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의 외교
스탈린의 바자회, 만약 이념이 외교정책으로 결정된다면 히틀러와 스탈린은 절대로 손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통의 지정학적 이해관계는 강력한 결합 요인이었고, 숙적인 히틀러와 스탈린은 거침없이 가까워졌다. 스탈린의 보헤미안식 업무 습관과 변덕스러운 성격이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침에 따라 히틀러는 발작적이고 어설픈 모습을 보였다. 스탈린은 어릴 때 배운 종교교육의 이념에 따라 볼세키 세계관을 무자비하게 해석했고 정치적 통제 수단으로 변질시켰다.
스탈린의 행동은 자유를 유지할 것이며 어떤 전쟁이 임박했건 간에 소련에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국가에 소련이 호의를 제공할 것이라는 자신의 결의를 드러냈다. 스탈린은“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게 하는 데 익숙한 전쟁광들의 싸움에 우리나라가 끌려 들어가지 않도록 유의하겠다.”라는 말로 다짐했다. 히틀러는 1935년 재무장을 했고, 1936년에는 라인란트를 재점령했으며,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를 점령했고, 1939년에는 폴란드를 공격했다. 그리고 1940년에 프랑스를 침공한다.
일본은 1931년 만주를 침공했고 중국에서 만주를 떼어내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일본을 응징하려는 미국은 독자 제도를 도입했다. 10년 후 루스벨트의 손에서 일본과 대결을 한다. 루스벨트는 1941년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점령한 것에 대한 응징으로 일본과의 통상조약을 폐기했다. 일본에 대한 고철 판매도 중지했다. 네덜란드 망명정부 동인도에 일본에 석유 수출을 중단하라고 권고했다. 그리고 미국의 대일본 협상단에게 만주를 포함한 모든 점령지를 포기하라고 훈령을 하달했다. 루스벨트도 일본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다고 봤다.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러일전쟁’ 방식을 따라 기습 공격한다. 진주만의 태평양 함대는 상당 부분이 파괴됐고, 일본과 이탈리아와 ‘삼국 조약’에 가담한 히틀러는 미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제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지중해에 러시아 차르의 휴양지 ‘알타’의 궁전에서 회담이 열린다. 여기서 스탈린이 독일군 장교 5만 명을 처형하자고 주장하자 처칠은 회담장을 박차고 나간다. 스탈린이 농담이라고 한 발언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단다. 1944년 6월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해서 독일의 운명을 확정하였다. 얄타 회담이 끝났을 때 전시 동맹의 단결만이 축하받았다. ‘헨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코스모폴리탄’적인 미국 동북부 기득권층의 가문 일원이었다. 투르먼은 중서부 시골 중산층 출신이다. 루스벨트는 사립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왔다.
포츠담 회담은 귀머거리들 간의 대화로 변질되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세력권을 굳히겠다고 고집했다. 트루머먼과 처칠도 자신들의 원칙에 대한 정당화를 요구했다. 스탈린은 소련이 이탈리아를 승인하는 대신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에 소련이 수립한 정부를 서방이 승인하는 식의 맞교환을 시도했다. 그러는 와중에 스탈린은 동유럽에서 자유선거를 실시하라는 민주주의 국가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첫 2년 동안은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만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수립했다. 나중에 소련의 위성국이 된 나머지 다섯 나라인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는 연립정부 체제였고, 공산당이 아무런 도전을 안 받는 수준은 아니었다.
NATO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평시 군사동맹이었다. 소련에 대한 동 유럽국의 충성이 조금이라도 ‘민족주의적’ 감정을 품고 있다면 숙청당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건국자의 아들이자 비공산주의자인 외교, 장관이 집무실 창문에서 떠밀려 떨어져 죽었다. 10년 뒤에 프라하에서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이 조직되는 상징이 되었다. 잔혹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쿠데타는 소련이 유사한 다른 권력 찬탈을 후원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일깨웠다.
봉쇄정책의 딜레마, 한국전쟁
개별사례에서 소련은 미국과 맞붙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소련이 지중해로 침입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그리스-터키 원조가 제시되었고, 소련이 서유럽 공격에 대비하여 NATO가 설립되었다. 그러다 1950년 6월 25일 봉쇄정책의 애매한 상황과 마주했다. 미국 정부가 자국 방어선 밖에 한국이 있다고 선언하고 군대를 철수시킨 국가에서 공산주의 대리국에 의해 침략을 당한 것이다. 침략국은 북한이고 피해국은 한국이었다.
모스크바와 평양의 공산주의자들은 한국을 미국의 방어선 밖에 놓았다는 미국의 발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반도의 나머지 절반을 차지해도 미국이 저항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의 이익 측면에서 분석했고, 미국이 아시아 본토 대부분을 공산주의자에 양보한 상황에서 굳이 한반도의 끝을 놓고 저항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보았다. 반면 미국은 원칙적 측면에 이런 도전을 인식했고, 한국의 지정학적 중요성보다는 공산주의 세력의 침략이 아무런 저지 없이 허용된다는 상징성에 관심이 더 컸다.
1949년 중공 공산당은 국공내전에 승리하고 중국을 접수했다. 북한의 남침이 성공한다면 좁은 동해 너머에 있는 일본에도 재앙과 같은 충격이 닥칠 것이다. 북한군이 38선을 통과한 6월 27일 트루먼은 미 공군과 해군에 ‘전투 행동’ 개시를 명령했다. 6월 30일 일본에서 지상군 병력이 투입되었다. 소련이 경직된 태도를 보여서 미국이 전쟁으로 끌고 가기가 수월했다. 한국전쟁의 미국 개입을 미국의 국익이 아닌 보편적 원칙의 수호로 설명했다. “국제문제에 무력의 지배가 다시 시작된다면 그 여파가 광범위할 것입니다. 미국은 계속해서 법의 지배가 다시 시작된다면 그 여파가 광범위할 것입니다. 미국은 계속해서 법의 지배를 수호할 것입니다.” 이익이 아닌 원칙을 미국은 베트남 전쟁과 걸프전쟁까지 계속 개입 논거에서 신성불가침한 신조로 발표한다.
트루먼 행정부의 한국전쟁이 정치적 목표에 있어서는 너무 큰 전쟁이었고, 미국의 전략적 독트린에 있어서는 너무 작은 전쟁이기 때문에 악몽이었다. 맥아더는 중국과 전쟁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을 놓고 결판을 내려고 했던 반면, 트루먼 행정부는 봉쇄정책 이론이 상정하는 유럽에 대한 소련의 공세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의 힘을 비축하려고 했다. 한국전쟁은 그리하여 봉쇄정책의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냈다. 전통적 국가 운영 관점에서 한국은 당시 형성 중에 경합하는 두 세력권의 경계선을 결정하는 시험 사례였다.
한국전쟁의 가장 큰 패배자는 미국 지도자들이 이 전쟁 계획 전채를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생각했던 나라인 소련으로 드러났다. 한국이 침공당하고 2년 안에 미국은 전 지구적 분할선의 자기 쪽 진영을 동원했다. 미국은 국방예산을 세 배로 늘렸고 대서양 동맹을 정치적 연합체부터 미국 최고사령관이 이끄는 통합된 군사 조직으로 변화시켰다. 독일의 재무장이 가시권에 들어왔고 유럽군을 창설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중유럽의 소련군 앞에 존재했던 공백이 채워졌다. 소년은 손실을 줄이려고 인도차이나와 같은 곳에서 공산주의 세력들의 모험을 부추기는 측면에서 자신들의 성공 여부를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에 미국의 동맹국들이 재무장하고 단결을 강화했기 때문에 소련은 동원된 세력균형이 상당히 기울어진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제2차 대전이 종료된, 20년 후 미국은 세계의 파편들을 모아 국제질서를 구축하는 데 앞장섰다. 미국은 유럽을 재활시켰고, 일본을 복원했으며, 그리스 터기, 베를린, 한국에서 공산주의의 팽창을 제압했고, 최초로 평시에 동맹을 체결했으며, 개도국 세계에 기술원조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미국의 우산 밑에 있던 나라들은 평화와 번영, 안정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인도차이나에서 미국이 기존에 해왔던 모든 해외기업 패턴이 산산조각 났다고 필자 헨리 키신저가 주장한다.
2024.01.21.
헨리 키신저의 외교-3rd
헨리 키신저 지음
김성호 옮김
김앤김북스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