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해체사 / 박위훈
만년의 잠영을 끝낸 밍크고래가
구룡포 부둣가에 누워있다
바위판화 속 바래어가는 이름이나
부두를 들었다 놓던 칼잡이의 춤사위이거나
잊히는 일만큼 쓸쓸한 것은 없다
허연 배를 드러낸 저 바다 한 채,
숨구멍이 표적이 되었거나
날짜변경선의 시차를 오독했을지도 모를 일
고래좌에 오르지 못한 고래의 눈이
칼잡이의 퀭한 눈을 닮았다
피 맛 대신 녹으로 연명하던 칼이
주검의 피비린내를 잘게 토막 낼 때면
동해를 통째로 발라놓을 것 같았다
조문은 한 점 고깃덩이나 원할 뿐
고래의 실직이나 사인은 외면했다
주검을 주검으로만 해석했기에 버텨온 날들이
상처의 내성처럼 가뭇없다
바다가 고래의 난 자리를 소금기로 채울 동안
고래좌는 내내 환상통을 앓는다
테트라포트의 느린 시간을 낚는다
주검의 공범인 폐그물도 인연이라고
수장된 꿈과 비명 몇 숨 그물에서 떼어내자
반짝, 고래좌에 별 하나 돋는다
바다의 정수리
늙은 고래의 흐린 동공에 맺힌 달,
조등이다
어둠의 샅에 귀 하나 새겨 넣고 / 박위훈
발라진 울음이 낮다
한 부음이 자정의 담장을 넘는다
귀를 버린 내게 들리는 핏빛 이명
닳아 쉬어 터진 음정을 재생하는 엘피판처럼 어둠은
등을 맞댈수록 무딘 가시를 곧추세웠다
어떤 관절은 새소리를 달여 무릎이 서고
새벽은 음식물 봉투 속 불은 라면 면발을 딛고 온다
이슬의 찬 독배를 마신 돌배나무가
밤의 태엽을 나이테에 감으며 알려주던
당신의 적소(適所)에서부터 어둠이 시작됐다는 말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는 허기이거나 어떤 소외
식어 화석이 된 심장에 온기가 돋듯
활처럼 휜 허기가 어둠의 거푸집을 할퀼 때
달무리를 감싼 주검의 문양을 보았다
부패된 귀로는 새를 부를 수 없어
어둠의 샅에 귀 하나 새겨 넣고 너를 듣는 밤
나이테에 감기는 비명을 사뿐, 물고 가파른 어둠을 딛는
나는, 곤줄박이 노래만큼 높은 것 없다며
발톱을 감춘 나는
야옹이다
*시집/ 왜 그리운 것들만 더디 바래지는지/ 상상인
매직아이 – 몽련 / 박위훈
어지럽군요 바닥이
하얀 웃음은 믿을 게 못되는군요 검은 착각이었다면 더 좋았을지도,
날빛이 먹을 갈아 무딘 붓에서 뚝뚝 먹물이 맺히는 그때
열꽃처럼 발진이 돋는 문장들
점에서 획으로 구르는 허공의 운율 사이로
끊어질 듯 이어져 가필의 봄을 완성한
꽃그늘 아래
만남이 너무 짧아
내일이라는 각주를 설명 없이 추신했다
달의 미간 너머까지 밟혀주던
흰 목덜미
너는 읽지 못한 기호이거나 처녀자리를 흔들어놓던 궁수좌의 사수였거나
벌레에 반쯤 파먹힌 상한 허공이었다
일거러진 연애의 문장을 더는 읽을 수 없어
차마 마침내 찍지 못해
미완의 문장으로 남았으면 더 좋았을 몽련,
끝내 이별이 완성되었다
대명포구 / 박위훈
‘니나노 집’, 예의 그 앞을 지날 때면 취객들과
아가씨들의 걸쭉한 입담에 귀를 닫았다
민망한 걸음을 붙잡는 손,
갈래머리 그녀였다 그렁그렁한 눈,
십년이 지났어도 한 눈에 알아봤다
졸업 후, 동창생과 살림을 차렸다는 말만
바람에게 듣고 기억에서 멀어진
대명포구 어시장
가끔 횟감이나 꽃게를 사러 온다
늘어선 상호들이 비린내를 풍기며 입맛을 흥정한다
파도소리를 밟고 난바다로 들어서는데
젖은 고무장갑과 눈이 맞았다
니나노 집 그녀다
당당했다, 싱싱한 활어 같았다
신랑은 고깃배를 타고 그녀는 활어를 팔고
횟감을 닦달하는 여느 손들 못지않다
옷에 묻은 비늘이 뭇별처럼 반짝였고
비닐전대가 그녀의 꿈을 산란해 품고 있었다
넙데데한 그녀가 만선이었다
김포문예대학 졸업.김포문예대학 제23기 기초반 강사
2020 경남신문 신춘문예. 문예감성 신인상.
시집 <왜 그리운 것들만 더디 바래지는지 >
달詩. 반딧불이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