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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9월 05일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암살 미수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
5일 오후 아프가니스탄의 남부 도시 칸다하르시를 방문한 하미드 카르자이(Karzai) 임시정부 수반을 노린 암살 기도가 발생해 총격전 속에서 3명이 사망했다.
이날 오후 카르자이 수반의 차량 행렬이 칸다하르 주지사 관저를 떠나려는 순간, 관저에 있던 아프간 군복의 한 보안요원이 카르자이가 탄 차량을 향해 두 차례 총을 쐈으며, 곧바로 미군 특수부대원들로 구성된 경호원들이 카르자이 수반이 탄 차량을 에워싸고 응사에 나서 범인을 포함한 아프간인 3명을 사살했다.
카르자이 수반을 향해 네 발의 총탄을 발사하다 미군 특수부대 요원들에 의해 현장 사살된 범인은 압둘 라흐만(Rahman)이며, 그는 탈레반 거점이었던 남부 헬만(Helmand)주(州)의 카야키 지역 출신으로 밝혀졌다.
그는 3주 전 칸다하르 주정부 보안요원으로 채용됐으며, 총격 당시 보안요원 복장을 착용하고 있었다고 주정부 관계자들은 말했다. 그는 또 이날 카르자이 수반이 칸다하르 주정부 청사를 방문한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오후 6시30분쯤 카르자이가 청사 앞에서 유리창 밖으로 몸을 내밀어 환호하는 관중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동안 한 어린이가 다가왔고, 카르자이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 어린이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 순간 라흐만이 총을 발사했다.
두 발의 총알이 차량 유리창을 관통하면서 그 중 한 발이 카르자이 수반의 귀 옆을 지나가 합승한 굴 아그하 세르자이(Sherzai) 칸다하르 주지사의 머리를 스쳤다. 총격이 발생하자 미군 특수부대 요원들이 M 16 자동소총을 발사, 라흐만을 현장에서 사살했다. 이 사건은 3시간 전 수도 카불 중심가에서 차량폭탄 테러가 발생, 경찰의 신경이 온통 카불에 쏠려있는 틈에 벌어졌다.
카르자이 수반은 이날 막내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칸다하르주의 주도(州都)인 칸다하르시를 방문했다. 칸다하르시는 이전에 아프간을 장악했던 탈레반 정부의 거점 도시이다. CNN 방송은 “이번 공격이 9·11테러 1주년을 앞두고, ‘알 카에다’가 건재를 과시하려는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고 전했다.
카르자이 수반은 수도 카불로 돌아온 뒤 “나는 안전하다.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다”면서 “정부는 이런 반(反)이슬람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와 싸워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앞서, 이날 오후 2시55분(현지시각)에는 수도 카불에서 강력한 차량 폭탄 테러가 발생해, 최소 30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다쳤다.
2004년 9월 5일,
김연아, 국내 피겨스케이팅 사상 100년 만에 국제대회 첫 우승
(1990년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金姸兒)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도당동에서 출생~)
2010 밴쿠버올림픽 피겨 금메달리스트!
▶2015년김용호 전(前) 국회의원 별세
▶2011년세계적 테너 살바토레 리치트라 별세
▶ 2007년 오늘,
우리나라 최초 우주인 이소연과 #고산
원래는 고산 이라는 분이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비행사 또는 우주비행 참가자로 선정된적이 있는데요 갑자기 이소연으로 교체가 되었죠~ 이유가 뭔지 그땐 참 궁금했었는데.. 고산은 부산 출신이고 한영외국어고등학교 중국어과 그리고 서울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했는데요 그 이후 삼성종합기술원 연구원으로 근무를 하기도 했습니다
과학기술부가 2000년도 12월에 러시아와 공동으로 우주비행사를 양성하기로 했고 전체 지원자중 이소연과 고산이 최종후보로 선발이 되었습니다 우주적응을 위한 여러가지 훈련을 받기도 하고 2007년 9월 5일 한국 최초의 우주인으로 선발이 되었는데 고산은 외부유출이 금지인 자료를 유출했다고 대한민국 정부 요청으로 이소연으로 교체가
되었습니다 최초의 우주인이 된 이소연은 우주로 날라가 10일간 각종 실험을 하고 영상을 찍어 지구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소개도 하고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죠~ 그녀는 우주에 다녀온뒤 거의 영웅 대접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소연은 우주에 다녀온 후 연구는 하지 않고 강연만 하러 다닌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는데요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갔고 결혼을 하고 현재 미국 워싱턴대 공대 자문위원 연구 및 교수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소연은 10년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했는데요 왜 그때는 아니고 지금에서야 그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인터뷰 내용을 보면 우주선에 개인물품을 담기전에 짐의 양을 계산해야 하는데 우리 정부와 항공우주연구원이 공식 물품을 보내는것에 다 써버리는 바람에 자신의 물건을 가져갈 공간이 없었다 겉옷은 고산씨의 옷을 입어야 했고 오죽하면 미국 우주비행사가 자신의 티를 입으라고 줬다는 말을 했습니다 인터뷰 내용을 들어보면.. 그냥 개인적인 불만으로만 느껴지네요.. 기껏 돈들여서 우주 보내 놨는데 미국 시민권을 얻은것에 대해서는 우주인 후속사업이 없고 그 문제가 자신의 문제로 이야기 될때 생각을 많이 하게 되어서 떠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2004년김연아, 국내 피겨스케이팅 사상 100년 만에 국제대회 첫 우승
▶2002년미국-영국 군용기 100여대, 4년 만에 최대 규모로 이라크 공습
▶1999년방송-통신위성 `무궁화3호` 기아나 쿠루기지에서 성공적으로 발사
▶1998년서울대, 법학계열을 제외한 의학계열만으로 `2+4전문대학원`을 설치하는 것을 골자로 한 학제개혁안을 확정
▶1997년테레사 수녀 사망
▶1997년지휘자 게오르그 솔티 사망
▶1995년새정치국민회의 창당
▶1990년제1차 남북고위급회담 서울서 개최
남북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1990년 9월 5일 서울에서 개최됐다. 회담은 1988년 11월16일 북한의 연형묵 총리가 미군철수와 대규모 군사훈련 중지 등을 의제로한 남북정치군사회담을 제안하자 12월 28일 한국의 강영훈 총리가 군사문제를 포함한 남북관계개선에 관한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룰 남북총리회담을 다시 제안했다. 북한의 연형묵 총리가 남한의 제안에 동의해 1989년 2월 8일 첫 예비회담이 개최됐다.
수차례에 걸친 예비회담이 난항을 거듭하다 1990년 7월 남북고위급회담 예비회담 실무회의에서 회담에 대한 의제와 시기 장소 등이 합의돼 마침내 남북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이날 서울에서 개최됐다.
▶1989년동화은행 첫 개점
▶1989년조훈현, 제1회 응창기배 세계프로바둑대회 우승
▶1987년방송심의위원회, 방송금지가요 500곡 해제
▶1982년중공당(中共黨), 주석제를 총서기제로 개편
▶1982년이스라엘정부,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 8개 정착촌 건설 승인
▶1980년국방부, 북한 `대남비방` 방송 재개 발표
▶1980년문교부, 대학교육개혁 시안 발표 - 대학졸업정원제 발표
▶1978년합동통신 한창섭 주(駐)뉴욕특파원 한국기자론 첫 소련입국, 세계보건기구(WHO)회의 취재
▶1978년이집트와 이스라엘간의 캠프데이비드회담 시작
▶1977년국군정신전력학교 신설
▶1977년보이저1호 발사
▶1973년평양지하철 개통
▶1972년검은9월단, 뮌헨올림픽 인질극
검은9월단, 뮌헨올림픽 인질극 11명의 선수들을 인질로 잡고 이스라엘에 억류 중인 230명의 팔레스타인 게릴라와 교환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끝내 독일 경찰과 충돌, 인질 전원이 사살됨으로써 올림픽이 '피의 전쟁'으로 되다.
▶1967년경원선 철도 폭파사건
▶1966년백마先陣, 월남 상륙
▶1963년한국-중앙아프리카공화국 국교 수립
▶1956년서울특별시의회 첫 개회
▶1955년한국사진회 발족
▶1955년관(官) 요금 인하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 공포
▶1954년자유당, 초대대통령 재선(再選) 제한 철폐 등 개헌안 제의
▶1948년국방경비대와 해양경비대를 육-해군으로 개편
▶ 1946년
영국의 가수 #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탄자니아 스톤타운에서 출생
(~1991년 11월 24일 영국 런던 켄징턴 에서 출생~)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한 곡들로 〈Bohemian Rhapsody〉,
〈We Are the Champions〉, 〈Love of My Life〉,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Somebody to Love〉, 〈Killer Queen〉,
〈Don't Stop Me Now〉 등,
▶1945년경전(京電), 일본인 간부 퇴진 요구하며 총파업
▶1944년베네룩스 관세동맹조약 조인
▶1944년안네 프랑크 가족 강제수용소로 이송
1942.6.12 열세 살 생일선물로 받은 일기장에 <안네의 일기>를 쓰기 시작하다
6월 12일은 안네가 태어난 날이면서 <안네의 일기>를 쓰기 시작한 날이다. 1942년 13세 생일 선물로 받은 일기장이었다. 안네는 “생일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당신을 보았다”고 일기에 적었다. 유대인 학살이 전염병처럼 퍼지던 시절에 소녀 안네에게 일기장은 단순한 노트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비밀들을 털어 놓을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안네는 자신의 일기장을 인격화 시켜 '키티'라고 부르면서 마치 사람에게 편지를 쓰듯,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 여느 소녀처럼 예쁘고, 개성이 강하고 발랄한 유대인 소녀는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성실하게 일기를 적음으로써 점점 성숙해 진다. 그녀는 이 일기를 통해 나치 치하를 살아냈던 유대인들의 자서전을 남긴 셈이다.
나는 이 넓은 세상에 외톨이입니다
안네가 일기를 쓰게 된 동기는 감상적인 문학소녀의 모습이다.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가 끔찍한 사고를 당해 병상에서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화상을 그리면서 생의 의미를 찾았던 것처럼, 그녀도 무척 외로웠다. 외로움은 자신을 들여다보게 한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감옥과 같은 은신처에서 '외톨이' 안네는 일기를 쓴다. "드디어 문제의 핵심, 내가 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가에 대해서 말 할 차례인데, 그건 한마디로 마음을 털어 놓을 만한 참다운 친구가 나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하겠어요. 열세 살 먹은 여자 아이가 스스로 이 세상에서 외톨이라고 느끼고 있다. 아니 실제로 외톨이라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요."
안네는 192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유대계 독일인이다. 은행가인 아버지 오토 프랑크과 어머니 메디트 사이에서 태어난 유복한 집안의 소녀였다. 1933년 나치당의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 유대인 학살 정책이 만연하자, 안네의 집안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망명을 했다.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 1942년은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유대인을 색출해서 수용소로 끌고 가던 때였다. 안네의 일기는 바로 그 시기를 그려낸 유대인 소녀 작가의 작품이다.
사춘기 소녀가 마음을 털어 놓을만한 참다운 친구가 없다는 고독감을 느끼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꼭 은신처에 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중고를 겪는다. 독일군을 피해 은신처에 숨고, 나돌아 다니질 않으니 친구가 없다. 이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된 일기 쓰기는 안네가 바라보는 시대 상황, 사랑을 포함한 내면 고백, 나치의 만행을 놀라운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너무나 성숙한 문장이어서, 이 일기의 진위여부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연구자들의 분석결과 그녀의 일기임이 밝혀졌다. 이 놀라운 일기를 보면 훗날 작가로서 대성할 재능마저도 말살시킨 미친 전쟁의 본질도 보인다.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
안네는 일기장에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 고 적었다. 안네의 일생은 너무나 어린 나이에 끝이 났지만, 그녀의 표현대로 종이는 인간보다도 더 잘 참고 견뎠다. 1942년 6월 12일부터 1944년 8월 1일까지 은신처에서 몰래 살았던 기록이, 안네가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고 믿었던 종이에 남았다. 종이는 글을 만나 완성된다. 만년필이건 연필이건 붓이건 간에 손의 연장인 도구를 통해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종이는 기다리고 견딘다.
안네의 아버지가 마련한 네덜란드의 프린센흐라흐트 263번지 건물 창고에는 안네의 식구를 포함한 모두 8명의 유대인들(오토 프랑크 가족 4명, 일기에는 판 단이라고 나오는 판 펠스 일가 3명, 치과의사 뒤셀)이 숨소리를 죽이면서 살았다. 건물에 교묘하게 만들어진 비밀 공간에는 작은 라디오 하나와, 외부에서 도움을 주는 지인들만이 가끔 들러 생계를 도와주었다.
은신처에서 안네는 집단 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들과 자신을 비유하면서 '천국과 같은 생활'이라고 했다. 비록 사냥개 같은 독일 비밀경찰의 눈을 피해 기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공간이었지만, 맑고 밝은 소녀로서 안네는 어머니와의 말다툼, 같이 사는 다른 가족들과의 반목, 오랜 감금생활로 인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시달렸다. 사춘기 소녀의 성적인 호기심과 사랑이 움트기도 했다.
자전거를 타고, 춤을 추고, 휘파람을 불고… 동경하지만 마음 밖으로 드러내선 안 되는 것
그녀의 일기에는 날이 갈수록 성숙해져 가는 안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숨어산 지 1년 반이 지나자 이렇게 쓴다.
"아마 당신도 1년 반이나 갇혀서 지낸다면 종종 견딜 수 없게 될 때가 있을 거에요. 아무리 올바른 판단력이 있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아도 마음 깊은 곳의 솔직한 느낌까지 억누를 수는 없거든요. 자전거를 타고, 춤을 추고, 휘파람을 불고, 세상을 보고, 청춘을 맛보고, 자유를 만끽하고, (…) 나는 이런 걸 동경해요. 그러나 그런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죠. 하기는 우리 여덟 사람 모두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거나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지낸다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요?"
안네의 일기에 적혀있는 나치의 만행 소식을 듣고 유대인들을 위해 울면서 기도하는 모습이나, 총소리, 대포소리,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 등 전쟁에 대한 공포, 실수로 은둔처에서 발각될까 봐 조바심을 치는 모습이 있다. 저항문학으로 평가되었던 이러한 면보다는 보통 소녀로서 꿈꾸고 있는 안네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어머니에 대한 불만, 언니와의 말다툼, 성적인 호기심, 첫사랑 소년에 대한 그리움들. 2년이 넘게 숨어 사는 동안 그녀는 음지에서 자라는 식물처럼 점점 꿈꾸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었다. 소녀에게 환한 태양 아래서 마음대로 활보하는 잠깐의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숨어 지내는 동안 키가 얼마나 컸는지 문설주에 표시해둬
1944년 7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안네는 드디어 은신처를 떠나 자유를 만끽할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어둠이 깊어 새벽이 오는 것이다. 그 희망의 새벽별을 바라보던 1944년 8월 4일 나치의 비밀경찰에 은신처가 발각되었다. 누군가의 밀고에 의한 것이었다. 안네의 손에 잡힐 듯 가깝게 오던 희망과 자유의 새벽별은 어둠과 죽음의 늪으로 떨어졌다.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육군 장교였다. 안네의 은신처를 급습한 나치의 비밀경찰 카를 실베르바우어는 그 사실을 알고 잠시 머뭇거렸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조국을 위해 전쟁을 치른 장교마저도 수용소로 보내야 하는 현실이었다. 훗날 이 비밀경찰은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딸 안네를 비롯한 자기 가족이 은신처에서 지낸 2년은 행복했다는 말도 했다. 내가 믿으려 하지 않자 그는 은신처로 온 뒤 안네가 얼마나 많이 자랐는지 표시를 새겨 넣은 문설주를 가리켰다." 안네가 있었던 곳이 비록 은신처였지만, 같이 숨어산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았고, 전쟁이 어서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보다시피, 우리 딸은 작가랍니다"
1944년 9월 6일 안네는 은신처의 사람들과 함께 폴란드의 작은 마을 아우슈비츠에 끌려간다. 그 다음은 영영 이별이었다. 판 펠스 씨가 제일 먼저 가스실에서 사라졌고, 안네의 언니 마르고를 '어떻게' 하려던 경비병에게 대들던 어머니가 두 번째로 사라졌다. 은신처에서 같이 자라면서 사랑을 느꼈던 남자친구 판 펠스 씨의 아들 페터도 사라졌다.
1945년 3월경, 아우슈비츠에서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이송된 안네와 언니 마르고는 열악한 환경의 수용소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두 자매가 죽은 날짜는 확실하지 않지만, 영국군에 의해 수용소 사람들이 구출되기 한 달이 조금 넘은 전으로 추정한다. 유일한 생존자인 안네의 아버지는 아우슈비츠에서 극도로 나빠진 건강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송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를 들어와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겪게 되었다.
독일 비밀경찰이 휩쓸고 간 은신처에 버려져 있던 안네의 일기는 이들의 은신생활을 도와주었던 미프 부인에 의해 보존될 수 있었고, 훗날 아버지에 의해 출판되어 전 세계인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안네의 일기를 잘 보관하고 있던, 미프 부인은 은신처에서도 글쓰기에 열심이었던 '안네'에 대해서 안네의 어머니가 자랑스럽게 한 말을 들려준다.
"보다시피, 우리 딸은 작가랍니다."
▶1936년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사진의 일장기를 지우고 게재한 `조선중앙일보` 자진휴간
▶1920년조선일보 제2차 정간(~12.24)
▶1913년월간소년잡지 `아이들보이` 창간
▶1912년미국의 작곡가 존케이지 출생
▶1905년러일강화조약(포츠머스조약) 조인
▶1898년황성신문 창간
남궁억, 나수연 등이 중심이 되어 1898년(광무(光武) 2년) 9월 5일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인수받아 창간하였다. 주필로는 유근,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등이 활동하였다. 고금제를 최초로 이용한, 즉 민간의 자본을 바탕으로 한 신문이었다.
국한문 혼용체가 사용되었으며 주2회 2면 발행이옸다. 주 독자층은 한문에 능숙한 중류 이상의 유림층과 식자층을 대상으로 하였다. 1899년 11월 23일부터 4면 4단제로 발행을 시작했다.
1900년 8월 8일자 간행본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밀약을 폭로하는 기사를 실었는데, 이를 고깝게 여긴 일본의 압력으로 인해 핵심 인물인 남궁억이 투옥되고 사장직에서 내려오게 된다. 이 이후로 어찌저찌 운영을 이어갔지만 1905년 을사조약에 대한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계기로 인해 정간당했으며,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신문제호가 강제로 '한성신문(漢城新聞)'으로 바뀌었고 9월 14일 제3470호를 끝으로 종간되었다.
신문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한 명인 #장지연은 훗날 변절하여 일본을 옹호하는 투의 사설과 시를 (매일신보 주필 당시) 써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1888년인도의 대통령(1962-67) 라다크리슈난 출생
▶1774년19세기 초 독일의 낭만주의를 개척한 화가 프리드리히 출생
▶1638년루이14세 출생
▶1187년카페 왕조 출신 프랑스의 왕 루이8세 출생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