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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의종하면 우선 태평호문의 방탕한 군주라는 생각부터 듭니다.
그래서 나중에 일어나는 무신의 난의 발생 배경에 한 몫을 했다고 평가되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의종이 기존의 평가대로 방탕하기만한 임금이었을까요?
우선 이에 대한 제 주장을 말하기 전에 보다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 우선 당시의 시대 상황을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직, 의종이 즉위하기 전, 인종의 대에 최대의 권력가 이자겸이 있었습니다. 그는 황제의 장인이 되어 결국 자기 생일을 인수절(仁壽ㅡ節)이라 할 정도의 권력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왕과 척준경에 의해 제거당합니다.
한편, 인종 때에 또 다른 큰 사회적 변화를 야기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묘청의 난입니다. 묘청은 음양도참설을 이용, 인종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여, 이미 지세(地勢)가 떨어진 수도 개경(開京: 開城)에서 고려조 중흥의 명당인 서경으로의 천도(遷都)운동을 전개합니다. 그러나 이는 곧 개경 신료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이에 묘청은 인종 35년 난을 일으키나 약 1년 만에 진압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 난이 고려에 끼친 영향은 컸습니다.
고려 초기부터 역대 왕들이 서경경영에 주력하여 서경 세력을 육성함으로써 개경 세력과 서로 대립 견제시켜 그 힘의 균형 위에 어느 정도 왕권의 견제를 꾀할 수 있었으나 묘청의 난 진압에 따르는 서경 세력의 몰락으로 그러한 힘의 균형은 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개경에 기반을 둔 문신세력은 더욱 드세어졌습니다.
결국 이 두 사건으로 인해 자연히 예종대에 확립되었던 국왕의 정국운영의 주도적 위치를 확보할 수 없게 되어 결국 국왕의 권위 또한 약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실추된 국왕의 권위회복과 정국운영의 주도적 위치의 회복에 대한 책임은 그 다음 대의 왕(의종)에게 전가되었을 것이며, 다음 왕은 그와 같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존 정치세력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인물로 정계를 개편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려사 기록을 보면 의종의 경우 즉위 과정조차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듯 합니다. 인종 사후, 당연히 後 임금은 태자였던 의종이 되었어야 했지만 의종의 母后인―정안 임씨 임원후의 딸로, 공예태후였다.―공예태후는 의종보다는 둘째 아들 대령후 경을 더 사랑하여 태자로 삼으려 했습니다. 부왕 인종 또한 의종이 태자로서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하는데 그것은 의종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외척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외척들의 견제를 받았던 것이고 부왕의 염려 또한 이것에 연유한 것이라 합니다.
우리가 아는 군주 의종은 왕으로서의 막중대사는 하지 않고 오직 태평호문의 군주로서 방탕한 생활만을 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종은 인종과 공예태후가 염려함이 마땅할 정도로 왕권 강화의 대임을 포기하고 방탕한 생활만을 해 후에 무신들에 의해 폐위를 당할 수밖에 없던 무능한 군주였을까요?
그렇다면 우선 의종 개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의종에 대해서는 그저 그가 놀이와 잔치를 좋아하였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겉모습일 뿐입니다. 사실 그는 문무에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의종은 격구를 즐겨했는데 의종의 격구 실력에 견줄만한 이가 없었다는 기록은 그의 무예 실력을 능히 짐작케 해줍니다. 또한, 수박희를 통해 친위군의 무사를 양성했다는 기록은 그의 뛰어난 무재를 뽑을 줄 아는 안목을 엿보게 해주며, 의종 21년 5월 장단현의 응덕정에서 장막을 친 위에 촛불을 켜놓고 그것을 맞히기로 하였을 때 의종이 활을 쏘아 즉시 맞혔다 라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궁술에도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그는 궁술과 기마술, 그리고 일반 무술에 능한 무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각촉부시[刻燭付詩]를 즐겼으며 시를 지었다는 기록 등에서 그가 文에도 뛰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그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실력을 가지고 있는 그가 과연 기존의 평가대로 왕이 되어서 ‘방탕한 군주’ 역할만 하였을까요?
그런데 고려사 세가의 의종 편을 보면 즉위 한 후부터 임신[壬申] 6년까지의 행동과 계유 7년부터 이후까지의 행동이 크게 비교됩니다. [물론, 더욱 자세히 보면 壬申 6년 전부터 이미 차이가 나지만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은 임신 6년부터라 그냥 이렇게 구분하겠습니다. 그리고 편의상 즉위년부터 임신 6년까지를 ‘전(前)’, 계유 7년부터 재위 말까지를 ‘후(後)’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즉위 초 왕으로서 국정을 어떻게 운영했을까요?
의종은 즉위 2년 후 최단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는데 곧 장선왕후 최씨입니다. 그런데 장인에 해당하는 최단은 자신의 딸이 왕비가 될 당시 이미 죽고 없었으므로, 외척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미약한 가문이었습니다. 즉, 의종은 혼인에서부터 외척세력을 견제했던 것이죠.
또한, 의종의 생모인 공예태후와의 관계 역시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예전 공예태후가 의종보다는 대령후 경을 태자로 삼으려했던 일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의종은 즉위 후에도 계속 이 일로 모후를 원망하였는데, 이에 모후가 맨발로 대전을 내려와 하늘을 우러러 맹세를 하였다 한다. 그러자, 갑자기 비가 오면서 천둥이 쳐 대전을 뒤흔들고 번갯불이 침전에까지 뻗쳤다라고 하는데 이를 통해 의종은 공예태후와의 사이가 그리 좋진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의종 대에 임원후(공예태후의 아비)에게 5남 3녀가 있었는데 의종에게는 외숙과 이모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첫째인 임극충은 의종 대에 관직을 유지하기는 하지만, 활동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갑자기 무신란 이후 정2품의 중서시랑평장사에 발탁되기도 하나 여기선 내용 밖의 이야기이므로 논외로 함], 둘째인 임극정은 대령후 경과 관련된 모반 사건에 연루되 지방으로 축출당하고 계속 지방으로만 전전하다가 충주목사로 재임 중에 죽습니다. 셋째 임부는 20세가 되도록 입사하지 못하다가 무신란이 성공한 후에 관직에 임명됩니다. 넷째와 다섯째인 임유와 임항은 명종 대에 가서야 과거에 급제하고, 조정에 출사하였습니다.
왕비를 간택할 때도 훗날 큰 정치 세력으로 될 가능성이 있는 가문을 배제하고, 이미 그 집안의 가장이 죽은 가문의 딸을 왕비로 들임으로서 그가 인종 대의 이자겸과 같은 외척 세력을 만들지 않으려 했다는 점, 거기다가 왕비보다는 천한 출신의 무비에게서 더욱 많은 자식을 보았다는 점(10명이 훨씬 넘었더군요), 모후의 아비인 임원후의 자식들을 자신의 재위시에는 등용치 않음으로서 외척으로서의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점 등을 통해 볼 때 그는 즉위 초부터 외척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견제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의 상황에서 의종은 즉위 초부터 외척 세력 견제에 적극 힘쓴 인물임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의종은 외척을 견제하는 일만 한 것이 아니라 왕권강화를 위해 기존의 문벌 귀족 관리가 아닌 자들로 자신만의 세력을 형성합니다. 이 때 전혀 새로운 신분의 新 인물들이 의종의 대에 대거 정치 세력으로 등장합니다.
의종 대에 나타난 가장 대표적인 정치 세력으로 환관을 들 수가 있습니다. 대표적 환관 중 공노비 출신의 정함이 있는데, 후에 국왕의 최측근으로 성장합니다. 또한 이와 비슷한 인물들로 왕광취와 백자단 백선연 등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노비 출신이었습니다. 이들은 국왕의 총애를 받아 많은 권력을 얻게 됩니다.
또 한 세력은 의종의 친위군(대표적인 인물; 이고․이의민․이의방․채원 등)이었습니다.
의종 이전의 "왕" 중에 光宗이 있었습니다.
광종은 고려 초 나라가 호족세력들에 의해 주도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왕권 강화를 시도, 결국 수많은 호족세력들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시킵니다. 광종의 왕권 강화 방법은 대략 이렇습니다. 광종은 즉위 초에는 호족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아직은 자신의 세력이 호족들에 비해 미약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광종은 호족세력들에게 머리를 숙이는 대신, 자신의 세력, 즉 자신에게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측근 세력을 양성하는데 힘쓰면서 점점 자신의 세력을 넓혀갔습니다. 이 때, 많은 신진 관료들이 등용되었으며 또한 친위군이 양성되었습니다. 광종은 당시 호족들에 의해 장악되어있던 군사조직을 無力化 시키고 자신의 친위군을 기르기위해, 격구를 이용하여 실력이 좋은 군사들을 모집하여 이들을 자신의 친위군에 임명합니다.
즉, 격구가 하나의 왕권 강화책의 수단이 되었던 것인데 의종 또한, 광종의 이러한 방법을 채택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려사 세가 의종편에는, 특히 초기에 격구와 관련된 기록이 무수히 많이 나옵니다.
【정묘 원년[1147] 정해日, 왕이 북쪽 후원에 나가 놀면서 측근자들에게 이르기를 <나의 격구 기술도 이제는 다시 시험하여 보지 못 하겠다.>라고 하고, 이윽고 구를 가져다 치는데 아무도 왕의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
9월 기미日 왕이 서루에서 격구 놀이를 관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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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 5년 8월 병술日에 왕이 기병들을 불러서 북을 치고 격구를 하였는데 정언 이지심이 합문 밖에서 2일 간이나 굳이 간하였다.】
【기사 3년 2월 무신日과 2월 정사日에 군사를 사열하였다.
신미 5년 겨울 10월 무진日에 왕이 강안전에서 國馬를 사열하였다.
임신 6년 9월 경자日에 왕이 동지에 가서 활 쏘고 말타기에 능숙한 자를 선발하였으며 하루 종일 활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이상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의종은 즉위 초부터 ‘군사’에 관련된 일에 많은 신경을 썼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왕이 며칠 동안이나 정사를 뒤로하면서까지 격구를 관람하고, 후에 굳이 군사들을 사열시켰다는 것은 그[의종]가 자신의 친위군을 양성하고 대내외에 이를 과시하여 왕권 강화의 한 수단으로 삼으려 한 것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에 걸맞은 자신의 병력이 있어야 함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니까요. 그 어느 것보다도 격구를 통한 자신의 군사력 확보에 힘쓴 것입니다.
즉, 이상에서 의종은 즉위 초 정사를 보기 보다 자신만의 세력을 키움으로서 왕권을 강화시키는데 중점을 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의종은 즉위 초부터 자주 사원으로 행차하고 거기서 화엄경을 강독하고, 여러 불교 경전 내용을 번역하며, 절에 많은 도움을 줬다는 기록 등이 있는데, 이를 볼 때 의종은 자신의 왕권 강화에 불교 세력의 도움을 바랬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광종이 균여스님과 가까이 함으로서 불교계의 지원을 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냥 이것은 추측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종의 행동은 "신미 5년 8월 병술일에 정언 이지심이 합문 밖에서 2일간이나 간하였다"는 기록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개경 출신 신료들의 큰 반발을 삽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종은 왕권 강화책도 그 이후에 이어지는 고려사 기록을 통해 볼 때 결국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미 5년 8월 경인日에 왕이 성재 관원들을 불러서 말하기를 <대간에서 제기한 의견을 이미 그대로 시행하였으나 정함만은 내쫓았다.>라고 하였다.
임신 6년 4월 신사日에 간관들이 합문 밖에 와서 왕에게 격구를 하지 말라고 간하였으나 왕이 이를 듣지 않으므로 간관들이 한림원에서 묵고 있었다. 왕이 술을 보내어 그들을 위로하기를 <그대들이 한 말이 지극히 적절하거니 어찌 쫓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위의 기록은 확실히 초기에 수많은 대간들이 며칠씩이나 합문 밖에서 왕에게 격구를 중지하고, 자신들이 제안하는 정책을 받아달라고 해도 이를 거부했던 기존의 의종의 행동과는 다른 것입니다. 결국 신료들의 의견을 좇아 정함을 내쫓고, 격구의 중지를 요청하는 간관들의 말을 따라 이후에 ‘고려사 세가 의종편’에서 격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사라지는 것을 통해 볼 때, 이는 의종이 행했던 왕권 강화 정책의 방법―기존의 세력을 견제하는 신 세력형성―이 기존 세력들의 반발로 인해 실패했음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종으로 하여금 이렇게 행동의 변화를 획책하게 한 계기가 된 사건은 무엇일까? 고려사 세가 의종편에 기록된 의종의 행동이 위에서 언급했듯이 전과 후의 시기의 행동이 크게 비교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의종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치 노선 방향을 바꾸게 한 사건은 이 전․후의 과도기 기간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한 사건만은 아니었을 것이며, 정치적으로 큰 사건이었을 것이며, 의종과 기존 세력들간의 싸움이었을 것입니다.
의종 5년 3월, 대표적 친왕세력인 정습명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정습명은 인종이 죽기 전에 의종을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한 인물로 곧은 성격의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정함] 등에 의해 정계에서 쫓겨나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바른 말을 잘해 의종의 여러 가지 행동을 규제하였다고 하는데, 후에 그의 축출에 정함이 앞장선 것으로 보아 의종이 정함[또는 환관 세력]을 가까이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왕으로서도 자신의 행동을 지나치게 규제하는 정습명이 점차 싫어졌을 것이며 해서 정함이 나서 그를 죽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건은 두 가지 면에서 큰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는 기존의 귀족 세력들 속에서 의종을 도와 정국을 안정시켰던 정습명이 죽음으로서 조정에서 친왕파의 세력이 크게 줄었다는 것과, 김존재, 정함 등의 환관 세력이 본격적으로 조정에 등장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종 5년 4월에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의종이 하나의 일을 행동에 옮기려 하는데 곧 대간들에 의해 큰 반발을 사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바로, 국왕의 측근 세력이었던 환관 정함을 권지합문지후로 임명하는 문제였습니다. 왕으로서는 정습명까지 죽였으니 조정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확대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정함은 자신이 아끼던 인물이었기에 그를 종 7품의 권지합문지후로 임명하여 조정에 참여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대간들로서는 정함이 천민 출신이었으므로 곧 서경권을 행사하여 국왕의 결정에 제동을 겁니다. 이 정함에 대한 권지합문지후 임명 건은 대간들에 의해 계속 저지당하면서 결국 의종 12년 무렵까지 이 일은 정국을 회오리로 몰고 갑니다.
때론 의종은 강경책을 써서 정함의 일에 반대했던 신료들을 좌천시켜버리기도 하지만 계속되는 반대에 부딪쳐 결국 많이 지친 듯 하는데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정습명을 죽였기 때문에 조정에는 더 이상 그의 친위 세력이 없어 이런 일에도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함의 일 때문에 자신이 좌천시켰던 많은 신료들(대표적인 인물로 김돈중)을 다시 조정에 불러들이는 것을 보면 의종은 이 일을 계기로 점차 자신의 기존의 ‘왕권 강화 방법’의 한계점을 인식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귀족들의 회유[또는 귀족들과의 화합]로 이어졌습니다. 정함의 일로 좌천시켰던 김돈중 등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이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측근 세력[환관]은 계속 중용하였습니다.
즉, 이때부터 의종은 기존의 측근 세력(특히 환관)을 키우기 보다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기존의 대립적이었던 귀족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유화책을 씀으로서 점차 관계 개선을 해나가 왕권을 안정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즉, 왕권 강화보다는 상호인정 속의 안정을 꾀한 것이지요.
그래서일까요? 의종 초기에 그렇게 많이 보이던 대간들과의 대립과 같이 왕과 귀족들간의 불화를 알려주는 기록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 기록을 찾기가 힘들어 집니다.
그리하여 <<의종 24년 5월 초하루 신해일에 화평재에서 문신들을 위하여 연회를 배설하고 밤이 들도록 시를 지어 읊으면서 내시 황문장을 시켜 화답한 시를 쓰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왕의 성덕을 찬양하여 <태평성대의 글을 좋아하는 임금: 태평호문의 군주>이라고 하였다.>> 라는 기록이 알려주듯이 신하들은 임금을 태평호문의 군주라고까지 평할 정도로 군신관계가 좋아집니다.
이렇게 의종은 비록 왕실의 숙원 사업인 왕권 강화는 이룩하지 못했지만 귀족들과의 대립을 끊음으로서 군신관계의 혼란을 안정시키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경인 24년 9월 초하루 왕이 보은사로 행차중일 때 상장군 정중부와 견룡군의 이고․이의방 등이 난을 일으켜 의종을 폐합니다.
결국 독자적 왕권 강화에 실패한 의종이 신료들과의 관계 계선을 위해 왕권을 안정시키려 했던 방법은 성공한 듯 보였으나 그럼으로써 무신들을 지나치게 소외시키다보니 결국 무인들의 반발을 일으켜 폐위당한 것을 보면 군주라는 자리는 참 어려운 자리인 듯 합니다.
이상의 글에서 제 결론을 말하자면 의종은 단순히 방탕하며 유약한 임금이 아닌 문무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군주로서의 능력도 충분히 갖춘 어느 정도(?) 뛰어난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평가대로 방탕한 삶만 산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왕권 강화를 꾀했던 그런 과단성있는 인물이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그가 우리에게 방탕한 태평호문의 군주로만 인식되어진 것은 결국 그는 역사에서 패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첫댓글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의종은 방탕한 군주이기만 하진 않았습니다. 무신정변의 제1 희생물이 되었기 때문에 잘못된 인식이 전해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무신정변이 즉흥적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기 때문에 의종의 책임이 전부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당시 사회의 문제가 심각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