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택한 그릇
사도행전 9:10-19 / 김상복 목사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쌔. 사도행전 9:10-19.
여러분 가운데 예수 믿기 전에 사도 바울처럼 핍박자였던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못 살게 굴고 교회를 못 가게 한다든지 교회 가는 것을 비난한 적이 있는 분들이 계시겠지요.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이와 반대로 핍박을 받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1부 예배 후에 어느 여자 분이 저에게 친구를 소개시켰습니다. “목사님, 제 친구가 오늘 교회에 처음 나왔습니다. 그런데 가족들 모르게 몰래 왔어요.” 교회 못 가게 야단을 치고 못 살게 구니까 몰래 왔다는 겁니다. 제가 그 분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했어요. “하나님, 이 분의 발걸음이 천국에 가는 발걸음이 되게 하시고, 이 분 때문에 온 집안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모두 하나님을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마 그렇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바꾸는 비즈니스를 하십니다. 어느 영국 사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내 나이 이제 80이 되었는데 내 인생을 되돌아보니 실패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만일 내게 인생이 다시 한 번 주어진다면 나는 전 생애를 바쳐서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헌신하겠다.” 사람이 변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변화 되는 것이 없습니다. 변화된 사람만이 변화를 일으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을 너무도 잘 하십니다.
저도 25세에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게 되고부터 제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했어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보다 더 평화가 있고 기쁘고 행복해지니까 그 하나님을 좋아하게 되고 하나님을 따라다니다가 결국 목사가 되었어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 사람을 바꾸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어 제자가 되고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그 분의 모습과 가르침과 삶, 그 분의 가치관과 행동을 배워 꾸준히 예수님의 제자로 변화 되어가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십니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 예수를 만나서 구원을 받고, 천국이 안보이던 사람이 천국이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무관심하던 사람이 그 말씀을 사모하면서 사람이 달라집니다.
“그 때 다메섹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더니”(10절). 사울이라는 아주 고약한 사람이 다메섹 어느 집에 들어가 있었는데 마침 아나니아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도 그 도시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환상으로 나타나셨어요. 하나님과 친하면 참 좋은 것 중의 하나가 기도 가운데 환상으로, 또는 음성으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철저히 훈련 받아서 하나님과 또 예수님과 친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현실적으로 나타나셔서 여러분과 대화하시고 말씀해주시고 길을 보여주시고 힘과 용기를 주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본문에도 제자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환상 중에 불러 가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11․12절). 직가라는 거리, 유다라는 사람의 집, 다소 출신, 사울, 기도하는 중,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사울이 눈이 떠지는 환상을 보았다는 여섯 가지를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보시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지, 언제 할지, 어떻게 할지, 왜 해야 할지, 누구와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의 자세하고 아주 구체적인 부분에까지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매일 하나님을 만나고, 매일 그 분과 대화하고, 매일 그 분의 성경을 통해 그 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과 친해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그 분이 여러분의 삶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인도해 주실 수 있어요.
점을 치러 가면 점치는 사람은 “동쪽으로 가지 마시오.” 라고밖에 말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ㅅ’자 들어가는 성을 가진 사람하고 동업하지 마시오.” 뭐 그런 식이지요. 사람이기 때문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인도해주셔서 이렇게 여섯 가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이 여섯 가지가 한 사람에게 그대로 맞는 것은 수학의 확률적으로 보면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위대하신 능력의 하나님,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나니아처럼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과 친하고 예수님과 모든 것을 의논하고 그의 음성을 듣고 인도하심을 받아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직접 간섭하신다는 것을 체험하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제자에게 주시는 것들입니다.
사울에게 가서 안수하고 기도하라는 말을 들은 아나니아는 “하나님! 어떻게 그 사람에게 가라고 하십니까? 그는 소문이 나쁘고 아주 악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슨 화를 입으라고 그러십니까?” 했습니다. 사울은 악한 사람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악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예루살렘에 가두고 심지어 스데반까지 잡아다가 돌로 쳐서 죽이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돌로 칠 때 사울은 그것을 보면서 만족해하고 있었어요. 아주 독하고 악하기로 소문난 사람입니다.
사람은 악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아무리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악한 사람을 싫어해요. 근처에 갔다가 물릴까봐 가능하면 멀리 있고 싶어 해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악한 사람에게 가까이 가라! 악한 사람이 변하려면 선한 사람이 가야해. 마귀의 도구로 쓰임 받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람이 가야지. 가라!”고 하십니다. 사실 인간적으로는 찾아가는 것이 겁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나니아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가고 싶지 않겠지만 예수 믿는 사람, 착한 사람, 거룩한 사람,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야 악한 사람들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15절).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사울을 택했다는 말씀입니다. 아주 독하고 악한 이 사람을 택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나니아와 같은 충성된 제자를 사용하시고 또한 악한 자들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그릇으로 사용하십니다.
예수 믿는다고 여러분을 못 살게 구는 가족이나 이웃, 직장 동료들이 있다면 기뻐하십시오. 그 사람에게 예수 믿을 날이 가까이 온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악한 감정도, 선한 감정도 없고 예수를 믿든 안 믿든 아무 상관도 없는 무관심한 사람,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고 나빠하지도 않고 아무 반응이 없는 사람이 오히려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똑 부러질 시간이 다가온 사람입니다.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창백한 얼굴에 초조하고 긴장된 상태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서성이고 있습니다. “당신 왜 그렇게 길에서 서성이고 있소?” “나는 지옥에 가야 할 사람인데 마귀가 날 못 들어가게 합니다.” 이유는 마귀를 위해서 한 것이 없고 그렇다고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도 없는, 차지도 덥지도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랍니다. 이런 사람은 마귀마저도 싫어하는 거예요. 화끈하게 자기만을 위해 일하던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지 하지 않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은 열정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6). 여러분, 이제 하나님을 알고 영원한 생명을 알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시길 바랍니다. 열정이 없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고 마귀조차 받아 주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것뿐만이 아니라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열정이 있는 겁니다. 뜨거운 가슴이 있어요. 무엇을 해도 뜨거운 가슴으로 하는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감동, 감화시킵니다. 세상에서도 성공을 합니다.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의 가슴이 하나님을 향해 뜨거워지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15절)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한 일에도 화끈한 사람을 택한다는 말입니다.
내년 2007년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평양 대부흥운동’은 길선주 장로를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분은 원래 불교도였고 유교도 많이 공부한 훌륭한 인물이었어요. 어느 정도 열심이었냐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매일 불공을 드렸어요. 그러던 분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매일 새벽 불공을 드리던 대로 새벽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한국교회에 새벽기도가 생겼습니다. 어느 집회에서 길 장로님이 자신의 과거 잘못을 깨닫고 회개를 했습니다. “나는 내 친구 부인의 돈 100불을 훔쳤습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 통곡하며 자기 죄를 토했습니다. 거기에 자극 받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일어나 울며 온갖 죄를 다 회개하는 겁니다. 거기서 한국 교회의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오늘까지 이른 것입니다. 열정이 있었어요. 이전에 이런 열정이 있었고 이후에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아침 성찬예식을 통해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잔과 떡이 여러분의 몸속에 들어 갈 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슴을 새롭게, 뜨겁게 만들어 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찾아갔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17절). 우리 속에는 누가 계시죠? 성령님이 계십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 순간에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그 사람 가슴 속에는 누구에게나 성령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특별히 아픈 사람이나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여러분의 손을 그 사람들의 몸에 대고 하십시오. 그러면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그 사람에게 나타나십니다.
아나니아가 말했습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17절). “아, 그렇지 않아도 내 꿈에서 당신을 봤습니다.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온다고 했는데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군요.” 그리고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손을 얹어 기도하고 축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눈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고, 이해하지 못한 자를 이해하게 만드시고, 듣지 못한 사람들의 영적인 귀를 열어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알고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여러분의 손과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나타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요, 여러분 속에 성령이 살아 계신데 그 성령께서 기도와 안수 가운데 나타나시는 것을 여러분이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울은 성령이 충만해져서 건강이 회복되고 다시 일어나 음식을 먹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핍박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변했습니다. 아나니아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를 통하여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님, 여러분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 속에 살아계십니다. 그 분을 통해서 또 여러분의 기도와 사역을 통해서 주위 사람들이 변화되어 복음을 위한 예수의 증인으로 쓰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예식을 합니다. 성찬은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성찬을 받을 때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고 우리가 부활과 생명을 얻는 사람들이 되어서 아나니아처럼, 사도바울처럼 이 땅에서도 예수의 증인으로 쓰임 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함께 기도 하십시다. 기도 할 때 자신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무런 열정도 없이 냉랭하게 식은 나의 영혼에 성령을 보내셔서 다시 한 번 불을 질러 주시옵소서. 성찬을 받을 때 내 죄를 사하시고 내 안의 새로운 생명이 불 일듯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신령한 눈이 열린 사도 바울
최창훈 목사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복을 받으려면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고, 예수님 곁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열 두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동행하며, 예수님의 교훈도 받았고, 인격적인 지도도 받았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죽음도 보았고, 부활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았고, 예수님 곁에 있지도 않았고, 예수님 말씀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가장 예수님를 정확히 알았고, 정확히 믿었고, 그리고 예수님의 복을 정확히 받은 사람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바울은 그날도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결박시켜 예루살렘으로 호송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는데 그때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비추어 눈이 멀어 그 자리에 거꾸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릎을 꿇고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옆 사람의 부축을 받아 직가라고 하는 유다의 집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3일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 채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다메섹에 있는 주님의 훌륭한 제자 아나니아라는 사람에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아나니아야!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 집에 다소 사람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으니 가서 안수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말하기를
"주님! 제가 들은 바로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을 해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도 성도들을 결박하려고 온 사람인데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자를 만날 수 있습니까?"라고 대답하며 두려워하는 그에게 주님께서는
"아니다. 그 사람은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 앞에서 내 이름을 전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택한 그릇이니 두려워 말고 가거라"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유다의 집에 들어가 소경이 되어 보지도 못한 채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고 있는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하고 안수하자 바울은 그때부터 일어나서 음식을 먹고 건강해졌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은 "신령한 눈이 열린 사도 바울"이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조명하여 하나님 앞에서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은혜 받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바울은 믿음의 눈이 열렸습니다
20절을 보면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울이라는 한 청년의 눈을 멀게 하시고, 또 눈을 뜨게 한 이후에 사도로 쓰임을 받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눈은 떳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먹지 못하던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껏 눈은 떳으나 잘못보고 살아온 자신의 생애, 자신의 가치관, 그리고 자신의 세계관에 대하여 그는 과거를 다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일어섰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눈 먼 사람들에게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눈은 떳으나 볼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눈은 떳으나 보지 못하는 맹인이 있고
육신의 눈은 떳으나 지식이 없는 맹인이 있고
육신의 눈은 떳으나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영안이 먼 맹인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육신의 눈은 떳으나 돈에 눈이 멀고, 권력에 눈이 멀고, 성공과 출세에 양심의 눈이 먼 맹인이 있습니다.
여기 바울이 오늘 뜬눈은 영적인 눈입니다.
원래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하나님을 공경했던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던 자요,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영적인 눈이 먼 맹인이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환상의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거늘 어찌 하나님을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본 사울은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람이 선교사로 바뀌어졌고, 자기 민족만 보던 사람이 이제는 세계의 열방을 보는 사람으로 변화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영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20절에 보면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전파하니"라는 말씀은 이제 바울이 성경에서 예수를 보게 되어 영안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엡1:17-18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에 눈을 밝히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눈도 자연만물을 보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빛 되신 계시의 영 즉,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령한 영안은 하나님의 자녀 된 자에게 성령이 밝혀주시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은 사랑의 눈이 열렸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미워하고, 모든 악을 합리화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남으로서 그의 눈에서 편견과 아집과 살기의 비늘을 벗겨지고 사랑과 섬김과 봉사와 용서의 눈이 열렸습니다.
바울은 이제 이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율법으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던 눈이 멀게 되고,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하여 이해하는 눈으로 바꾸어져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쓰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본 다는 것은 자기 속에 좋은 점이 있기 때문이요, 이것은 예수님의 인격을 가진 마음의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든지 좋게 볼 수 있음에도 나쁘게 보는 것은 우리 눈에 비늘이 덮여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눈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똑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을 보는 눈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요인 가운데 성공하는 자는 성공자의 장점을 바라보지만 실패자는 실패자의 단점만 보고 산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긍정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행복합니다. 화평합니다.
그리고 상대의 장점을 보고 칭찬할 때 자기 인격은 성숙되어 가고 자신의 마음에 평안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태양을 등지고 살 듯이 남의 어두운 면만 보고 삽니다.
그러나 사랑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창조하신 세상이요,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3. 바울은 소망의 눈이 열렸습니다
성도는 하늘을 보는 사람이요, 하늘나라 영광을 보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니 보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현재를 보지 않고, 미래를 보았으며
땅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으며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던 마음이 변하여 긍휼의 정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청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에 그의 눈은 온통 예수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들어가도 예수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사형장에 가면서도 찬송하였으며, 그리스도를 보면서 죽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삶에 위대한 변화를 일으킨 것은 스데반의 죽음을 그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 스데반의 옷을 들고 그곳에 서 있던 사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등이 깨지고 피를 흘리면서도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 "주 예수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잠이 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토록 아름답게 죽는 모습을 보면서 바울은 스데반의 강력한 영향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이 광경을 보고 "아 내가 남들로부터 지성인이라는 말을 들었고 내가 율법을 지키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지만 나는 한번도 남을 그렇게 용서하거나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 것이 아닌가? 저 분이야 말로 위대한 분이구나!"하고 생각을 하게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스데반의 영성이 각인되어 스데반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천국을 흠모하고 사모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때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천국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천국은 아름다운 곳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은 곧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시17:14-15절을 보면 다윗은 고백하기를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의 전부였고, 행복이었으며, 소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의 눈은 말씀과 진리 속에서, 세상 속에서, 저 하늘나라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나깨나 그런 심정으로 살았기에 살아도 예수요, 죽어도 예수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교자의 길로 가면서까지 한번도 자기 자신을 탄식하거나 원망하지 아니하고 행복하고 영광스럽게 승리자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 고현교회 성도님들에게도 임하여 일생을 영안이 열린 사람으로 사도바울처럼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