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여/ 자기의 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시인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어느 시인보다 자유를 갈망했던 시인 김수영이 쓴 ‘구름의 파수병’이 배우의 육성으로 낭송되고 있었다. 생활에 매몰되어 시를 배반하고 사는 자신의 삶마저 철저히 시적 자학의 대상으로 삼아 쓴 시가 낭송되는 순간, 내 입에서는 아 하는 나직한 탄성이 절로 나왔다.
연극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는 김수영의 시와 삶을 소재로 취한 연극이다.
제목은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첫 행에서 땄다. 왕궁의 실정과 왕궁의 음탕을 고발하는 대신에, 옹졸하게도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자신의 비겁한 소시민성을 철저히 고발하고 탄핵하는 이 시는 내 안의 비겁을 성찰하고 언론의 자유를 역설한 작품이다.
그러나 연극은 김수영의 시와 삶에 대한 오마주를 의도하지 않았다. ‘내 안의 김수영을 찾아서’라는 부제처럼, 내 안에 잠재된 김수영적인 것에 대해 환기하고자 했다.
김수영적인 것은 무엇인가.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힘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생산할 줄 아는 능력이 아니었을까.
김수영의 시와 삶 텍스트는 자신에게 철저히 저항함으로써 시대의 증인이 된 경우였다.
연출가 김재엽이 의도한 내 안의 김수영이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시적 저항의 의미는 내 안의 비겁과 굴종에 맞선다는 의미를 갖는다.
4·16 세월호 참사 이후 2014년 여름의 광화문광장이 나오는가 하면, 1950~1960년대 김수영의 삶이 오버랩되어 연출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본을 미처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 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 자체가 ‘연극’이 되었다.
연출자와 배우 강신일이 고민하는 과정이 관객들의 마음에도 이심전심 전해졌다. 일상 자체가 싸움이 되어버린 세월호 유족들이 연극을 감상하며 배우들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것도 좋으리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문학은 자유이다. 그러나 자유를 위협하는 주체가 오직 국가뿐일까. 연극을 보고 나오며 내 문학과 삶의 출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4·16 이후 시와 예술은 무엇인가. 어느 철학자가 기득권자의 입장에서 재난 개념이란
“모든 것은 이전처럼 계속되어야 한다”
고 말한 것처럼, 지배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조금도 놓지 않으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과 예술은 나에 대해 저항하며 자신의 예술에 대해 더 사유하고 자유 자체를 살 수 있는 조건들을 위해 작은 실천 행위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작가회의 사무실에는
“나라 걱정을 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不憂國非詩也)
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다산 정약용의 말이다. 나는 ‘나라’ 대신에 ‘사람’(人)을 넣어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는 지금 애국자들이 너무 많다. 사람 걱정을 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 김수영이 그러했듯이,
김수영의 후예들 또한 사람 걱정을 하는 시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자유실천’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멀다.
저 왕궁의 음탕 또한 여전하다. 그러나 문학은 끝내 굴복하지 않는다. 문학의 본질은 자유 그 자체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