사탄)가 있다.
9. 성모자상(독립) - 독립 조각상
10. 백작 부부상-봉헌자 상
11. 성인상
12. 피에타 상(독일)
13. 십자책형(고통의 표정)
14. 청동문(요한의 일생) -->르네상스로
***책
서적 제본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했다.(사진들)
13-4세기에 이르면 제본 기술이 발전한다. 프랑스는 책을 전문으로 만드는 공방이 있었다. 시각적으로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도 넣고, 화려하게 장식도 하였다.(금빛 사용 – 금장이라고 한다. 금장제본)
**책을 열면
075부터 078 타피리스 까지
<필사본 세밀화>
채색 세밀화 삽화를 고딕품 미술이라고 말한다.
수도원에서 만들던 채색 세밀화가 13세기에 고딕 시대가 열리면서 파리의 민간인 공방에서 제작하였다. 고딕 시대가 끝이 나면서 민간 공방에서 만드던 세밀화도 업어진다. 이때까지의 미술을 고딕 양식의 미술이라고 한다. 수도원에서 민간 공방으로 제작소가 바뀌면서 양식에서도 변화가 왔다.
1250년을 기점으로 흐릿하던 세밀화는 선명한 양식으로 바뀐다.
파리 대학이 설립되면서 책이 많이 필요하였다. 수요가 많아지자 채색 세밀화를 그리는 화공도 많아졌다. 세밀화는 사실적이고, 세련된 감각을 요구하였다. 색채는 선명해지고 인물은 우아해졌다. 명암을 강조하였다. 문양 장식도 세련되었다.
샤르르 6세 때의 (1380-1420) 베리 공작은 세밀 삽화의 수집가로 유명하다. 랑부르 형제가 남긴 베리 공작의 기도서(1413-16년에 제작)가 유명하다.
<고딕 양식의 쇠퇴>
14세기 말부터 고딕 양식은 쇠퇴한다. 16세기에는 종말을 고한다. 이때 불꽃 모양의 문양 양식(플랑브와 양식)이 나타난다.
(*플랑브와 양식은 선명하고, 맑고, 깨끗하다.)
1453년에 비잔틴 제국의 이스탄불이 오스만 터키에 정복 당하면서 멸망한다. 비잔틴 제국이 사람들이 대거 서쪽으로 이동해 온다. 이때부터 르네상스가 시작한다. 비잔틴 제국 사람들의 대이동은 중세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 즉 르네상스가 시작한다.
한편으로 스페인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카톨릭 왕 페르디난스에게 밀려서 물러갔다.
고딕 미술의 본 고장인 프랑스에서는 100년 전쟁(1337-1453)을 치루면서 국력이 소모되었다. 퇴폐 풍의 고딕 양식이라는 플랑브와 양식(다양한 곡선이 특징이다. 곡선과 곡선이 얽혀서 불꽃 모양을 만든다. ) 글로체스터 천정의 장식 문양이 대표적이다
< 시대적 배경>
1. 로마네스크 시대는 농촌 중심 사회이고, 마을이 중심지이다. 마을이
점차 커지면서 소읍으로 발전한다. 이때가 고딕 미술이 일어나는 시기와 일치한다.
2. 마을이 도시로 바뀌면서 지적 수요도 늘어난다. 부응하여 도시에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로마네스크 시대는 수도원이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고딕 시대에는 도시에 대학을 설립하여 대학이 교육의 중심 역할을 맡았다.
최초의 대학은 11세기에 설립한 이태리의 볼로냐 대학이다. 이어서 파리의 솔본느 대학(1257), 영국의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이 설립되었다.
문학에서는 기사와 공주의 사랑을 다룬 연애시기 궁전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궁전에서 음유 시인이 연애시를 낭송하면 귀부인이 귀를 기울이고 들었다.
도시의 발달은 상인 계급의 등장을 의미한다. 상인들은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길드를 조직하였다. 길드는 모든 예술인(예술인도 장인의 대우를 받았다.)과 장인이 보호를 받았다.
도시의 건축물은 목조와 이엉 지붕에서 석조로 바뀌었다. 로마네스크 시대는 시골에 수도원이 중심이었으나 도시의 성당이 중심이 되면서 고딕 미술이 나타났다. 도시의 카톨릭 세력이 막강해지면서 성당 건축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십자군을 통해서 이슬람과 이집트의 문화를 접촉하였다. 서유럽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위시한 많은 고전 문화와 선진 문화를 받아들였다.
특히 프랑스는 필립 왕 - 루이 9세의 통치 기간에 십자군 전쟁을 적극적으로 치루었다. 전쟁을 통하여 왕권을 감화함으로 중세의 봉건제도는 약화되었다. 도시 중심으로 경제 부흥이 일어나면서 도시의 시민 힘이 커졌다. 이 시대에 고딕 성당을 많이 세웠다.
농촌의 수도원에서 도시의 성당으로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농업에서 상업으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종교도 경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수도원은 시골에 세웠으나, 성당은 도시에 건립하였다.)
중세의 신학 사상(시토 수도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이 계시를 중요시하는 신비주의 신학이다. 이 신학이 로마네스크 미술의 배경이다. 그러나 베네딕트 수도회와 도미니크 수도회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수용하여 자연주의 철학을 배경으로 이성주의와 신학을 조화롭게 접목하였다. 이 신학 사상이 고딕 미슬의 배경이다.
종교 미술은 신의 말씀을 환기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인간이 신앙심을 통하여 구원받는다는 사상을 구현한 것이 기독교 미술이다. 로마네스크 미술은 소재를 요한 계시록에서 가져 왔다. 폐쇄된 수도원에서 인간의 구원을 바라는 신앙심으로 금욕과 수도생활을 하는 것이 로마네크크 미술의 배경이다.로마네스크 조각은 원시적이고, 소박하고, 미숙하게 표현하였다.
고딕 성당은 도시의 출현과 맥을 같이 하였다. 부르주아지 계급이 성당 건축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고딕 성당은 도시 전체를 보호해 주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므로 도시 생활에서 개방된 공간의 역할을 하였다.
조각도 훨씬 더 자연스러운 형태를 취하였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을 분석을 하여서 조각상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