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벵이의 천국)
집회서는 지혜서의 마지막 책이다.
가톨릭에선 정경이지만 유다교와 개신교는 외경으로 받아들인다.
기원후 90년, 랍비들은 유다교 전반에 관해 사활을 건 논의를 가졌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고 독립운동은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장소는 '텔아비브' 인근의 '얌니아'였다.
이 모임에서 집회서는 외경으로 분류된다.
역으로 말하면 90년 이전에는 정경이었는데 90년 이후부터 외경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자 집회서는 관심 밖으로 밀려 났다.
하지만 내용은 희랍어로 번역되어 남아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집회서는 희랍어가 원문이다.
이곳에서는 성경 이름을 '시라의 아들 예수의 지혜'라고 했다.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에서는 에끌레시아스티쿠스'란 이름을 붙였다.
'모임의 책'이란 뜻이다.
우리말의 명칭도 여기서 유래한다.
집회에서 사용하는 책이란 의미다.
한편 초기교회는 집회서를 '예비자 교리서'로 사용했고 입교자를 위한 재교육 자료로 활용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여전히 비중 있는 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집회서 끝에는 '시라의 아들 예수의 지혜'(50.27)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처럼 작가가 자신을 드러낸 구약성경은 집회서가 유일하다.
물론 예언서를 제외한 경우다.
저자인 '시라의 아들(벤 시라)은 젊은 시절부터 율법에 충실했고
지혜의 탐구를 위해 학교도 세웠으며(집회 51.23) 만남과 경험을 통해 숱한 교훈을 체득한 인물이다.
외국생활도 오래했는데 관직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집회 39.4)
아무튼 그는 말년에 평생의 체험을 글로 남겼는데 이것이 집회서다.
벤 시라가 활약할 당시 이스라엘은 그리스의 지배하에 있었다.
백성들은 조금씩 희랍문화에 젖어 갔고 자국문화는 등한시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통치자인 '셀레우코스'왕조는 이스라엘의 종교와 전통을 멸시했기에 민중은 위축되었고
선민의식은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벤 시라는 '유다이즘'의 위대성과 '헬레니즘'의 위험을 알리려 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조상들의 전통과 지혜를 계속 발굴해 소개했다.
그러면서 개인적 체험을 덧붙여 자신의 주장을 심화시켜 나갔다.
이렇게 해서 집회서는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벤 시라'는 유대사회의 전통과 현실을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모법답안을 남겼던 것이다.
집회서의 가장 큰 주제는 '주님을 경외함'이다.
하느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율법에 대한 충성이며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이 경외심 안에서 모든 질문을 찾자는 것이 벤 시라의 가르침 이었다.
~ 신은근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