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73
8월5일[연중 제17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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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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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RFngOTjKgsU
(박상용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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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쇠락과 소멸, 그리 나쁜 것이 아니랍니다!>
예수님의 등장과 더불어 초스피드하게 쇠락하고 소멸되는 세례자 요한의 생애와 운명이 참으로 기구하면서도 흥미진진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생애를 요약해보니 이렇습니다.
‘주님은 점점 커지셔야만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만 한다. 나는 쓸쓸하게 저무는 석양이요, 그분은 황홀하게 떠오르는 태양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조차 묶어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구약 시대 마지막 대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신원의식으로 인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잘 수행하실 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시기 전까지만 해도 세례자 요한의 위용은 엄청났습니다. 그의 날 선 설교와 거침없는 행보는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면, 추종자, 제자들이 줄을 이었고, 세례자 요한 당(黨이)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등장하시고, 떠날 순간이 왔음을 직감하자마자, 평생 준비해왔던 마지막 사명을 시작합니다. 그간 공들여 교육시킨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물려드립니다. 손톱만큼의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잘 준비해놓은 무대를 예수님께 넘겨드리고, 조용히 무대 밑으로 내려옵니다.
틈만 나면 내가 누군 줄 알아? 나 이런 사람이야! 하고 외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입만 열면 자화자찬이요, 별것도 없으면서 어깨에 잔뜩 힘주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여야 하는데, 지나치면 그것보다 더 꼴불견은 다시 또 없습니다.
자꾸만 한 살 한 살 더 나이를 먹어가면서, 세례자 요한이야말로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롤 모델이요 이정표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쇠락과 소멸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는 그런 모습, 노인들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소명입니다.
잘 아시는 바처럼 나이를 점점 더 먹어가면서, 더 이상 젊은 시절의 가슴설렘이나 파릇파릇함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 시선으로만 바라보면 참으로 견디기 힘든 순간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활짝 떴던 세례자 요한의 눈으로 바라보면, 오시는 주님을 위한 나의 쇠락과 소멸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노화와 병고, 죽음조차도 결딜만한 것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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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lYsoAmTGV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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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게 기억한 것은 잊어버리기도 힘들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베들레헴에서 목자들의 방문을 받습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한 말이 정말 그대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 놀라워합니다. 성모님은 마구간에서 분명 이들의 도움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하.사.시.』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날 당신을 보기 위해 방문했던 목자들의 이름을 다 아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어머니가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목자들의 숫자는 열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 번씩만 자신의 이름을 어머니에게 소개해주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이름을 다 기억했다가 아드님께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모님께서 이 일을 곰곰이 생각한 덕분입니다.
제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이름 외우는 일입니다. 기억력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성의가 없는 것입니다. 성의가 없다는 말은 나의 에너지를 다른 것을 기억하는 데 썼다는 뜻도 됩니다. 곰곰이 생각한다는 말은 그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에너지를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성모님은 그러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미사를 하는데 아는 얼굴 둘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불안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인사하셨는데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유학 중 잠시 쉬러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들이었습니다. 저는 참 고마운 분들이었지만, 얼굴과 이름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분들을 그 이후로는 다시 떠올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의 흘러 지나가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필요할 때는 기억하고 필요가 없어지니 기억하지 않는 이기적인 마음의 열매인 것 같습니다. 유튜브 채널에 ‘이슈 체크’에서 ‘1.5kg밖에 안 되는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는 28년 후, 간호사를 깜짝 놀라게 하는데….’라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29년 전 빌마는 간호 수습 기간을 마치고 평간호사가 됩니다. 빌마의 첫 일은 신생아실이었습니다. 어느 날 임신 30주밖에 안 된 엄마가 1.5kg밖에 안 되는 아이를 낳습니다. 그날 밤 빌마는 신생아실 밖에서 앉아있는 한 남성을 만났고 그가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빌마의 손을 잡고 아들의 이름이 ‘브랜든’이라고 하며 잘 부탁한다고 말했습니다. 빌마는 브랜든을 자기 아이처럼 돌보았고 아이는 건강하게 인큐베이터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브랜든이 초등학생이 되어 엄마와 함께 간호사를 찾았지만, 빌마는 다른 병원으로 이동했다는 소식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빌마는 일하는 병원에서 소아청소년과 레지던트를 만납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브랜든이라고 소개합니다. 빌마는 깜짝 놀라 태어난 병원과 시간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간호했던 아이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빌마는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며 브랜든을 꼭 껴안아 주었습니다.
나중에 기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미숙아였던 ‘브랜든’에게 어떤 특별함이 있었기에 28년이 지난 후에도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나요?”
빌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브랜든은 제가 전담 간호를 맡은 첫 번째 아이였어요. 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아이에요. 하지만 그 이유가 제가 브랜든을 28년이 지나고도 기억한 이유는 아니예요. 심장이 유난히 약했던 ‘제이슨’, 사람만 보면 잘 웃던 ‘아만다’, 저는 제가 보살폈던 아이들 모두 가슴 한 켠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게 특별하지 않았던 아이는 없습니다. 제가 보살핀 수많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저에게 소중하고 특별한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녀는 아이들이 돈벌이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사용하고 버리는 물건처럼 도구화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마음이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교구장님은 기억력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십니다. 한 번 본 신자들도 아주 시간이 오래 지나도 기억하시고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이것에 많은 분이 감동하십니다. 저는 그분이 단순히 기억력이 좋은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그분은 누군가를 만나고 들어오시면 그 사건과 이름을 써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렵게 외우는 것입니다.
쉽게 외우는 것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어렵게 외우면 잊히기도 어렵습니다. 이것이 성모님을 닮은 모습일 것입니다.
저도 사제로서 본당에 있지만, ‘어차피 떠날 건데!’라고 생각하며 적당히 꼭 필요한 만큼만 이름을 외우는 데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런 만남도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섭리의 일환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섭리로 우리를 만나게 해 주셨는지를 묵상하다 보면 자꾸 이름과 얼굴을 떠올려야 하고 그러면 저절로 잘 외워질 것입니다. 비록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기는 하지만, 저도 하루에 5분 만이라도 오늘 만난 사람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하느님 섭리를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결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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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4,1-12: 헤로데가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목 베어 죽인 요한 세례자가 더 큰 권능을 가지고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부활했다고 믿었다. 헤로데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헤로데의 동생 필리포스는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으나, 처남과 다투는 바람에 장인은 딸을 데려갔고, 형인 헤로데가 그 여자와 결혼했다. 그래서 요한 세례자는 율법에 따라 이방인들처럼 되지 말고 불신앙에 물들지 말라고 경고하였는데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살아있는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도덕적 훈계로 헤로데를 자극하였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4절) 말함으로써 요한은 즉시 곤경에 빠지게 된다. 사악한 사람을 훈계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해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한은 율법이 말하는 것, 구원에 합당한 것, 사랑에 합당한 것을 이야기했지만, 그 대가는 감옥에 갇히는 것이며 죽음만이 남아 있다. 인간의 마음을 바로잡고 죄가 되는 행실을 물리치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뿐이다. 요한이 강직한 사람이었다.
헤로데의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고 있다. 사람들은 춤에 빠져들었다. 관능적 쾌락이 매우 잔인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스라엘은 죄와 세상의 쾌락에 빠져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팔아버렸다. 딸은 제 어머니의 부추김으로 율법의 영광을 상징하는 요한의 머리를 가져다 달라고 한다. 그리하여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담겨 소녀에게 주어졌다(11절 참조). 잔치는 살인 현장이 되고 생일은 장례 날이 되었으며 그 식탁은 원형경기장이 되었다. 헤로데는 괴로워했다고 하지만, 괴로워하는 척했을 뿐이다. 그는 이미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불법이라고 말한 요한을 죽이려고 했던 헤로데였다. 이렇게 그는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는다. 우선, 동생의 부인인 헤로디아를 유혹함으로써 불륜을, 그 여인에 의해 세례자 요한은 죽임을 당했으며, 또 얼마 안 가서 평판이 나빠져 자신도 폐위되고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봉사직은 나 자신뿐 아니라, 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참된 권위는 사랑과 봉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진리를 전하는데 굴함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참된 봉사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권능이 다른 사람들 앞에 더욱 드러날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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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신문을 만드는 제게 밭은 당연히 신문의 지면입니다. 저는 지면에 묻혀 있는 보물을 찾느라 일주일이 훌쩍 지나갑니다. 정창용 신부님의 ‘아이티’ 이야기는 가난 속에서 예쁘게 피는 꽃과 같습니다. 윤채영 선생님의 심리 여행은 은은함이 드러나는 연꽃 같습니다. 원영배 부제님의 평화칼럼에서는 인문학에서 피어나는 신학을 볼 수 있습니다. 리길재 기자님의 ‘공소’ 이야기에서는 국화꽃 향기가 납니다. 김광현 교수님의 ‘성당건축 이야기’에서는 바람에 넘어지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김용은 수녀님의 ‘오늘도 안녕하세요?’에서는 자아를 잃어버리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영성의 샘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보물이 묻혀 있는 ‘가톨릭평화신문’을 더 많은 분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보물을 찾으려는 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된 보물이 묻혀있는 평화신문이 있음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최근에 제가 신문에서 발견한 보물은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입니다. 박형찬 교수님은 가톨릭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문화와 예술에 큰 족적을 남겼던 분들 중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동안 소개된 예술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지용(프란치스코), 장발(루도비코), 피천득(프란치스코), 윤석중(요한), 장우성(요셉), 김기창(베드로), 마해송(프란치스코), 윤용하(요셉), 김세중(프란치스코), 박완서(정혜 엘리사벳), 찬상병(시몬), 최인호(베드로), 정채봉(프란치스코), 윤정희(데레사)” 이분들은 한국 문화 예술계의 별이었습니다. 가톨릭 예술가로서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이었습니다. 세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라고 합니다. 네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천에 있는 세잎 클로버는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쩌다 발견하는 네잎 클로버를 보고 기뻐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그 행복을 행운을 통해서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행운은 마치 사막의 신기루와 같습니다. 찾기도 어렵지만 찾았다고 해도 남들에게 빼앗기곤 합니다. 가톨릭 예술가들은 '예술‘을 통해서 행복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행복이 밭에 묻혀 있는 보물입니다.
오늘 독서는 ‘희년’을 이야기합니다. 희년의 근본정신은 "남이 나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도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듯이 가난한 이, 굶주린 이, 헐벗은 이, 노예들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합니다. 이것이 희년의 정신이며 이런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는 것입니다. 희년은 정해진 햇수나 날짜가 아닙니다. 희년의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매일 매일이 희년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들에서 보물을 찾으려는 사람은 희년이 왔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행운 속에서 보물을 찾으려는 사람도 희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나눔, 자비, 희생, 사랑’을 보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보물은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재물, 권력, 명예’이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희년을 선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희년을 몰랐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준비하였던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욕망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은 결코 희년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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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불의한 권력자와 그 힘에 대하여, 수난 가운데서도 의연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위대한 사람과 그의 굽히지 않는 힘에 대하여 증언합니다. 이 같은 인생은 어디서 어떻게 올까요?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복음서의 증언에서 확실한 이유를 한 가지 유추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로 연결된 하느님과의 견고한 끈입니다. 요한이 기도하였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말에서도 드러납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특별히 요한이 체험한 하느님은 광야와 연결됩니다. 복음서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루카 1,80)라고 합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의 고향으로 알려진 ‘에인 카렘’(Ein Karem, 포도밭의 봄)은 이름처럼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입니다. 그런 그가 황량한 광야로 나간 까닭은 이스라엘의 광야 체험을 배우려고 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광야는 유혹과 시련의 장소지만, 물질의 궁핍 속에서 하느님의 보호와 그분의 말씀에 의지하는 삶을 배우는 곳입니다. 무엇보다도 광야는 침묵 가운데 기도하는 곳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세상의 수많은 소음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말이 넘쳐나고, 많은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두려워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침묵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시고 고요 속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을 세상에 증언하는 삶입니다. 삶 안에서 복음의 진리를 증언하는 용기는 어디서 얻겠습니까?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을 지켜 주시고 모든 어려움을 이겨 내게 하시며 당신을 증언할 용기와 힘을 주실 것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마태 3,3)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연결 고리를 생각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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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고난회 서현승 베드로 신부님]
<죄를 낳는 죄>
창세기에 등장하는 첫 인간의 범죄이야기는 원인론적으로 모든 인류가 저지르는 죄의 행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죄를 지으면 부끄러움을 느끼고, 가리고, 숨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숨어 있는 첫 인간을 몸소 찾아가셔서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부르십니다. 이왕 지은 죄야 돌이킬 수 없지만, 죄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비극적입니다.
끝까지 핑계를 대며 자기의 죄를 합리화하려던 그들은 결국 낙원의 은총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절망의 늪에 빠지고 맙니다.
헤로데 역시 첫 단추를 잘못 끼우더니 훨씬 심한 죄의 나락에 떨어집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였다가 그 잘못을 지적하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고, 사람들 앞에서 헛된 맹세를 한 결과로 무죄한 요한의 목을 베는 지경까지 이릅니다.
문제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합리화하려는 태도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헤로데는 이스라엘 왕국의 창시자 다윗의 모범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는 무수히 많은 죄를 짓고도 하느님의 축복을 넘치도록 받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겸손함으로 말입니다. 첫 번째 죄가 낳는 두 번째의 더 큰 죄를 두려워할 일입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솔직함이 우리를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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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오로회 孤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옳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크게 부각된 점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인생관이었다. 한 사람은 정의를 위해서 죽음까지 각오하면서까지 옳은 일을 하다가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였고, 한 사람은 자신의 영달과 안전을 지키려고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과는 관계없이 주위상황과 사람에 의해 줏대없이 살면서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 앗아간 헤로데라는 인물이다.
의인인 요한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짧고 간단하게 요한의 삶을 표현하였지만 그 짧은 표현 속에 요한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전해주는 데에는 충분하다. 결코 짧은 것이 아니다.
그의 삶은 아주 짧게 끝났지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오늘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많은 메시지를 던져 줄 것이다.
반면 옳게 살지 못한 헤로데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장황하게 늘어 놓았지만 모든 이야기들이 추하고 비열하다. 길게 늘어 놓을수록 더욱 추한 이야기의 나열일 뿐이다.
요한 세례자는 패했고 헤로데는 승자같지만 정말로 승리한 이는 요한이고 패자는 헤로데이다. 죽은 이는 요한이요, 살아있는 자는 헤로데였지만 정말로 죽은 자는 헤로데요, 살아있는 이는 요한이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삶을 보면서 역사는 진실을 말하고 있고 어떤 삶을 살았는가는 당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로 승자이고 영원히 사는 길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럼 좀 더 요한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를 묵상하자.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그의 삶은 항상 예수님의 삶을 대변해주고 있다. 결국 예수님도 옳은 일을 하다가 반대자들에 의해 죽을 것이지만 반드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선의의 사람들,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대변해주는 것이요, 기독교인의 삶을 이야기한다.
요한이 한 일은 옳은 일을 말하고 외쳤고 또 그렇게 살았다. 옳은 일 앞에서 죽음도 명예도 출세도 모든 것을 버렸다. 왜 그렇게 살았는가?
올바르게 사는 것이 요한의 인생관이요,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옳은 일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삶이 바로 의인의 삶이요, 신앙인의 삶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의 확고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갖고 흔들림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사는 삶이다. 정의와 진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순교자라고 한다. 교회는 이런 순교자를 최고의 영예로 여기며 이들을 聖人이라고 한다.
오늘 날 우리 교회는 이런 성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시대에 따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고 철새처럼 자기의 인생관, 가치관도 없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이리 붙고 저리 붙어 사는 삶이 아니라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진리를 쫓아 사는 사람이 필요하다.
골베 신부님은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고 진리에 봉사하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헤로데라는 한 인간의 추한 모습을 잠시 묵상하자. 헤로데라는 인물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헤로데라는 인간을 통해서 강하게 다가 오는 것은 인간이 진리를 모를 때 어떻게 되는 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헤로데는 자기의 권좌와 명예를 지키고 쾌락적인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자기에게 옳은 일을 조언하는 의인을 죽였고,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자기도 원치 않았지만 맹세까지 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딸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했고, 동생의 부인을 차지하는 불륜의 관계를 서슴없이 범했다.
이와 같은 모습은 그의 부인인 헤로디아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헤로디아도 자기 욕망에 사로잡혔고 그 욕망을 성취시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인간이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었을 때 얼마나 무서운 인간으로 타락할 수 있는 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죄를 지었을 때 그 죄가 자기를 얼마나 짓누르고 있는가를 헤로데와 헤로디의 모습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헤로데는 요한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죽인 요한이 살아난 것으로 생각하고 불안해하였고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헤로디아도 자기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죄의 늪에서 허우적 되고 있다. 사실 헤로데 임금이 베푼 잔치는 헤로디아를 위해서 베푼 잔치가 아니다. 그렇치만 요한에 대해서 앙심을 품고 있는 헤로디아는 그런 자리를 자기의 욕망을 실현하는 기회로 이용하였다.
헤로디아는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 딸이 매춘부나 추는 춤을 추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부추켰으며 또 딸에게 보상으로 주어진 청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 이용하였다. 그로 인해 자기 남편은 물론 자기 딸마저 사람을 죽이는 공범자로 만들었다.
앙심을 품고 있는 한 여인의 무서운 생각이 결국은 자기도 죽이고 가족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임금이 무슨 원이든 딸의 원을 다 들어주겠다고 했을 때 요한 세례자를 감옥에서 풀어 줄 좋은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앙심을 품고 있었던 헤로디아는 가장 좋은 기회를 자기와 다른 가족들을 가장 불행한 기회로 만들어 버렸다.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잔치에 온 모든 사람들에게 가족간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헤로디아는 앙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의롭고 거룩한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온 모든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잔인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기회가 자주 있는 법이 아니다. 좋은 기회를 잘 살리 수 있는 것, 그것이 삶의 지혜이다. 그것이 성공하는 길이다.
좋은 기회를 불행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사람을 살아서는 안 되겠다. 이런 모든 불행의 원인은 바로 앙심을 갖고 살아가는 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여기에서 한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즉 인간이 불행해질 수 있는 길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하나는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취중에 내뱉는 말이다.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절대로 앙심을 품고 살아서도 안 되고, 취중에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어려운 취중에 어떤 약속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죄는 죄를 낳는 법이다. 모든 죄는 개인적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다른 이에게 피해를 준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도 그랬고 헤로디아도 자기 혼자만으로 끝나지 않고 사랑하는 남편과 딸까지도 죄를 짓게 만들었고 또 그들에게도 불행을 가져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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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두려움에 대해 일러주십니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태 14,4)
세례자 요한은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헤로데에게 지치지 않고 진언을 합니다. 혼인 관계에 관한 하느님의 뜻을 두려움 없이 전한 것이지요. 무소불위의 힘과 세력을 지닌 이에게 진리를 일깨우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위험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예언자들이 박해받고 죽음을 당한 것이지요. 결국 요한은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마태 14,5) 헤로데라고 뭐가 옳은지 그른지 모를 리는 없지만 욕정이 눈을 가리운 데다 주위 사람들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으니 어느새 옳고 그름의 기준마저 모호해졌을 테지요.
그렇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고 싶은 마당에 요한이 계속 양심을 건드리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을 겁니다.
불의한 권력자 해로데의 해법은 진리의 숨을 막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을 죽이려 했지요. (사실 병행구절인 마르코 복음에서는 헤로데의 나름 어쩔 수 없었던 입장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설명하기는 합니다만...)
여기서 헤로데가 요한을 없애는 데 단 하나 걸림돌이 있다면 군중입니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존경하기 때문에 후폭풍이 두려웠던 게지요. 천하의 헤로데도 두려운 존재가 있었던 겁니다. 안타까운 점은 그 두려움의 대상이 절대자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란 점이지요.
그는 인간의 눈에 들고 싶어하고, 인간에 의해 좌지우지되며, 인정받고 칭찬받는 데 많은 에너지를 쓰는 성향인 듯합니다. 그런 헤로데였기에 경솔하고 경박하게 맹세를 남발하다 결국 체면과 허세를 지키려 역사에 길이 남을 불의한 살인을 저지른 셈이지요.
여기서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 하느님의 사람과 악인, 예언자와 박해자 사이의 극명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바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와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라는 차이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희년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레위 25,10)
희년은 말 그대로 기쁨의 해입니다. 그동안 삶의 질곡에서 얽히고설키면서 잃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했던 본래의 자리를 되찾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공적으로 보장해 주는 장이라 할 수 있지요.
희년에는 어떤 이는 자기 소유지를 되돌려받고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며, 또 어떤 이는 그동안 자기중심적으로 축적하며 달려온 탐욕의 질주를 멈추고 과잉으로 축적한 것을 돌려주어야 하지요.
가나안 정착 시절 하느님께서 땅을 고루 나누어주시면서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 부여해 주셨던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이기에 가능한 제도일 겁니다.
사실 현대의 자본주의적 경제 관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요. 가진 자는 세습을 통해 계속 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싶어하고 오히려 제도가 이를 뒷받침해 주니까요.
"이 해는 희년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거룩한 해다. 너희는 밭에서 그냥 나는 것만을 먹어야 한다."(레위 25,12)
마치 일주일에 하루 있는 안식일처럼 그 해에는 파종이나 추수, 수확 등의 모든 생산활동이 금지됩니다. 이를 그저 게으르게 놀고 먹기만 하라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에만 온전히 의탁하라는 의미일 겁니다.
노동과 경제활동은 생계 유지와 자아 계발, 공동체 발전 등의 긍정적 효과가 있는 반면, 빈부격차의 심화와 차별 등의 불합리한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악이 사람 안에 깃든 하느님의 모상성을 자기중심성으로 비틀어 이기심을 부채질하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어느새 하느님에게서 골고루 나누어받은 재화에 대한 감사를 잊고 자기와 가족의 부와 안위를 위해 내달립니다. 그게 타인을 억압하고 해치고 짓밟는 일이어도 그렇게 하지요.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레위 25,17) 안식일 법이나 희년 제도는 결국 하느님 경외를 알게 해주는 장치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잊고, 눈에 보이는 사람을 의식하며 얕은 체세술과 끝없는 탐욕으로 제 이익만 추구하던 사람에게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 제대로 깨닫게 해 주는 시간이 곧 희년인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은 갑자기 새로 만들어내는 무엇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그동안 자기를 가려 주고 보호하던 장치들을 내려놓고 벌거벗게 되면 찾아오는 근원적 인식입니다. 하느님 백성이라면 어느 때건 반드시 맞게 되는 각성과 통찰의 때이기도 하지요. 그 때와 시간, 방법이 각자 다를 테지만 은총의 순간임은 분명합니다.
우리 각자는 누구를 두려워하는지 자신의 영혼을 잘 살펴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고 자녀라면, 그리스도의 벗이고 성령의 거처라면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해야 하는 존재는 주님이시지요.
희년의 실천이 세속을 살아가는 머리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쁨의 해, 희년 정신의 근본은 하느님 경외와 사람에 대한 사랑이니, 탐욕스럽고 방만한 물질주의 세상 안에서 부족하고 미약하나마 그 정신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려 애쓰는 우리 모두는 참으로 복됩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복음 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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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된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한다>
한 사기꾼이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전화를 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잘못을 알고 있으니 이 계좌로 돈을 송금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공개하겠습니다.”그랬더니 거액의 돈을 보낸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답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차례 같은 방법으로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보낸 사람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숨긴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잘못을 범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마음, 양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일잔치에 흥을 있게 한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헛된 약속을 하였고, 소녀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올 것”을 청했습니다.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왕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하려고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평생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은 분입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분이 오시는 데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마르 1,7)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주님을 앞세웠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왕인 헤로데에게도 해야 할 말을 했습니다. 사실,“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막시 밀리안 콜베) 그러므로 참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대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1베드 2,19)
자기를 포장하는 허세를 부려 위신, 체면을 지키려 한다면 결국은 그것뿐 아니라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되고 근심,걱정,불안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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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손가락 지혜라는 말이 있습니다. 손가락으로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라고 말하면서 가리켜 보십시오. 손가락 하나는 그를 분명하게 향하고 있지만, 손가락 세 개는 자기를 향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상대방이 나쁘다고 말하는 순간, 자기는 세 배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에 관한 판단과 단죄를 멈추지 못합니다. 늘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판단을 하기에 앞서, 최소한 3번은 자기를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손가락 하나만 상대방을 향하고, 세 개의 손가락은 계속해서 나를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신독(삼길 신愼, 홀로 독獨)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혼자 있을 때 삼가고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스스로 절제하며 옳은 길을 걷는 사람은 함께 있을 때도 좋은 모범을 보입니다. 그러나 혼자 있는 모습에서 겸손하지 않고 함부로 막 한다면 남들 앞에서의 모습이 진짜가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보여주기 위한 삶만을 따르면서 그저 남들만큼만 할 생각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남들처럼만 살라고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유한 ‘나’의 삶을 살라고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비교, 판단, 단죄의 삶이 아닌, 인정, 지지, 칭찬이라는 나의 멋진 삶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손가락 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헤로데 영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로디아의 농간에 농락되어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잘랐지요. 우선 그의 잘못은 헛된 맹세에서 시작했습니다. 자기 생일잔치에 헤로데의 고관들과 갈릴래아의 유명한 인사들이 초대된 자리에서 기분이 너무 좋아 헛된 맹세를 한 것입니다. 어떤 청이든 다 들어주겠다는 맹세였습니다. 이때의 청이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는 것이었지요.
군주가 손님들을 초청해서 화려한 잔치를 벌이는 것은 그들에게 자기 권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세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예수님의 소문에 죽은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고 하면서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이 나바테아 왕녀를 소박한 것이 빌미가 되어 나바테아 왕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게 되었고, 전쟁 패배로 인해 로마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을 가서 죽게 됩니다.
세상의 눈치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를 살피면서 그 뜻에 맞게 열심히 사는 고유한 ‘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눈치는 순간의 만족만을 주지만, 주님의 뜻을 따르면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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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런 것이다>
마태오 14,1-12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그런 것이다>
의가
불의에
죽지 않으니
의롭게
죽임 당한 이가
불의하게
죽인 이에게만은
되살아나는 것이다
의를
불의는
죽일 수 없으니
의롭게
죽임 당한 이를
불의하게
죽인 이만은
되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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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희년의 정신>
어제의 탈출기는 매년 지내야 할 축제들에 관해 얘기하고, 오늘의 탈출기는 오십 년마다 지내는 희년에 관해 얘기합니다.
그런데 어제 독서를 읽으면서 살포시 웃음이 났습니다.
제물을 바칠 때 흔들어 바치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제사를 지내는 방식 가운데 하나일 뿐일 수도 있지만 특별히 생색을 내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연인들이 사랑을 고백하거나 전할 때 굳이 이벤트를 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엄마의 사랑은 굳이 생색을 내지 않습니다. 엄마의 사랑은 특별하지 않고 일상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밥을 해주는데 특별히 한번 밥 해주는 것처럼 밥상을 흔들지 않습니다. 매일 빨래해주는데 특별히 한번 해주는 것처럼 빨래를 흔들어대지 않습니다.
그런데 연인의 사랑은 특별히 하는 사랑이기에 흔들어대야겠지요. 멀리서도 눈에 띄어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깃발을 흔드는 것처럼.
그러니까 흔들어 바치는 제사는 어머니의 사랑처럼 매일 바치는 제물이 아니라 며칠 안 되는 축일만이라도 연인의 이벤트처럼 특별히 바치는 사랑의 몸짓입니다.
다음으로 오늘의 탈출기는 희년을 지내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데 오십 년마다 지내는 것이니 연중 축일들보다 훨씬 더 특별한 축제입니다. 왜냐면 이 희년에 모든 것이 해방되어 원상 회복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제와 수탈에서 해방되듯이 모든 것 그러니까 인간뿐 아니라 피조물과 땅까지 해방되어 본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것은 안식일을 넘어 안식년의 의미입니다. 생애에 한번은 안식년을 갖거나 갖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안식년의 목적은 앞서 봤듯이 모든 것의 원상회복입니다. 원상회복이란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던 그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이고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뤄져야 하고요.
흔히 JPIC(Justice and Peace, Integration of Creation)라고 하는 것의 실현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말로 하면 ‘정의와 평화와 창조 질서 보존’이라고 하고, 줄여서 ‘정평창보’라고도 하지요.
북한산 안식년이라면 북한산이 원상회복되도록 인간이 발길을 끊는 것이고, 인간의 안식년이라면 인간이 원상회복되도록 한해를 오롯이 쉬는 것이지만, 달리 말하면 인간과 자연의 파괴를 초래했던 그동안의 불의를 멈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희년의 정신인데, 그런데 쉬라는 하느님의 명령, 쉬게 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우리는 얼마나 잘 따릅니까?
나의 인간성 회복을 위한 안식년도 제대로 가지지 못하고, 너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안식년을 제대로 주지 않으며, 자연 상태의 회복을 위해 안식년을 주지 않는 우리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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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희년(禧年)의 영성>
- 인간의 해방, 경제적 해방, 생태적 해방 -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
오늘 제1독서 레위기는 희년에 관한 내용으로 참 풍부한 영감을 줍니다. 인류를 포함한 전 지구 역사에 대한 거시적 영적 안목을 갖게 합니다. 거시적 안목과 정체성 형성에 역사, 도덕, 국어 교육은 얼마나 절대적으로 필요한지요! 오늘날 교육계에서 파생되는 모든 문제들은 이런 기본적 과목의 소홀에 있음을 봅니다. 도대체 역사, 도덕 교육이 너무 부실한 것 같습니다. 제가 70년대 20대 중반의 청년교사로 초등학교 6학년생을 세 번 가르칠 때 도덕, 역사 교육에 온 열정을 쏟았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어제는 ‘지정학의 힘’에 이어, 틈틈이 대략 속독으로 이희호 평전을 독료했습니다. 한반도에 대한 거시적 안목과 더불어 외교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지정학의 힘’은 이미 윤대통령이 취임하기 2년전 2020년 11월에 나온 책이고, 이희호 평전에서 김대중의 외교에 대한 탁견은 2009년 타계하기 전 자서전에 나온 소견입니다.
2009년 한국은 큰 두 별이 사라졌으니 김수환 스페파노 추기경(2009.2.16.)과 김대중 토마스 모어 대통령(2009.8.18.)입니다. 두 분 다 거시적 안목을 지닌 모두의 존경을 받았던 민족의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
이희호 여사의 김수환 추기경님에 대한 회고입니다.
“참 훌륭한 삶을 사신 분이었지요. 추기경님은 우리와 함께 오랫동안 민주화 투쟁을 하셨지요. 남편이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진주교도소에 있을 때도 면회하시고, 내란음모사건으로 청주교도소에 있을 때도 찾아가셨어요. 우리가 어려울 때 생활비를 주시기도 하고요.”
이희호 평전에 소개된 김대중의 외교의 중요성에 대한 탁견에 감탄하며 공감했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한반도의 불행한 역사만은 제발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국처럼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외교가 가장 필요한 나라다. 외교가 운명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에게 외교는 명줄이다. 한반도는 4대 강국의 이해가 촘촘히 얽혀있는, 기회이자 위기의 땅이다. 도랑에 든 소가 휘파람을 불며 양쪽의 풀을 뜯어먹을 것인지, 열강의 쇠창살에 갇혀 그들의 먹이로 전락할 것인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렸다.”
역시 이희호 평전에 나오는 감동적인 김대중 대통령의 회고담입니다.
“나는 감히 예수편에 서려고 했다. 진정한 용기는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헌신에서 나온다.”
‘진리에 대한 헌신!’, 까맣게 잊고 지내기 십중팔구이지만 위대한 인간의 특징입니다. 지정학의 힘이 지정학의 덫이 될 수 있습니다. ‘지정학의 힘’에 나오는 거시적 안목의 탁견이 일품입니다.
“강대국들의 일차적 관심은 자국의 현실적 국익이다. 미국, 중국, 일본은 분단되고 대립하는 한반도를 원하기 때문에 한반도의 긴장 완화에 나설 이유가 없다. 가장 시급한 과제가 남북한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는 것이다.
한반도 전체의 역량을 결집해도 주변 강대국들에 비해 부족한데 분단되고 대립되어 남북상호간에 역량을 소모하는 현재 상황은 최악이다. 남북한이 적대적으로 대립하여 약해진 한반도를 누가 원하는가? 강대국들이 원한다.
특정 강대국에 편승해 전적으로 의존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 지리는 변하지 않는다. 강대국들의 욕망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한반도가 지정학적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정학적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남북한 모두에게 지정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희년의 영성을 공부하면서 희년의 거시적 영적 안목에 감동하면서 엉뚱하게도 한반도 현실에 대한 거시적 안목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강론은 희년의 영성입니다. 희년의 정신이, 영성이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 정신은 예언자들을 통해,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통해서도 면면히 계승됨을 봅니다.
인간의 해방, 경제적 해방, 생태적 해방, 전분야를 망라한, 기후재난을 겪으며 위기를 맞고 있는 오늘날 참으로 구원의 영감을 제공하는 희년의 영성입니다. 50년마다 일어나는 희년의 주요목적은 공동체의 사회적 균형과 조화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1.개인적인 해방과 자유의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노예는 해방되어야 했습니다. 인간 모두의 해방이요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2.경제적 해방과 자유의 차원에서 모든 조상의 땅은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려 주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모든 사람은 가족의 땅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생계가 가족 토지의 소유권에 의존하는 공동체에서 사회적 균형과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3.생태적 해방과 자유의 차원이 참신합니다. 너무 착취되어 고갈되는 자연에 온갖 과다한 쓰레기들로 수난을 겪는 땅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희년에는 씨를 뿌리거나, 난 것을 거두거나, 손질하지 않는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밭에서 직접 가져온 것만 먹을 수 있었고 다른 어떤 소산도 먹을 수 없습니다. 희년동안 밭은 휴경으로 땅도 휴식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레위기에서 소개되는 희년의 내용들입니다. 마지막 구절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너희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늘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이웃에게 정직하라는 말씀이요 하느님을 경외하며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라는 권고입니다.
참으로 작금의 불평등과 분열의 시대에 공존공생의 지혜를 제시하는 거시적 영적 안목을 주는 희년의 영성입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생태계 모두가 공존공생 더불어 살기위해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영성입니다. 땅도 쉬어야 하고 보호받아야 합니다. 더 이상 중병에 걸린 땅의 착취도 끝내고 살려내야 합니다. 지구의 종말은 인류의 종말입니다.
이런 희년의 영성은 고스란히 예언자 예수님을 통해 전수됩니다. 공생애에 앞서 나자렛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으로 희년을 선포하시는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흡사 출사표出師表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의 하늘 나라의 비전이 고스란히 담긴 희년의 영성입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결론 말씀이 동시에 오늘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루하루 희년의 영성을, 정의와 평화, 해방과 자유, 공존공생의 균형과 조화의 삶을 추구히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이런 정의와 평화의 삶을 추구하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의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통해 악의 실체가 어둠의 세력이 고스란히 폭로되고 있습니다. 헤로데, 헤로디아, 헤로디아의 딸 모두가 괴물이자 악마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이탈했을 때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악의 승리인 듯 하지만, 세례자 요한의 불행한 죽음으로 끝나는 듯 하지만 궁극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이 살아났다하며 불안으로 전전긍긍합니다. 마치 바톤 텃치처럼 세례자 요한의 뒤를 잇는 예수님이요 오늘까지 가톨릭교회를 통해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예언자의 전통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통해 살아 났고 오늘 우리를 통해 살아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의미심장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새삼 하느님의 전사로서 영적전의를 새로이 하여 세례자 요한의 몫까지 살 계획을 새로이 했을 예수님입니다. 희년의 영성을 통한 거시적 영적 안목과 현재 한반도 역사에 대한 거시적 현실적 안목이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내부의 극단적 반목과 분열이 얼마나 어리석고 치명적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나라가 아무리 약하고 작아도 내적분열로 망했지 결코 외적의 침임으로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약하지도 작지도 않습니다. 원인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하니 안에서부터 부패와 분열로 무너지면 속수무책 답이 없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거시적 영적 안목을 지니고 우리 모두 희년의 영성을 살게 합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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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마태14,8)
<정의를 죽이지 말자!>
오늘 복음(마태14,1-12)은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말씀과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시종들에게 말합니다.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14,2)
예수님을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으로 봅니다.
헤로데가 이렇게 말을 해놓고 얼마나 불안했을까?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으니.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선구자로서, 예수님의 길을 닦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고, 하느님의 정의를 외쳤습니다. 헤로데 앞에서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다가 그의 손에 의해 죽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또 다른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는 이들이 탄압받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정의는 가난한 이들과 약한 이들, 사회적 약자들이 살아나는 정의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있는 정의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참으로 이상한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이상한 신자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있는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는 이들을 곱지 시선으로 바라보는 신자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5-46)
죽음 너머에 있는 세상 안으로 들어갈 때 맞이하게 될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죽이지 말고 살립시다! 그래서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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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D6m7_kBCi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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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마태 14, 10)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처절하게
통곡하시고
뻔뻔함에
고통스러워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어둡고
무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생명의 안부를
묻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아닌
사람이
있습니다.
폭력과
살인 앞에서
점점 왜소해지는
우리들
모습입니다.
찌르고
죽이고
짓밟는
미쳐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느님의 뜻과는
달리 거꾸로 가는
세상, 살인마가
미쳐 날뛰는
세상을 향해
세례자 요한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인격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내것이 아닌
하느님의
소중한
생명들입니다.
하느님의 세상은
패륜(悖倫)의
현장이 아닌
사랑과 평화의
현장입니다.
과분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우리들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이제 얼마나
많은 일들이
또 생길지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 뭉클한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로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무너진 인간성을
세우는 역사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더
깨끗해지길
간절히 바라며
쓰러져 간
많은 생명들의
아픔을 기억합시다.
한줄기 희망의
빛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의 아침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감히
찌르고
베어서는
안됩니다.
죽여놓고
거짓으로
참회하는
어처구니 없는
분노의 대상이
아닌 다시 사람의
기초로 돌아가는
인륜(人倫)의
세상이길
기도드립니다.
목을 베는 것이
아닌 목을 축일 수
있는 음료를
건네는 마음에서
우리의 두 눈은
더욱 깨끗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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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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