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명 ; 6월 108순례
일자 ; 2019, 6, 23
장소 ; 김제 모악산 금산사
불교의 세계관에서 부처님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곳인 수미산 정상에 계신다고 상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을 뵈러 간다는 것은 높디높은 수미산을 올라가는 여정입니다
금강문 ;
일주문과 사천왕문 사이에 있으며 금강문 안에는 금강역사가 눈을 부럽뜨고 지나가는 중생을
지켜 봅니다 보통 법당쪽에서 볼때 왼쪽에 계신분이 나라연금강이고 오른쪽에 계신분이 밀적금강
입니다 나라연금강은 코끼리 백마리나 되는 힘을 가지고 "아"하고 입을 벌리고 있고
밀적금강은 금강저를 들고 있으며 항상 부처님을 호위하는 야차신의 우두머리로서 "흠"하고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사천왕문 ;
사천왕은 수미산 중턱에 걸친 사천왕천에 사는 천신이였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감복하여
불법을 지키는 호법신장으로 거듭난 이들입니다
각각 동남서북을 지키는데 동쪽은 지국천왕, 남쪽은 증장천왕, 서쪽은 광목천왕, 북쪽은 다문천왕이 지키고 있습니다
대적광전 ;
우리나라 법당 가운데 규모가 큰 편에 속하나 1986년 불에 타서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장대석기단 위에 세워진 앞면 7칸, 옆면 4칸의 단층팔작지붕 건물이다. 앞면의 7칸에는 모두 빗살 무늬로 장식된 두 짝 열개문을 달았는데 중앙칸만 출입문이고 나머지는 밑부분에 머름(미닫이 문지방이나 벽아래 중방에 대는 널조각)을 설치한 광창이다. 옆면은 4칸으로 제일 앞쪽 툇간에 한 짝 출입문을 달아 사용했고 나머지는 회벽으로 위쪽에 인방을 가로질렀다. 공포는 내외이출목이며 다포계 공포구성의 전형에서 벗어나 있다. 공간포도 넓은 주간에 1개씩만 두어 특수한 구조로 보이는데 중앙칸만은 공간포를 2개 두었다.
건물 내부에는 바닥에 마루를 깔고 뒷면에 6개의 기둥을 세운 뒤 그 기둥 사이를 후불벽으로 만들었다. 그앞에 불단을 설치하고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 2구씩 모두 5구의 불좌상과 그 사이에 보살입상 6구를 안치했는데 이러한 불상의 배치는 매우 독특하다. 그위에는 닫집을 설치했다. 대들보는 둥그스름하게 다듬어졌는데 좌우측면 평주에서 충량이 3개씩 올라가 대들보에 걸리게 하였다.
충량의 형태가 곡선으로 된 점이 특이하며 건물의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나약한 맛을 갖게 한다. 천장은 불단 바로 위를 1단 더 높이고 가장자리는 대들보 위 충량 위쪽에 붙여 반자를 꾸며 전체적으로 층급천장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건물내부는 낮고 가득찬 느낌을 주고, 건물외부의 정면관도 낮고 옆으로 길게 전개되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이 건물은 1705년에 기록된 〈금산사사적〉에서 이름을 찾아볼 수 없어서 그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생각되며 18세기경의 건축으로 추정된다.
미륵전 ;
국보 제62호.
당시의 불상은 1597년 정유재란 때 건물과 함께 소실된 후 1627년(인조 5) 소조삼존상을 조성하였다.
현건물은 1601년부터 1635년 사이에 수문에 의해 재건된 뒤 4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층은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은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은 미륵전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의 규모는 1층이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약 79평, 2층은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약 50평, 3층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약 28평 가량 된다.
건물은 총높이가 20m 가량 되는 3층인데 내부는 통층으로 거대한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당초부터 계획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구방식은 1층에 고주 4개와 20개의 변주(邊柱)를 세워 이들 사이에는 굵직한 퇴보를 걸고, 그위에 2층 변주를 세우고 이를 다시 고주와 퇴보로 결구하였다. 3층은 고주가 그대로 우주(隅柱)가 되고 그위에 지붕을 올렸다.
이와 같은 가구방식은 문루나 목조탑파에서 많이 쓰이는 방법이다. 공포는 내외이출목으로 외부첨차는 쇠서[牛舌], 내부는 운궁(雲宮)을 기본으로 여러 차례 중수됨에 따라 초가지형태나 공포짜임새에 변화된 모습이 혼재되어 있다. 1층에서는 평방 위에 공포를 올렸으나 2층 이상에는 창방(昌枋) 위에 바로 공포를 배열했다.
높이 본존상 11.82m, 좌우협시보살상 8.79m. 〈금산사사적〉에 의하면 미륵전 안에는 764년(경덕왕 23) 진표율사의 시주에 의해 766년(혜공왕 2) 완성된 미륵불상만 있었다고 한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이 불상이 타버리자 1627년(인조 5) 수문대사가 조성한 소조삼존상이 모셔졌으며, 1934년 삼존상 중 본존상이 실화로 타버리자 1938년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본존상은 기본적으로 통일신라 불상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그 기법이나 마무리솜씨에 근대조각의 요소가 가미된 상이라 할 수 있는데 현재 불단 밑에는 신라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청동대좌가 남아 있다.
본존불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앞으로 보이고 있으며 왼손은 앞으로 내밀어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오므리고 있는데, 시무외·여원인의 변형인 듯하다. 얼굴은 풍만한 네모형이며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신체에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있는데 옷주름은 몸을 따라가며 부드러운 선을 이루고 있다. 특히 양다리 위에 옷을 밀착시켜 옷주름을 생략함으로써 신체의 볼륨감을 강조하였다. 좌우협시보살상이 입상인 점은 예외적이나 명칭을 알 수 있는 도상적인 특징이 없다. 네모난 얼굴형이며 복잡하게 장식된 보관의 형태 등이 조선 후기 보살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두 보살상은 손 모양만 좌우대칭이며 장식이나 천의형식이 거의 동일하다. 손 모양은 시무외·여원인의 변형으로 앞으로 내민 손이나 위로 들어올린 손이 모두 자연스럽게 반쯤 오므려진 형태이다. 어깨를 덮고 팔을 돌아내린 천의나 배와 다리 위로 U자형 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린 옷자락이 무겁고 다소 번잡한 느낌을 준다. 그밖에 가슴 위의 천의 양쪽에 있는 보주형 장식은 조선 후기 불화의 보살상 표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참고 ; 다음카페 금산사 백과사전)
제243기 법우님들이 사찰에 배치된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문화해설사는 군에서 지원되는 인력이며 월급을 받는 분들입니다
문화해설을 하시는 분 중에 기독교인도 있으며
불교의 유적이나 유물에 대하여 깊은 이해력이 없습니다
방등계단에 있는 탑의 상륜부를 질문하였드니 부처님이 연꽃위에 앉아계신 것을 표현한 것이라는 동문서답을 하였습니다
불자라면 가능한 절에 소속된 포교사들이 해설을 해 주고있으니 불교문화해설팀을 찿아가
해설을 부탁해 주기를 바람니다
방등계단 ;
금산사 경내 대적광전 오른쪽, 미륵전의 왼쪽으로 높은 대상(臺上)에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이 고려 전기에 조성된 오층석탑과 나란히 있다. 구조는 상하 2단의 정방형 기단 위에 석종형 사리탑을 놓은 모습이다. 하층기단은 한 변의 길이가 1,250㎝, 높이가 80㎝이며 상층기단은 길이가 850㎝, 높이가 60㎝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이다. 기단의 외곽에 길쭉한 석재를 이어 붙여 사리탑의 경계를 두르고 그 안쪽에 사리탑을 축조하였다. 기단 면석마다 고려시대의 기법이 잘 표현된 불상과 신장상을 돋을새김하였는데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다. 하층기단의 3면에는 난간을 둘렀던 것으로 보이는 석주가 남아 있는데, 인왕상으로 보인다. 난간의 사방 모서리 위치에는 사천왕상을 세워, 기단 영역의 내부가 성스러운 공간임을 암시하고 있다.
계단의 중앙부에는 한 장의 판돌을 깔아 사리탑의 탑신받침으로 삼았다. 탑신받침의 네 모서리에는 사자머리를 새겨 놓았으며 돌판 한가운데에는 연꽃잎을 둥그렇게 새겨 두르고 그 안쪽 테두리에 맞추어 탑신을 받치고 있다. 탑신은 날씬한 종모양이며 아래쪽에는 꽃무늬를 장식한 띠를 새겼고 꼭대기에는 아홉 개의 용머리가 밖을 향하도록 조각하였다. 이는 통도사 금강계단에는 없는 것이다. 구룡의 머리 위로는 연꽃무늬를 장식한 앙화를 얹고 그 위로는 위아래가 납작한 공 모양의 복발을 놓고 맨 위에 연꽃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얹어 놓았다.
부자 소나무
장소 ; 완주 추졸산 위봉사
가파를 추, 험난할 줄, 메 산
추졸산은 524미터이며 산세가 험준하다 하였으나 사찰에서 볼때는 아닌것 같기도 하지만
위봉폭포가 있어 경치는 장엄하다고 합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 말사
전주 인근 사찰이며 추졸산 아래 위봉산성 내에 있음
창건 ;
백제 무왕5년(604년)서암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고려 말 완주로 이사 온 경주최씨 후손인 최용각이 말을 타고 산천을
누비다 높은 산에 이르러 남쪽을 바라보니 세 마리의 봉황이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라 경주최씨의 원찰로 창건하고 위봉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위봉사 부근에는 경주최씨의 묘소와 제실이 있으며 최용각에게는 세아들이 있었는데 출세하여 유명인이 되었답니다)
고려 공민왕 (1359년)때 나웅선사가 중창하고
세조12년 (1466년)선석대사와 석잠대사가 중수논의 후 60년 만에 극락전을 중수하였으나
정유재란(1597년)때 소실 되었으며
숙종 원년(1675년) 전주 경기전에 묘서 진 태조어진을 보호하기 위하여
위봉산성을 축조하고 행궁을 지어 묘셨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사찰이였으나 쇠락하여 어진을 묘시기 어려워 위봉사 대웅전에 묘시다 산내암자 태조암을 건립하고 영정을 묘셨다
1911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모든 사찰을 정비 구획하면서 31본산의
하나로 금산사, 송광사 등 46개 사찰을 관장하는 위상을 가진 사찰이기도 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황폐화 되고
1986년부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圍봉사 조선시대에는 威봉사로 바뀌었고
천왕문, 봉서류 (지장전), 보광명전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었고 보광명전
주위에 관음전, 요사체 , 나한전, 심검당이 있습니다
보광명전 (보물 608호)
건축 수법으로 보아 17세기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보광명전이란 현판은 조선 순조 28년(1828년)에 쓴 것이다
정면 3칸 측면3칸 팔짝지붕 다포형식이다
불단위에는 운룡과 여의주 모양의 구슬이 장식된 닫집이 있으며
불상 뒤쪽에는 백의관세음보살이 있고 불상 왼쪽 벽체에는 악기를 든 선녀를 비롯한 여러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보광명전에는 비로자나불을 묘셨는데 한국전쟁 때 불상이 다른 절로
이전되고 석가 삼존불(석가불, 문수,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나웅선사 (1320~1376년)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제2부로 이어집ㄴ
2019, 6, 23
상원 변광수 (기자단장)
첫댓글 관세음보살 찬탄합니다 관세음보살 고맙습니다
거룩한 순례~축하드립니다
은혜로우신 부처님들 대박 으샤으샤
관세음보살 _()_
상원기자 단장님~
요리조리~ 여러방향으로 포즈 취하라며 최대한 이쁘게 찍어 주실려고 애쓰시는 모습에 무한 감동~~~
감사했습니다~~*^.^*
피곤하실텐데 늦은 시간까지 값진 사진들 고맙습니다
즐감하고 퍼갑니다~~^^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
상원 기자단장님
발빠르고
정교한 사진 감사 합니다.
상원 단장님 더운날시에,고생하셨습니다,덕분입니다,
존경합니다,()()(),선배님
감사합니다고맙습니다
항상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관세음보
살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
참좋은 불교 인연입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
관세음보살 ()()()
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참 좋은 인연에 감사드립니다 관세음보살 ()()()
상원기자 단장님~^^
넘 멋지게 나왔네요
감사합니다 넘 멋져요. 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
고맙습니다~^^
참 좋은 인연입니다. 관세음보살 ()()()
상원단장님 사찰문화해설까지
덕분에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위봉사 설명 중
"고려 말 완주로 이사 온 경주최씨 후손인 최용각이 말을 타고 산천을 ---" 이 부분에서
경주최씨 후손이라 하셨는데, 이분은
全州崔氏 文成公系 시조 문성공의 둘째 아들 崔龍角(최용각: 시호는 文忠公, 고려 보문각 대제학 검교 대호군)으로
현재 위봉사 인근인 동상면 대아리(대아저수지: 대아저수로 986-66)에 그분의 묘소가 모셔져 있답니다.
아래 사진이 대호군공 최용각 선영입니다.(사진을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붙임글에 대하여 오해는 없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