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文化의 黃金時代)
세종은 이조 제 삼대 임금 태종의 셋째 아들로 휘를 도(度), 자를 원정(元
正)이라 불렀다.
태조 육년 정축(丁丑=西紀 1,397년) 사월 십일에 한양(漢陽) 잠저에서 출
생하였다. 태종 팔년 무자(戊子)에 처음으로 충녕군(忠寧君)으로 봉했고
임신(壬辰)에 대군(大君)으로 봉했으며 무술(戊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
다. 동년 팔월 팔일에 경북궁 근정전에서 선양(禪讓)을 받았다. 그리고
경오(庚午) 이월 십칠일에 별궁에서 오십사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슬하에는 십팔남 사녀가 있었다.
세종은 이씨조선의 성군(聖君)이며 동시에 문화의 대은인이었다. 세종이
삼십이년에 결쳐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에 문화의 꽃이 만발했으므로 세종
시절을 가르쳐 이조문화의 황금시대(黃金時代)라 한다.
그 시대의 문화는 모두가 세종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또는 발명되었는
데 이러한 임금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틀어 놓고 보더라도 얻을 수 없
을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은 분명히 창조자였고 발명가였다.
세종 치세중(治世中)의 업적을 들어보면 첫째 과학, 둘째 예술, 셋째 어학
이다.
그 당시에 있어 강우량(降雨量)을 측량할 수 있는 측우기(測雨器)는 동서
어느 나라에도 없었다. 그런데 세종은 이를 만들었다. 과학을 자랑하는
서양 사람보다도 이백년이나 앞선 것이다. 그리고 예술면에 있어서는 음
악에 유의하여 아악(雅樂)의 소리를 바로잡아 예로부터 전해 오던 동양의
고전음악(古典音樂)을 다시 일으켰다.
또 특기할 것은 세종이 우리 나라 문자가 없음을 개탄하고 한글 이십팔자
를 만들어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우리 글을 발명한 것이다. 이때부터
다시 말하면 세종 이십팔년부터 우리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자를 가진
민족이 된 것이다.
세종은 사람으로서 <생각이 없는 사람>을 싫어하였고 <능력없는 사람>을
싫어하였다. 세종은 <능력있는 분>이었고 <생각이 있는 분>이었다. 그리
하여 두만강 가에 육진이 개척되었고 또 동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대마도
(對馬島)와 서쪽으로는 파저강(婆猪江)가 만주인의 출몰을 막아 내게 되었
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면 세종은 일대(一代)의 영주(英主)였고 성군
(聖君)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의 비(妃)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는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안효공(安孝公) 심온(沈溫)의 딸로 태조 사년 을
해(乙亥=西紀 1,395년) 구월 이십팔일에 양주 사제(私第)에서 출생하였다.
태종 팔년 무자(戊子)에 가례(嘉禮)를 거행하고 경숙옹주(敬淑翁主)로, 정
유(丁酉)에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무술(戊戌)에는 경빈(敬
嬪)으로 책봉했다가 다시 공비(恭妃)로 임자(壬子)에는 다시 고쳐 왕비로
봉했다. 그후 세종 이십팔년 병인(丙寅) 삼월 이십사일에 별궁에서 오십
이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왕비의 소생으로 슬하에 팔남 이녀가
있었다.
王妃所生의 王子와 公主
一남, 문종대왕(文宗大王)
二남, 세조대왕(世祖大王)
三남, 안평대군(安平大君)
四남, 임영대군(臨瀛大君)
五남, 광평대군(廣平大君)
六남, 금성대군(錦城大君)
七남, 평원대군(平原大君)
八남, 영응대군(永膺大君)
一녀, 정소공주(貞昭公主)
二녀, 정의공주(貞懿公主)
后宮所生의 王子와 翁主
一남, 화의군(和義君)
二남, 계양군(桂陽君)
三남, 의창군(義昌君)
四남, 한남군(漢南君)
五남, 밀성군(密城君)
六남, 수춘군(壽春君)
七남, 익현군(翼峴君)
八남, 영풍군(永豊君)
九남, 영해군(寧海君)
十남, 담양군(潭陽君)
一녀, 정현옹주(貞顯翁主)
二녀, 정안옹주(貞安翁主)
성군(聖君) 세종에게도 일정한 후궁이 다섯 사람 있었다.
첫째 정일품(正一品) 대우를 받는 영빈(令嬪) 강씨(姜氏), 신빈(愼嬪) 김
씨, 혜빈(惠嬪) 양씨(楊氏)가 있었고 다음으론 정삼품(正三品) 대우를 받
는 숙원(淑媛) 이씨(李氏)와 정육품(正六品) 대우를 받는 상침(尙寢) 송씨
(宋氏)가 있었다.
위에 기록한 십왕자 이옹주는 다섯 후궁이 낳았다. 그중에서 신빈 김씨가
여섯 아들을 낳았고 혜빈 양씨가 세 아들을 낳았다. 이런 점에서 생각하
면 세종의 정력도 남만 못지 않았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