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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문명의 고향
아크로폴리스(Acropolis in Gre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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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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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 아레이오스 파고스 복원도, 레오 폰 클렌체, 1846년 |
신과 인간이 만나는 곳,
제의의 숭배지로 늘 존중 받았던 곳,
서구 민주주의의 산실,
고대 그리스 예술의 절정···
유네스코는
아크로폴리스가 세계문화유산의
이상을 상징한다며
세계문화유산 1호로 지정했다.
건축 중 으뜸으로 칭송되며
유럽 문화 자체로 여겨질 정도이다.
기원전 660년경
그리스인들은 목재와 점토 대신
돌로 신전을 지었다.
최초의 신전 건축 이후
150년이 지난 뒤
파르테논신전이
아크로폴리스에 건설되면서
그리스 신전은 고전적인 모습을 확립했다.
아크로폴리스의 대표적 문화유산은
뭐니 뭐니 해도 파르테논신전이다.
파르테논신전은
아테네의 수호신이자
지혜, 전쟁, 기술의 신인
‘아테나 파르테노스(처녀신 아테나)’를
모시던 신전으로,
서양 문명의 뿌리가 되는
고대 그리스 문명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유적 중 하나이다.
유네스코의 마크가
바로 이 신전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사실만 보아도
이 신전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직접 찾아가본 사람은 물론이고
가보지 않은 사람들의 기억에도
그 모습이 뚜렷이 박혀 있는
이 신전은 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건물이다.
지금은 기둥과 보만 남아 있지만
원래 그 건축적, 조형적 완성도가 빼어나서
서양 건축사에서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에 우뚝 솟은 파르테논신전은
아테네 시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데
멀리서 보면
공중에 가볍게 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가까이 갈수록 웅장하다.
아크로폴리스 일대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한때 미케네인들이
요새를 설치했던 곳이었다.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뒤
그리스 여러 도시국가들과
델로스 동맹을 맺은 후
그 여세를 몰아 바위 언덕 위에
파르테논신전 건설을 추진했다.
아테네는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당대의 강자 페르시아를 물리치면서
강력한 실세로 부상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 후
아테네에 결정적인 위기가 온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
(Xerxes I, 기원전 519~465)가
15만 명의 병력과
400~500척의 함선
[헤로도토스(Herodotos)는
보병 170만, 기병 8만, 함선 1200척 및
근로인원을 포함하여
총 500만이라고 기록]이라는
사상 최대의 군사력을 동원해
그리스를 침략했다.
페르시아 대군이 파죽지세로
그리스 본토를 휩쓸면서 들어왔을 때
아테네인들은 델포이신전의
신탁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러나 신탁은 놀랍게도
강력한 적과 싸우지 말고
도망가라고 했다.
이는 아테네로 하여금
자신들이 지켜온 도시를
포기하라는 것을 뜻하므로
아테네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아테네인들은 또다시
델포이신전으로 가서
보다 더 믿음직한 신탁을
내려달라고 했다.
아테네인들의 간청을 받아들인
델포이신전 신탁소는
이번에는 무조건 도망가라는
말을 철회하고
나무로 된 성벽에 의존하라고 했다.
테미스토클레스
(Themistocles, 기원전 528~462)는
이 신탁을 따라
철수하지 않고
선박을 제조한 후
페르시아와의 전투(살라미스해전)에서
승리했다.
그리스 중부 파르나소스산에 있는
델포이신전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던
신성한 공간이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중대사를 결정할 때면
이곳에서 신의 뜻을 묻곤 했다.
델포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중립지대로 존속했고
많은 도시국가들은
이 신전에 귀중품을 헌납했다.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자
그리스 도시들은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보호 동맹(아티카 해상 동맹
또는 델로스 동맹)을 맺었다.
동맹국의 시민들이
엄청난 세금을 내는 대가로
아테네가 군사적 위협을 당하는
모든 동맹국을 보호한다는 내용이었다.
동맹본부와 기금금고는
이오니아인의 성지
델로스 섬에 설치했다.
페리클레스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그는 아테네 민주주의를 창안하며
아테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는데
‘지상의 제우스’로 불리기도 했다.
그리스 여러 도시국가들과
델로스 동맹을 맺고
동맹의 기금을 델로스섬에서
아테네로 옮기며
도시국가들을
사실상 아테네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파르테논신전 공사와
아테네 미화 사업을 이끌었다.
기원전 454년
아테네는 델로스에 있던
동맹본부와 기금금고를
아테네로 옮겼는데
기금을 관리하고
동맹을 이끌 수 있는
거대한 신전이 필요했다.
명목상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된
아크로폴리스에
페르시아를 물리친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 파르테노스에게
바치는 파르테논신전을
건설하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도시국가들은
아테네인들의 신전 건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파르테논신전 건설이
세속적인 명예심과 정치적인 계산 등
불경한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또한 동맹국들은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해군력 증강이 아니라
아테네의 신을 숭배하기 위해
거대한 기념물을 짓는다는 것을
탐탁하게 여길 수 없었다.
하지만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
(Perikles, 기원전 495~429)는
건축위원회의 의장 자리를 맡아서
신전 건축을 강행했다.
그는 ‘돈은 내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것이다.
약속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며 반대자들을 달랬다.
건축가 익티노스와
공사 전체를 감독한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페리클레스를 도왔다.
페리클레스가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한 일은
당시 건축 중이던
옛날 파르테논신전을
헐어내는 것이었다.
아테네인들은 모든 면에서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신전을 건설하려고 했다.
우선 풍부한 건축 비용
(약 5톤의 은)을 바탕으로
조각상과 거대한 신전을 구상했다.
건축은 기원전 447년에 시작되었고
당시로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짧은 기간인 15년 만에 완공되었다.
① 파르테논신전
② 아르테미스-브라우로니아신전
③ 아테나-니케신전
④ 프로필라이아
⑤ 아테나 프로마코스 상
⑥ 옛 파르테논신전 터
⑦ 에레크테이온신전
⑧ 제우스-폴리에우스신전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입구는
언덕 오른쪽(서쪽) 끝에 있다.
이곳으로 가는 길목에
아레오파구스(Areopagus)라고 불리는
조그만 바위산이 있는데
고대 아테네의 재판소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성 바울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기독교를 설교했다고 한다.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할 수 있는
프로필라이아(propylaea)는
건축가 므네시클레스(Mnesicles)가
파르테논과 ‘비교’되어 생기는
여러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이 건물을 바라볼 때
시선이 자연히 ‘아래를 향하게’
설계했다.
가파른 계단과
좌우 날개에 있는 건물
그리고 줄을 맞춰 서 있는
기둥들의 우아함은
아크로폴리스라는
신성한 공간을 강조한다
이곳을 통과하면
그리스의 영광을 상징하는
파르테논신전이 위용을 드러낸다.
그리스 신전의 겉모습을 보면
수직선과 수평선의 구조가 뚜렷하며
주로 직선의 형태를
많이 드러내고 있다.
건물은 밑에서부터
건물을 받치는 기단,
일정하게 배열된 기둥(열주),
기둥이 받치고 있는
엔타블러처(entablature),
박공 양식의 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열주는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의
세 가지 양식으로 표현됐다.
지붕은 양 옆으로 비스듬히 경사진
八자 형태로
우리나라의 맞배지붕
형식과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목재로 지붕틀을 만들고
그 위에 기와를 얹었으며
정면에서 봤을 때
가로와 세로(높이)의 비율이
7(혹은 8): 1 정도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파르테논신전은
그리스의 신전 건축양식에 따라
정면 너비 31미터에
옆면 70미터인 기단 위에
정면은 여덟 개,
측면은 열일곱 개의 기둥이 들어선
신전 홀이 세워졌다.
새로운 신전은
옛 신전(구 파르테논)과
다소 달랐는데
그리스 초기시대 양식에서
고전양식으로의 변화를 상징한다.
구 파르테논신전은
정면 기둥 여섯 개와
측면 기둥 열여섯 개를 갖춤으로써
길고 좁은 형태를 지니는
그리스 초기시대 양식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새로 지은 신전은
이와 달리
고전양식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1 대 2(+1)였다.
기둥은 도리스양식으로
기둥받침대 없이
직접 기단 위에 세워졌다.
기둥들의 밑 부분 지름은
1.9미터,
높이는 정확하게
10.5미터이며
기둥 축 사이의 간격은
4.5미터이다.
건물 모퉁이에 세워진 기둥들은
약 5센티미터를 강화했고
기둥 축 간격은
60센티미터 정도를 더욱 좁혔다.
기둥 위에는
3.3미터 높이의 가로대를 설치하고
양쪽 정면부에
각기 삼각형 합각머리를 올렸다.
신전 건축보다 다소 늦은
기원전 432년에 완성된
조각품은 신전 건물만큼 중요하다.
신상 안치소에
황금과 상아로 된 10미터 높이의
아테나 여신상이 들어갔다.
그림이 들어가는 벽면인
92개의 메토프
(metope, 그 중 41개만 남아 있다)에는
신화의 장면들과
아테네와 연관된
역사적 전투장면들이 그려졌다.
올림포스 신들이
거인들과 싸우는 장면,
켄타우로스 전투,
트로이 전투,
마라톤 전투 등이다.
신상 안치소 바깥 벽면 위에 그려진
수평장식띠 벽면에는
아테나 여신 축제의 장면들을 묘사했다.
서쪽 합각머리에는
아테나와 포세이돈이
아티카 땅을 두고 벌이는
전투 장면이 그려졌고
신상 안치소 입구 위쪽에는
아테나 여신이
제우스의 머리에서
탄생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당시 아테나 여신상은
상아와 금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566년 이후
아테나 여신을 기리는 축제가
4년마다 열렸고
수많은 소녀상(코라이)들이
여신에게 봉헌되었다.
파르테논신전의 4면을 두르는
프리즈에 삽입된
아테나 여신 대축제 행렬 장면에는
등장인물이 착용하고 있는
옷주름과, 보석, 헤어스타일,
얼굴 표정, 사소한 몸동작까지
자세히 묘사돼 있어
인물들의 심리상태까지 알 수 있다.
이들 조각은
페이디아스와
그의 작업실 생도들의
작품으로 알려지는데
그들이 인간의 육체와 심리를
그야말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착시현상을 교정하기 위한
아테네인들의 건축 솜씨는 놀랄 만하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우뚝 솟은 파르테논신전을 얼핏 보면
동일한 굵기의 기둥이
동일한 간격으로 배치된
직사각형의 ‘반듯한’ 건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와 매우 다르다.
우선 가장자리 기둥은
가운데 기둥보다
좁은 간격으로 세워져 있다.
가장자리는 180센티미터,
가운데는 240센티미터 간격이다.
이처럼 불균형하게 건설한 이유는
동일한 굵기로 만든 기둥을
동일한 간격으로 세우면
건물이 직사각형이 아니라
위나 옆으로 퍼져 보이기 때문이다.
63빌딩 앞에서
꼭대기를 쳐다볼 때
건물이 넘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과 비슷하다.
숭례문이나 궁전도
이러한 구도로 건설되었다.
31×70미터의 기단은
살짝 올려
가벼운 아치 형태로 만들었는데
긴 변의 가운데가
모서리보다 11센티미터,
정면부 중앙이
모서리보다 6센티미터 높다.
수치적으로 정확하게 건설된 수평선은
실제로는 중앙 부분이
처진 듯이 보이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거대한 돌들을 맞추어 나가면서
중앙부를 약간 들어 올린 것이다.
파르테논신전에는
수학적으로 정확한
수평선이나 수직선이 전혀 없다.
당연히 정확한 직각도 없다.
기둥들은 7센티미터,
코너에서는 10센티미터씩
수직선을 벗어나
가운데 쪽으로 기우는데
이 굴곡이 가로대까지
그대로 전달된다.
기둥은 위로 갈수록
가늘어진다.
바닥 부분의 지름은
약 180센티미터이지만
꼭대기 부분의 지름은
120센티미터밖에 안 된다.
파르테논신전은 총 23만 톤의 돌을 사용해
15년에 걸쳐 완공했다.
이와 같은 건물을 단기간에 건설하기 위해서는
분업이 이뤄져야 했다.
매일 70톤(기둥 하나의 무게) 이상의
석재들을 채석장에서 옮겨야 하고
(하루에 옮길 수 있는 거리)
이들을 거중기를 사용해
적소에 배치해야 했다.
학자들은 파르테논 현장에서
기둥 하나를 설치하는 데
28명이 필요하다고 계산했다.
총체적으로 9~14개의 수레,
300마리의 당나귀,
250명의 운반팀,
18~28명의 석공이
동원되었는데
이들 숫자에는 최소한
수백 명 이상이
동원되었을 채석장 인부들과
아크로폴리스까지 운반하는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프로필라이아에서 보이는
파르테논신전은
뒤쪽의 모습이고
정문은 동쪽에 있다.
원래 프로필라이아를
동쪽에 건설했어야 하나
동쪽이 높은 절벽이므로
서쪽에 세웠다고 한다.
아테나 여신상도
동쪽을 보고 있었다고 한다.
바깥 4면의 윗부분에는
여러 조각들이 장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크로폴리스에는
파르테논신전 북쪽에
에레크테이온신전이 있다.
이오니아양식의
에레크테이온신전은
페리클레스 시대에 세워졌으나
설계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포세이돈과 헤파이스토스 신에게
제사지내던
이 신전은
기둥 대신 카리아티드(Caryatid)라고
부르는 여섯 개의 처녀상이
무거운 돌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는
처녀단(處女壇)으로 유명하다.
처녀상을 만든 사람은
페이디아스의 제자
알카메네스로 추정한다.
오늘날 아크로폴리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복제 처녀상이고
원작은 대기 오염으로 인한
손상을 막기 위해
유적지 내 박물관과
대영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에레크테이온신전을
다른 위치에서 본 모습
원형의 기둥 대신
카리아티드(Caryatid)라고 하는
처녀상들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
이 처녀상을 조각한 사람은
페이디아스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신전이 있는 장소는
아테네의 수호신이 되기 위해
아테나와 포세이돈이
대결했던 곳이라고 한다.
아크로폴리스에는
지금은 볼 수 없는
건축물들이 있었다.
파르테논신전 옆의
구 파르테논신전,
아르테미스-브라우로니아신전,
하르코티키,
아테나 프로마코스의 상,
로마의 아우구스투스의 묘,
제우스-폴리에우스신전 등이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는
아크로폴리스 언덕과
그 주위에서 발견된
선사시대부터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현재 남아 있지 않은
구 파르테논신전의 유물도 있어
구 신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아크로폴리스 남쪽으로는
이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
디오니소스 극장(로마시대에 개축),
아스클레오피오스의 선전터 등이 있다.
디오니소스는
술과 연극의 신으로,
매년 이 극장을 중심으로
‘디오니소스축제’가 열렸다.
이곳에서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희극과 비극이 상연되었다.
아테네 멸망 이후에도
아크로폴리스에 대한 사랑은 계속되었다.
로마인들에게 아크로폴리스는
그리스의 철학, 정치, 미학을
배울 수 있는 학교였고 모범이었다.
파르테논신전은
기독교 교회, 이슬람 사원 등
다른 종교의 신전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거의 손상 없이 암흑기를 지나왔다.
그런데 1678년
베네치아 함대가
아크로폴리스를 포위해,
아테네를 지배하던
오스만 터키가
화약고로 사용하던
파르테논신전에
포격을 가함으로써
건물 중심부가 파괴되었다.
영국인 화가 제임스 스튜어트와
건축가 니콜라스 레베트에 의해
파르테논신전이
재발견된 이후
파르테논신전은
약탈의 수모를 겪어야 했다.
1800년 콘스탄티노플 주재
영국 대사 엘긴(Elgin)이
페이디아스가 조각한
박공부(牔栱部, pediment,
옛날에는 조각과 건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이었다)의
대부분을 떼어내어
영국으로 가져갔다.
‘엘긴 마블(엘긴의 대리석)’이라고
불리는 이 조각들은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스를 사랑한 시인 바이런
(Baron Byron, 1788~1824)은
엘긴을 약탈자이며
신전 모독자라고 비난했다.
아테네 전성기에
정치에선 페리클레스가 있었다면
예술에선 페이디아스가 있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로
칭송받는 그는
페리클레스와
절친한 사이이기도 했다.
페이디아스와
그의 뛰어난 문하생들은
파르테논신전을
최고의 조각품으로 장식했다.
파르테논신전 외벽의
상부 4면에만
길이 163미터에 이르는
프리즈 장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주재
영국대사 엘긴이
파르테논신전을 장식하던
많은 조각들을 떼어내
영국으로 가져갔는데
이들 걸작품들은
엘긴 마블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낙동강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왜관지구전승비
6.25 전쟁 때
미국 제1기병사단
(1st Cavalry Division,
United States, 第1騎兵師団)이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작전을
저지한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1959년 3월 1일에 세운 유적비.
위치 :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산 63-4번지(애국동산내)
1950년 8월초 이후
가장 치열했던 낙동강 전투에서
승리한 공을 기리기 위해
1959년
육군 제1205 건설공병단에서
건립하였다.
왜관 애국동산
왜관 가볼만한 곳
왜관은 작은 동네지만
아기자기하게 볼거리가 많은
곳이기도 해요.
오늘은 왜관 애국동산
소개를 드릴게요.
왜 애국동산일까요?
이곳이 6.25 전쟁당시
왜관 작오산(鷓鴣山) 전투지역이기도
하고 애국순열들의 희생정신,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작오산 기슭에
선열들의 추모를 위해 세워진 곳예요.
태극기 무리가 반겨주네요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오래간 만에 보는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넘 예쁘죠.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꽃
영을 기리기 위한
애국동산이라
순국의사 장진홍선생
애국지사 정행돈선생
애국시자 정행국선생 외
순국의사 및 애국지사
분들을 추모하기 위한
추모동산아라 보면돠요.
잠시나마 우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국의사 및
애국지사분들께 예를 표합니다.
애국동산 정상에 오르면
낙동강과 왜관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답니다.
날씨가 조금은 흐려서
뷰가 덜 예쁘게 나온 듯 하네요.
조금 더 위쪽에 위치한
왜관지구전승비
왜관지구전승비는
6.25 전쟁 때
미 제1기병사단이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작전을
저지한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1959년 3월31일에
세워진 것이라고 해요.
전승비 앞에서
다시 한번 내녀다 본 낙동강, 왜관
파란 하늘과 푸릇푸릇 잔디, 소나무 색이
너무 예뻐
잠시 넋을 잃고 바라 보았답니다.
왜관철교
장마기간 어느 날 비가 그친 후
잠시 바람 쐬러 간
왜관철교!
이곳은 역사적인 곳이예요.
왜관철교의 역사에 대해서
잠시 후 간략히 말씀을
드리고자해요.
왜관철교 한편에는
역사적 상징물을 기념한다는
메모리얼 파크(Memorial Park)
조형물이 있어요.
왜관철교는
일제가 1905년 군용 단선 철도로
개통한 경부선 철도교로,
한국전쟁(1950~53)시
북한군과 유얼군의 주력부대 사이
격전이 전개된
중심 지역에 있었다고 해요,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미군 제1기병사단이
경간 1개를 폭파하였는데,
이로써 북한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낙동강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북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이 철교는 한국전쟁
격전장의 중요한 상징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고,
'호국의 다리'로도 불린답니다.
철교가 건설된
지는 100년이 넘었다고 해요.
운치가 있어보이죠?.
저만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요?
사진을 넘 못찍었네요!
이제 낙동강 상류쪽을
찍어 보았어요.
날이 많이 흐려서
전체적으로 어둡게 나왔네요.
두 개의 신 교각이 보이는데요.
하나는 차도,
또 하나는 신 철교예요.
철교 아래로 낙동강을 따라
자진거 도로와 체육공원이
아주 잘 조성되어 있네요.
라이딩하시는 분들과
산책하시는 분들은
흔하게 볼 수 있어요.
덥지 않은 날씨에
사람들이
더욱 많이들 나오는 것 같은데,
저희가 방문한 시간은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네요.
칠곡 자고산(303m)~관호산성
코스 :
애국동산~자고산~왜관지구전적기념관 ~
칠곡보~관호산성~왜관철교~호국의다리
...더보기
좌로부터 구 왜관철교(인도교),
왜관교(자동자), 현 철교(열차)
구 왜관철교(인도교)
지난 주 관호토성
(백포산성) 갔다가
강건너 맞은 편에 있는
'자고산'을 올라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산도 그리 높지 않고
또 올라서서 보면
낙동강을 내려다 볼 수 있고
칠곡보까지 보일 듯 해서
탐이나는(?) 산입니다.
생각대로 자고산 꼭대기에 올라서 보니
굽이도는 낙동강이 발 아래 보입니다.
산이 높지 않아서 아쉽지만
풍경은 좋습니다.
옛날 '자고' 라는 새가 살았다 해서
자고산이라고 하고 또
작오산(鷓鴣山)이라고 한답니다.
자고새라...
자고새가 뭘까 싶어서 찾아 봤네요.
자고새
꿩과의 새
메추라기와 비슷하며
날개는 누런빛을 띤 녹색이고
등, 배, 꽁무니는 누런 갈색이다.
목에서 눈에 걸쳐
까만 고리가 둘려 있으며,
부리와 다리는 붉다.
한국, 중국, 유럽 동부 등지에
분포한다.
자고새.
(Francolinus pintodianus)
뭐 아무튼 이런 새가 살아서
자고산 이라고 했다네요.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곳엔 자고산이고,
어느 표지판엔 작오산이고...
헷갈려요)
무성아파트에서 올라 갑니다.
거의 다들 여기서부터 오르더군요.
아파트 옆에
산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계단 조금 오르면
신나는 산길이 나옵니다.
돌아보면 저 멀리
왜관역이 보입니다.
보이나요?
사진 오른쪽 위에
잘 보면 보입니다.
계단이 끝나면
걷기 좋은 흙길로 이어집니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숨이 차오네요.
이거 상당한 저질체력이 되었습니다.
산이 낮고 길이 좋아서
산을 멀리하는 사람도
어렵지않게 오를 수 있습니다...
하고 말하지만...
숨이 차요. 아... 저질체력.
무성아파트에서 올라 온 지 400미터.
그런데 다리는 태백산이라도 오른 듯
뻐근합니다. 맙소사!
거친 오르막을 오르고 나면
능선입니다.
길이 평온해지죠.
다행입니다.
이쪽 능선은 바위들이 솟아 있어서
좀 더 색다른 모습입니다.
솟아있는 바위 들에
사진기를 들이대고
한참을 찍으면서 쉬었습니다.
이럴 때 사진기가 있으면 좋아요.
사진 찍는 척하며
실컷 쉴 수 있으니까요.
조금 더 가면 헬기장이 나옵니다.
헬기는 없어요.
저기 가운데쯤 솟아있는 봉우리가
자고산 꼭대기랍니다.
그냥 평지처럼 쭉 이어지면 좋은데
또 내려갔다가 올라가야 하네요.
길은 참 좋습니다.
밟기 좋은 흙덩이들이
기분을 즐겁게 하거든요.
당연히 산에서는
이런 흙을 밟아야 하는데
언제부턴가 그렇지 못한 곳이
참 많아졌지요.
헬기장에서 내리막을 조금 가면
운동기구들이 있습니다.
나같은 사람은
여기까지 오는 것만도
운동이네요.
운동시설을 뒤로 하고
다시 꼭대기로...
춥던 날씨가
오늘은 따뜻한 햇살과 함께
많이 누그러졌습니다.
또 다행입니다.
오르다보니 평상이 하나 나옵니다.
좀 더 따뜻했으면
마실 거라도 마셔가면서
쉬면 좋겠지만...
바람이 자꾸 밀어 부칩니다.
어서 올라가라고...
길은 지루하지 않게 이어집니다.
겨울 솔잎들이 푹신하기도 하고,
내려다보는 낙동강 풍경에
숨을 고르기도 하고...
칠곡보...
여태 다녀본 보 가운데
가장 썰렁합니다.
딸린 공원이 너무 허전해서
그런가요.
뭐 앞으로 좋아지겠지요.
꼭대기를 얼마 앞두고
약간 가파른 길이 이어집니다.
저 언덕배기 넘으면 꼭대기 입니다.
아이고 죽겠네...
엊그제 새벽이 되도록
술을 마셔서 그런가
영 죽을 거 같습니다.
드디어 꼭대기 정자가 보입니다.
다 왔습니다. 꼭대기...
날이 조금 서늘했는데도
자고산에 오가는 사람이 꽤 많더군요.
온 식구가 함께 나들이 삼아
올라 오기도 합니다.
추모비가
낙동강이 잘 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6.25때 이곳은
꽤나 치열하게 전쟁을
치렀던 곳으로 이름나 있죠.
고속철도가
자고산 아래를 뚫고 지나 갑니다.
발아래로
낙동강 강물도 흐르고,
KTX 열차도 흐릅니다.
고속철도가
자고산을 뚫고 뒤쪽으로 흘러 갑니다.
자로 잰듯 그냥 일자로 뻗어 갑니다.
내려가는 길은
'흥국사' 쪽으로 잡았습니다.
아까 운동시설 있는 곳까지
내려서서 흥국사로 갑니다.
나무 뿌리가 드러나서
조심조심 가야 합니다.
이쪽에서 체육공원과 함께
우물이 하나 있네요.
마실까 싶어서 봤더니
'경고문'이 참 크게 붙어 있었습니다.
'식수 부적합... 어쩌고...'
체육공원 아래에 흥국사가 있습니다.
따뜻한 햇볕이 좋은데
바람이 제법 불어옵니다.
아, 추워요.
지난해 9월 행사 알림판이
아직도 붙어 있네요.... 흥국사!
거 괜히 어느 가수가
생각나는 절 이름이네요.
흥국사에서 내려 오면
왜관 철교쪽이 나옵니다.
자고산은 산을 멀리하는 사람도
어렵지않게 오를 수 있는 산입니다.
낮으니까요.
그렇지만 가파른 곳이
더러 있기 때문에
발이 미끌어 질 수 있으므로
그 점만 신경써서 가면 되겠네요.
어쨌든 그리 힘들지 않고
시원한 낙동강 줄기가
내려다 보이고,
칠곡보까지 볼 수 있는
좋은 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