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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성감(湖城監)이 양호(兩湖)에서 군사를 수합하여 2천여 명을 얻어 아산(牙山)을 경유하여 서해(西海)로
배를 타고 행재소(行在所)로 향하여 근왕(勤王)의 길을 떠나다.
○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이 남원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진안으로 향하다가, 순찰사가 다시 나누어
준 군사를 진산(珍山) 이현(梨峴)으로 전진시켜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 등과 더불어 험한 곳에 웅거하
여 복병을 설치하다.
○ 곽영(郭嶸)이 금산(錦山)에서 무너져 전주에 도착하였는데, 영(營)에 머물고 있는 영리(營吏)의 고목(告目)이
있어 그대로 전주에 머물게 하다. 그 종사관(從事官) 한 사람 이용순(李用諄) 이 한산(韓山)에서 집안에 우환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머물러서 아직 영에 돌아오지 않았다. 금산에 돌아와 모인 적이 사방으로 흩어져 불을
놓고 수색하여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여 전보다 배나 참혹했다.
20일에 진산(珍山) 관사를 불태우고 다시 금산으로 들어와 혹은 옥천(沃川)으로 물자를 실어내며, 무주(茂朱)의
적도 역시 물자를 지례(知禮)로 실어내어 모두 후퇴해 도망갈 계획을 하는 것 같다고 동현(同縣)의 현감 장
별장(張別將)과 어 복병장(魚伏兵將) 등이 보고해 왔다. 진산(珍山)과 동원(東院)은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
鄭),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 무안 현감(務安縣監)ㆍ해남 현감(海南
縣監) 등이, 이현(梨峴)은 강진 현감(康津縣監)이, 저고리(苧古里)는 영광 군수(靈光郡守)가, 추현(杻峴)은 고산
현감(高山縣監)이, 송치(松峙)는 부안 현감(扶安縣監)이, 함평(咸平)은 무장 현감(茂長縣監)이, 조림원(照臨院)은
남평 현감(南平縣監)이, 순찰사 군관 전몽성(全夢星), 별장(別將) 남응길(南應吉)은 장수(長水)로부터 무주(茂朱)
지경을, 순창(淳昌)은 보성 군수(寶城郡守)ㆍ장수 현감이, 탄전(炭田)ㆍ죽치(竹峙) 등지는, 임실현감(任實縣監)ㆍ
진안 현감(鎭安縣監) 등이 방어하되 형세를 보아 진격하라는 명령도 역시 전달하여 발송했다.
그리고 임피 현령(臨陂縣令)에게 군사 8백 명을 거느리고 황화정(皇華亭)에서 결진(結陣)하여 성원할 것을 어제
전령(傳令)하여 발송했다.
명(明) 나라 군사가 7일에 평양(平壤)을 포위하니 적의 떼가 이미 도망하여 서울의 적과 함께 모두 노량(露梁)
을 건너고 청계산(靑溪山)에서 진위(振威)까지 잇대어 결진하여 아산(牙山)으로 향했다고 한다. 교동(喬桐) 공생
(貢生) 고언백(高彦伯)이 밤에 평양에 들어가 적을 놀라게 하여 적의 무리 2백여 명이 저희들끼리 서로 쳐
죽이고 이로 인해 후퇴해 도망갔으므로 곧 그 사람을 등용하여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삼았다고 한다.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의 군관 이충(李冲)이 행재소(行在所)로부터 도총도사(都摠都事)의 직을 제수 받아 옥과
(玉果)를 지나가면서 말하기를, “주상께서는 용천(龍川)으로 옮기시고 동궁(東宮)의 행차는 이미 강계(江界)에
도착했으며, 온갖 관원은 나누어 정해지고 두 곳의 비빈(妃嬪)은 다만 칠가(七駕)가 시종하고 있으며, 임해(臨
海)는 이미 북도로 파천했다. 대개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으며 주상께서도 안녕하시다. 명 나라 군사 3만 명이
이미 용천(龍川)에 도착했으며, 뒤이어 구원병도 와서 강변에 진을 치고 있다.
요동 윤(遼東尹) 이성량(李成樑)요동 자사(遼東刺史)인데 아들 이여송(李如松)ㆍ이여남(李如楠)ㆍ이여백(李如栢)
ㆍ이여매(李如梅)ㆍ이여판(李如板)ㆍ이여회(李如檜)ㆍ이여오(李如梧) 8형제를 두어 세상에서 8장군이라 칭한다.
의 후임으로 조승훈(祖承訓)이 대장이 되고 왕(王)ㆍ양(楊)ㆍ곽(郭)ㆍ사(史) 등 여러 장수가 그 부관이 되어,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게 된다는 생각으로 급급히 싸움을 서두르니 그 성의가 지극하다 하겠다.
지난번 대동강 싸움에 적의 진중에서는 평의지(平義智)가 대장이 되고 행장(行長)ㆍ현소(玄蘇)ㆍ평수장(平秀長)
이 부장이 되어 삼위(三衛)로 나누어 군사를 거느렸는데, 한 위(衛)의 수효가 많을 적에는 3천여 명에까지 달했
다. 그래서 부중(府中)에 머무른 여러 장수들이 여러모로 계획을 세워 일제히 만여 개의 화살을 쏘아 한 위의
적을 모조리 죽였다.
우리 군사가 굳건히 지키고 적이 이미 기운이 꺾였는데, 뜻밖에 간사한 술책을 내어 밤에 얕은 여울물을 건너
어둠을 타서 내려 몰아치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평양을 함락당했다. 적이 주둔하던 날에 관서(關西) 용사
두어 사람이 밤에 적의 진중으로 들어가 4장수 중에 가장 나이 젊은 자 한 놈을 쏘아 죽였는데 실로 이 놈은
의지(義智)였다. 그래서 남은 적은 해서(海西)로 도망해 내려가고 서울에 머물던 적도 그 수가 역시 얼마 되지
않으니, 국토를 회복할 것이 손꼽아 기대된다. 평양 윤(平壤尹) 송언신(宋言愼) 이 싸움에 진 책임으로써 교체
되었다.
○ 금산의 적 수천여 명이 진산(珍山)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약탈하니 이현(梨峴)의 복병장(伏兵將)인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 동복 현감 황진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막아 싸웠다.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퇴각
하는 바람에 적병이 진채(陣寨)로 뛰어드니 우리 군사들이 놀라 무저지는지라, 권율이 칼을 뽑아들고 후퇴하는
아군을 베며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오르고 황진도 역시 상처를 움켜쥐고 다시 싸워 우리 군사 한 명이 백 명
의 적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적병이 크게 패하여 기계를 다 버리고 달아났는데 30여 명을 베었다.
○ 곽영(郭嶸)이 광주 판관ㆍ보성 군수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무주의 적을 탐색하고, 조방장(助防
將) 이계정(李繼鄭)은 금산에 들어와 적을 탐색하다가 모두 무너져 도망갔다. 이때에 본도 장병이 여러 번
적의 두 소굴을 공격했으나 한 번도 승첩을 거두지 못하고 매양 무너지고 마니 이 어찌 반드시 저 왜적이
용감하고 날래서만이겠는가. 아! 어찌 남자다운 사람 하나가 없단 말이냐.
○ 영남 초유사(招諭使)의 공문 내에, “금월 23일 창원 부사(昌原府使)가 보고해 온 것을 보면 금월 19일에
성중에서 항시 머물러 있는 왜적과 계병부(桂兵部) 도합 33명이 성 안에 사는 잡인(雜人) 10명을 불시에 잡아
다가 물건을 짊어지게 하고 기관(記官) 박춘정(朴春丁)과 함께 김해(金海)ㆍ해양(海洋)의 선척(船隻)을 간망(看
望)하러 나갔다 돌아왔다고 하며, 항상 머물러 있는 왜적도 역시 본토로 돌아갈 생각이 있다고 했다.
지금 김해에 나갔다 온 사람을 만나서 적의 거취를 물은즉 김해ㆍ해양 각처의 적선이 즐비하고 좌우 산기슭에
는 가설된 집들이 잇대어 있으며, 김해ㆍ밀양(密陽)에 교통하는 사람들과는 소를 치고 술을 빚어 서로 함께
마시고 씹어서 이웃 마을 사람과 같이 지냈다.
이렇게 지나는 10여 일 사이에 왜적 6명이 서울로부터 내려와서 귀에 대고 말을 전해주자, 뭇 왜적이 일시에
통곡하며 두 고을을 교통하는 사람을 남녀도 가려내지 않고 모조리 베어 죽여 2백여 명에 달했으며, 각처의
가설된 집들도 수효대로 불을 놓았고 강에 가득하던 배는 하룻밤 사이에 다 내려갔으니 군사를 거두어 도망갈
계획을 하는 것 같다. 귀도(貴道)의 금산ㆍ무주에 있는 왜적은 어느 곳으로 향하는지 통지해 달라.” 하다.
이상은 전라도에 보낸 공문이다.
○ 좌의병(左義兵) 진중의 사자(士子)들이 흩어진 군사 8백여 명을 소집하여 전 화순 부사(和順府事) 최경회(崔
慶會)를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고 금월 26일 광주에서 기고(旗鼓)를 세웠는데, 골(鶻) 자로 장표(章標)를
만들었다. 우도(右道)로부터 군사를 모아 남원으로 향하면서 우의병(右義兵)이라 일컬었다.
거사하던 날에 여러 군(軍)에 다음과 같이 통시(通示)하였다.
한 사람을 상 줌으로써 천만 사람을 권하는 것이다. 지금 의병의 패전에 유학(幼學) 안 영(安瑛)은 그 주장이
탄 말이 놀라는 것을 보고서 자기가 탄 말을 주장에게 주어 대신 타게 하고 도보로 포복(匍匐)하다가 달갑게
죽음을 당했으며,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는 왜적의 칼날이 어지럽게 번쩍일 때 노복들이 모두 달려나가
적의 칼날을 피하라고 간청하자, 성내어 거절하며 말하기를, “내가 만약 달아난다면 주장을 어느 곳에 두겠느
냐.”하고, 그 주장의 노복이 다 흩어져서 말이 전진할 수 없음을 보자 자기 종을 명하여 주장을 보호해서
나가게 함과 동시에 자신이 뒤를 따라 적을 막다가 갑자기 칼에 맞아 죽었다.
아! 인심이 극도로 어지러운 이즈음을 당하여 임금을 배반하고 나라를 잊어버리며 목숨을 탐내어 구차히 살아
가는 것이 곳곳마다 다 그러하고, 윗사람에게 친히 하며 어른을 위해 죽는 일은 전혀 들을 수 없는데,
이 두 사람은 이익을 꾀하거나 공을 계산하는 마음이 없어서 마침내 목숨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여 분연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만약 급급히 그 절의(節義)를 드러내어 한때의 이목(耳目)을 솟구치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꺾여진 사기를 일으켜 세우며 무너진 강상(綱常)을 붙잡을 수 있으랴. 일이 시급하지 않은 것 같지만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하니, 바라건대 각 읍 향교(鄕校)ㆍ향소(鄕所)에 각각 부물(賻物)을 거두어 되는 대로
사람을 시켜 그 집에 조문하고, 의거(義擧)한 뒤에 그 해골을 거두어 제사를 드리고 말미를 갖추어 위에
아뢰어 정문을 세워 의기를 고무시키도록 하라.
○ 호남ㆍ영남 수군이 견내량(見乃梁)에 거제(巨濟)ㆍ고성(固城)의 경계이다. 모여 왜적의 큰 배 10척, 중ㆍ소선
70여척을 발견하고 접전하였다. 우리 군사가 두 번째 총통(銃筒)을 쏘았으나 전혀 깨어질 형세가 없으므로,
한산도(閑山島) 큰 바다로 퇴진하여 다시 삼도의 여러 선박과 더불어 약속하고 북채를 두들기며 한꺼번에
나가 거의 다 무찔렀다. 적선 10척이 포위망을 벗어나 달아나니 진도 군수(珍島郡守) 선거이(宣居怡)가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다. 10일 적선 70여 척이 안골포(安骨浦) 선창에 결진하고 있으므로 삼도의 여러 전선
백여 척이 돌진하여 접전을 벌였으나 다 깨뜨리지는 못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전 현감 임계영(任啓英)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 임계영은 전라도 보성(寶城) 사람으로, 처음에
본도 관군과 의병이 함께 근왕(勤王) 길에 나가고 온 도내가 공허하게 되자 흉한 왜적이 틈을 타서 경내에
쳐 들어오니 충돌당할 근심이 조석에 박두하여 내지(內地)의 위태로움이 그릇을 기울여 물을 쏟는 것보다
더하므로, 임계영은 동지 여러 사람과 더불어 격문을 띄워 군사를 모집해서 방어할 계획을 했다.
그래서 본군에서 출발하여 낙안(樂安)ㆍ순천(順天)을 경유하여 남원으로 향해 다니면서 군사를 수합하여
천여 명을 얻어 좌의병(左義兵)이라 칭하고, 호(虎) 자로 장표(章標)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범을 그려 만들었다가 나중에 호 자의 인(印)을 만들었다.
○ 김천일(金千鎰)ㆍ최원(崔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水原)으로부터 인천(仁川)으로 향하면서 본도에다
구원병을 요청하니, 이광(李洸)이 조방장 이유의(李由義)와 진도군수 선거이(宣居怡)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구원하게 하다.
○ 영남의 왜적이 몰려 전일에 해인사(海印寺)에서 밥을 빌어먹던 막실(莫失)ㆍ막돌[莫石]을 호남으로 보내어
형세를 엿보게 하다. 초유사의 비밀이다.
○ 경기도 과천 현감(果川縣監)이 전달한 통문 내용에, “적병 한 부대가 개성부(開城府) 청석동(靑石洞)에 진을
치고 있다가 우리 군사에 패하였고, 신립(申砬)이 충주(忠州)에서 패전한 뒤로 왜놈의 의복을 바꾸어 입고 몰래
도성으로 들어와 적 2백여 명을 마구 베었으며, 도원수 윤두수(尹斗壽)의 소속 군사가 또 적 1천여 명을 베어
서 서울에 있는 적이 후퇴해 달아났다.” 하다.
○ 영남 초유사(嶺南招諭使)의 공문 내에, “본도 우도(右道) 여러 의병 2만여 기(騎)가 날마다 적을 공격하여
고령(高靈) 이하는 이미 회복되었으며, 서울에서 내려오는 적이 진퇴를 마음대로 못하고 나왔다 도로 들어가는
형편이니, 산중에 피란간 사람들에게 급히 이 기별을 전해서 사람마다 분연히 일어나 적을 치게 할 것이다.”
하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도순찰사(都巡察使)가 소식을 알리기 위하여 당일로 병사에게 도부(到付)된 첨지를 보면, “지금 도착한 어지
(御旨) 내에, ‘요동(遼東)에서 크게 정병 5만 명을 풀어서 강변에 머물러 성원을 하게 하고, 광녕총병관(廣寧總
兵官) 양원(楊元)이 귀순한 오랑캐 5천 명을 친히 거느리고 앞서 와 요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으며, 조 총병(祖
總兵)ㆍ곽 유격(郭遊擊)ㆍ왕 유격(王遊擊) 세 대장이 각기 수천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이미 압록강을 건넜고,
사 유격(史遊擊)은 정예부대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었다. 어제 저녁 의주 목사(義州牧使)가 등초해
보낸 관전보(寬奠堡) 표첩(票帖) 내에 중국에서 산동도(山東道) 수군 10만으로 하여금 수로를 경유하여 곧장
왜적의 소혈(巢穴)을 두들길 모양이라 했으니, 경(卿)은 아무쪼록 연해 각 읍에 이 연유를 적어 관문이나
길거리에 방(榜)을 걸어 두루 알리라.’ 하셨다. 어지가 협정에 의거하여 이러하기에, 중국의 구원병이 이미
압록강을 건너와서 군의 형세가 크게 떨쳤으니 왜적을 무찔러 없애고 국토를 회복할 날을 손꼽아 기약한다.
이 역시 민간에 알려 모두 듣게 하라.” 하다. 이상 공문은 각읍에 보낸 것임.
○ 왜적이 평양에 들어온 뒤로 매일 나가 도적질을 하되 부산(斧山) 밖을 벗어나지 않고 돌아오며 마치
무엇이 두려워서 감히 못하는 것이 있는 듯이 보이니 예언[讖記]의 말도 다 거짓은 아닌 듯싶다. 부산(斧山)은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이때에 참언(讖言)에, “왜적 난리 7년에 부산으로부터 부산까지 오고, 왜놈 난리 10년
에는 압록으로부터 압록까지 온다.” 하였다.
[주-D001] 안 상산(顔常山) :
당 현종(唐玄宗) 때의 충신 안고경(顔杲卿)이니, 원문의 안 상산(顔常山)은 안 평원(顔平原)의 잘못인 듯하다.
안평원 열전(列傳)에 ‘신무상죄당사(臣無狀罪當死)’라는 말이 있다.
[주-D002] 문 신국(文信國) :
남송(南宋) 말년의 충신인 문천상(文天祥)이니, 위왕(衛王) 때 신국공(信國公)을 봉했다.
[주-D003] 내상(內廂) :
여기서는 안쪽 지방[內地] 즉, 함안ㆍ창원ㆍ이령 등지를 말한 듯하다.
[주-D004] 한(漢) 나라의 …… 나라 붕거 :
중국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승상인 제갈공명(諸葛孔明)과 남송 말년의 명장 악비(岳飛)이니,
붕거(鵬擧)는 악비의 자(字)이다. 이 두 사람은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주-D005] 장순(張巡) :
당(唐) 나라 때의 사람이다.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기병(起兵)하여 안녹산을 토벌했는데,
허원(許遠)과 수양을 지키고 있다가 수양성이 함락되매 안녹산을 역적이라 꾸짖고 피살되었다.
[주-D006] 납서(蠟書) :
편지를 납덩이 속에 넣어서 물이 새어들지 않게 한 것이다. 《송사(宋史)》
[주-D007] 석륵(石勒) :
진(晉) 나라 때 중국을 침범하여 후조(後趙)를 세운 갈인(羯人 : 중국의 변경 민족)이다.
[주-D008] 조사아(祖士雅) :
진 나라 때의 명장 조적(祖逖)의 자(字)이다. 조적이 진 원제(晉元帝) 때 군사를 통솔하여 북벌하기를 자청하자,
원제는 그를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하였다. 그가 북벌군을 거느리고 장강을 건너갈 때 노를 치며 맹서하기
를, “중원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고 다시 건너게 된다면, 이 강물에 빠져 죽겠다.” 하였던 바, 조적은 마침내
석륵을 격파하여 황하 이남의 땅을 회복하였다.
[주-D009] 장숙야(張叔夜) :
송 나라 때의 사람으로 금(金) 나라 군대와 싸워 용맹을 떨쳤다. 《송사(宋史)》
[주-D010] 사모(蛇矛)와 월극(月戟) :
사모는 창의 한 종류로 전장에 쓰는 무기이니, 장팔사모(丈八蛇矛)라고도 한다. 월극도 창의 일종으로,
날이 초생달같이 굽어 그리 칭한 것이다.
[주-D011] 안진경(顔眞卿) :
당 나라 때 사람으로 그가 평원 태수(平原太守)로 있을 때 안녹산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진경이 군사를 일으켜
안녹산을 토벌하자 북방의 여러 군에서는 그를 맹주로 추대하여 하북초토사(河北招討使)로 하였다.
[주-D012] 유총(劉聰) :
진(晉) 나라 때 흉노의 황제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진 나라를 침략하였다.
[주-D013] 동창의 계교 :
송(宋) 나라 진회(秦檜)가 부인 왕씨와 동창에서 귤(橘)을 희롱하면서 악비(岳飛)를 죽이려는 계획을 하였다.
[주-D014] 서촉(西蜀)으로의 피란 :
당 현종(唐玄宗)이 서촉으로 피란하였으므로, 선조의 거가가 서행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15] 봉천(奉天)으로 향하는 …… 먼지가 날린다 :
당 덕종(唐德宗) 부자가 금(金)의 군사에게 잡혀 봉상현 봉천으로 끌려간 고사가 있는 바, 선조의 파천을
형용한 말이다.
[주-D016] 이에 물들인 무리 :
왜적들은 이빨에 칠을 하였으므로 칠치(漆齒)라 부른다.
[주-D017] 포서(包胥)의 충성 :
춘추 시대 초 나라의 대부 신포서(申包胥)가 초 나라의 보전을 위해 힘을 다한 바 있다.
《춘추(春秋)》정공(定公) 4년
[주-D018] 포신(鮑信) :
중국 후한 말년의 절개가 있던 인물로, 황건적(黃巾賊)과 접전하다 죽었다. 《후한서(後漢書)》
[주-D019] 방덕(龐德) :
중국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으로, 변경 민족인 저강(氐姜)의 침공을 격파하였다.
[주-D020] 범진(范鎭)의 머리털이 허옇게 돼버린다 :
범진은 북송(北宋) 때의 명신이다. 인종(仁宗)이 재위 35년에 후사가 없으매, 범진이 종실의 근속(近屬) 중에서
현량한 자를 골라 황제의 지위를 계승시킬 준비를 하라고 건의하였으나, 집정자의 저지로 실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범진은 굽히지 않고, 인종에게 여러 차례 되풀이하면서 우니, 인종도 울면서 말하기를, “짐은 경의
충성을 아오. 경의 말이 옳소. 하지만 다시 2, 3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오.” 하였다. 범진이 장주를 10여 차례
바치고 1백여 일 동안 어명을 기다린 끝에 수염과 머리가 희어지자, 조정에서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음을 알았
다. 《송사(宋史)》권 337
[주-D021] 소해(小海) :
세자를 가리킨다. 《산해경(山海經)》에 “원고(元臯) 위에서 남으로 유해(幼海)를 바라본다.”는 말이 있으니,
유해는 소해(小海)이다. 그러므로 천자(天子)는 대해(大海)에 비하고, 태자(太子)는 소해에 비한 것이다.
[주-D022] 전성(前星) :
세자를 가리킨다. 진(晉) 나라 천문지(天文志)에, “심(心)이란 별이 있는데, 중간 별[中星]은 천자(天子)를,
앞 별[前星]은 태자(太子)를, 뒷 별[後星]은 서자(庶子)를 가리킨다.” 하였다.
[주-D023] 용루(龍樓) :
한(漢) 나라 성제기(成帝紀)에 있는 말로, 성제가 태자(太子)로 있을 때 계궁(桂宮)에 거처하였는데 임금이
태자를 불러 용루문(龍樓門)으로 나오게 했었다.
[주-D024] 학금(鶴禁) :
한 나라 궁궐소(宮闕疏)에 있는 말로, 학궁(鶴宮)은 태자(太子)가 거처하는 궁인데 어느 사람이라도 드나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학금(鶴禁)이라 하였다.
[주-D025] 칠묘(七廟) :
중국의 고제(古制)에 의하면, 천자가 칠묘를 두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서울에 있는 종묘를 그렇게
말한 것이다. 《예기(禮記)》〈王制〉
[주-D026] 윤대(輪臺)에서 과오를 뉘우침 :
윤대는 중국 신강성 서남쪽에 있는 지명으로 한 나라 무제(武帝)가 중앙아시아(당시에는 서역(西域)이라 했다)
를 정벌하여 군사가 그곳까지 가 있었으나, 무제가 병으로 죽을 때에 윤대에 군사 보낸 것을 후회하는 조서를
내렸다.
[주-D027] 봉천(奉天)에서 자기를 허물함 :
봉천은 당 나라 때 섬서성(陝西省)에 있던 현이다. 덕종(德宗)이 주자(朱泚)의 반역을 피하여 그곳으로 파천하
였는데, 그곳에서 과거를 뉘우치고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는 조서(詔書)를 내리니 그것을 죄기조(罪己詔)라
한다.
[주-D028] 영무(靈武)의 의기(義旗) :
당 나라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현종(顯宗)은 촉(蜀)으로 파천했는데, 그의 아들 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즉위하고 안녹산을 물리쳐 당 나라를 수복했다. 그 고사를 가지고 세자 혼(琿 즉 후의 광해군)
에게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광복시킬 것을 기대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주-D029] 미앙궁(未央宮)의 수주(壽酒) :
미앙궁(未央宮)은 중국 한(漢) 나라 때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 서북의 장안의 고성(故城) 안에 세웠던 궁전
이름. 새해를 축복하는 뜻으로 마시는 술. 미앙궁의 수주는 서울의 궁전을 회복하기를 고대하는 선조의 마음을
나타낸 말.
[주-D030] 중국 :
하(夏)를 옮긴 말이다. 여기서는 글의 서두로 감개를 나타내는 대목에 쓰인 것이므로 반드시 중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D031] 궁(窮)과 한(寒) :
궁과 한은 모두 중국 고대 하 나라 시대의 역적으로 궁은 유궁후예(有宮后羿)의 약한 것이니, 그는 하 나라를
역적질하였고 한은 한착(寒浞)이니 후궁유예의 아들로 역적질한 아비를 죽이고 그 아비의 자리를 빼앗았던
역적이다.
[주-D032] 훈육(獯鬻) :
중국 고대의 변경 족속인 흉노(匈奴)의 별칭으로, 중국을 자주 침범하여 포악한 짓을 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D033] 밀(密) :
주 문왕(周文王) 때의 조그마한 나라이다. “밀인이 불공하여 감히 큰 나라를 거역하였다[密人不恭, 敢距大邦].”
하였다. 《시경(詩經)》〈대아(大雅)〉
[주-D034] 연교(燕郊)에서 말을 키우겠다 :
연교는 중국 북방의 수도(首都)가 있는 곳의 교외로, 그곳에 말을 치겠다는 것은 중국을 점령하겠다는 말이다.
[주-D035] 덕진(德鎭)으로 교질(交質)해야 한다 :
덕진은 주민에게 은덕을 베푸는 산이니, 덕진으로 교질하겠다고 하는 것은 중국의 명산을 내놓으라는 말이
된다.
[주-D036] 조정의 계획 :
원문에는 묘(廟) 밑에 한 글자가 탈락되어 있다. 여기서는 묘산(廟算)으로 보고 ‘조정의 계획’으로 옮겼다.
[주-D037] 교령(嶠嶺)에 머뭇거리며 :
원문에 교영(喬英)이라 한 말은 ‘교만하게 굴며’라고 해석이 되는데, 나는 교(嶠)와 영(嶺)의 오서라 보므로
모두 영남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준순교영(逡巡喬英)’을 영남에서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주-D038] 빈교(邠郊) :
빈(邠)은 옛날 주 문왕의 조부인 태왕(太王)이 있던 도읍이었는데, 적(狄)의 침략으로 그곳에서 쫓겨나
기산(岐山)으로 옮겼다 한다.
[주-D039] 하북(河北) 지역이 비록 흩어지고 :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황하 이북이 모두 안녹산에게 항복하였다는 말이다.
[주-D040] 수양(睢陽) :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商丘縣) 남부에 있던 지명으로, 당 나라 때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그곳을 굳게 지켜 장강(長江)과 회하(淮河) 일대의 땅을 막아 안녹산 군이 침입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주-D041] 악비(岳飛)가 갓 …… 우레같이 통곡하였고 :
악비는 중국 남송 초기의 명장이다. 여러 차례의 무공으로 태위소보(太尉少保)에까지 올라 하남북제로초토사
(河南北諸路招討使)가 되어 금군(金軍)을 대파하고 수일 내로 황하를 건너가 실지(失地)를 광복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진회(秦檜)는 금과의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하루에 12번 금자패(金字
牌)를 내려 악비를 소환했다. 삼군이 통곡한 것은 그때의 일이다. 그 후 진회는 묵기설(万俟卨) 등을 시켜
악비를 탄핵해서 체포 투옥하여 처형하여, 39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주-D042] 장준(張浚) :
남송 초기 주전파의 거물이다. 송 나라 고종(高宗) 때 천섬경서제로선무사(川陝京西諸路宣撫使)로 금을
제어하고 있다가 주화파인 진회에게 몰려 영주(永州)로 좌천되었다. 효종(孝宗) 때에 가서 추밀사(樞密使)를
제수받고 강회(江淮)의 군사를 도독(都督)하였으니, 주전파로 널리 민간의 환영을 받았다.
[주-D043] 해바라기 :
해바라기는 해를 항상 처다본다 하여, 충신이 항상 임금을 향하는 데 비유한다.
[주-D044] 동해가 바로 …… 않을 것이고 :
옛날 전국 시대 말기에 진(秦) 나라가 강성하여서 여러 나라를 침략하자 진 나라를 황제로 존칭하고 종주국을
삼자는 의논이 생겼는데 이때 노중련(魯仲連)이라는 선비가, “나는 차라리 동해를 밟고 죽을지언정
진 나라같이 악독한 나라를 황제국으로 섬길 수 없다.” 하고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D045] 의병(疑兵) :
군사가 많은 것처럼 거짓으로 꾸미는 것, 또 그렇게 꾸민 군사를 말한다.
[주-D046] 역적 양(亮)이 …… 어긴 일 :
북송 때에 여진족(女眞族)이 금(金) 나라를 건국하고 송(宋) 나라를 침략하여 송 나라가 강남으로 쫓겨 갔으므
로 이때부터 남송이라 한다. 남송에서는 금 나라에게 신하가 되겠다는 서약을 올리고 겨우 두 나라의 평화를
유지하였는데 금 나라에서 황족인 완안량(完顔亮)이 임금을 죽이고 자기가 황제가 되었으므로 역적인 양이라
하여 역량(逆亮)이라고 부른다. 그 완안량은 남송과 평화의 약조를 깨뜨리고 남송을 침략하다 남송의 반격을
받아 대패하고 자신까지 부하 군대의 손에 살해되었다.
[주-D047] 중행(中行)을 매질하지 않은 것은 :
중행률(中行律)은 원래 한(漢) 나라 사람인데, 흉노족(匈奴族)에 항복하여 흉노의 참모가 되어서 도리어
한 나라를 괴롭혔다.
[주-D048] 장강(長江)이 급작스리 …… 날아서 건너왔다 :
중국이 남북조로 갈렸을 때, 양자강(揚子江)을 하늘이 만들어 준 참호[天塹]라 하여 그 강을 건너오려거든
날아서 건너오라 하였으나 그 장강을 건너게 하였다면 남조에는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이라는 말이다.
[주-D049] 태왕(太王)이 빈(邠) …… 떠나던 마음 :
주(周) 나라의 조상 태왕은 빈(邠 : 豳)에 살았는데 융적(戎狄)의 침입을 받았다. 나라 사람들은 융적과 싸우려
고 했으나 태왕은 전쟁에 군사들이 죽는 것을 측은하게 여겨 기산(岐山) 밑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빈에 살던
사람들이 다 그를 따라와 살았다. 태왕은 그때에 가서 비로소 주라는 국호를 정하고 융적의 습속을 물리치고
성곽과 궁실을 세워 나라를 경영했다. 아들 문왕(文王) 대에 주는 크게 팽창하고 손자 무왕(武王)의 대에
이르러서는 중국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태왕은 무왕이 추존한 칭호이고 그 이전에는 고공단보(古公亶父)로
불리웠다.
[주-D050] 명황(明皇)이 촉(蜀) …… 갔던 일 :
당 나라 때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이 위태로워지자 현종(玄宗)은 몽진하여 촉으로 파천했다.
[주-D051] 공락(鞏洛) :
공현(鞏縣)은 지금의 중국 하남성 영양현(榮陽縣) 서부의 낙수(洛水) 동안(東岸)에 있었는데, 안녹산 반란 때에
당 나라 군사가 이곳에서 패했으므로 황제가 서울을 버리고 달아났다.
[주-D052] 민아(岷峨)의 위험한 …… 멀리 갔다 :
당 현종이 촉으로 들어갈 때 그러한 험준한 길을 가야 했다. 민아(岷峨)는 촉 땅의 산으로 민은 민산(岷山),
아는 아미산(峨嵋山)이다. 취화(翠華)는 임금이 탄 수례의 장식이니, 그것을 타고 가는 임금을 말하는 뜻으로
쓰인다.
[주-D053] 이성(李晟) :
당 나라 때의 사람으로 덕종(德宗) 때 주자(朱泚)의 반란을 평정하여 수도를 수복하였고, 황제가 봉천(奉天)에
포위되어 있을 때 그 포위를 풀어 황제를 구출했다.
[주-D054] 육지(陸贄) :
당 덕종의 신하로 덕종이 봉천에 포위되어 있을 때 측근에서 시종하였다. 임금이 매일 백으로 헤아릴 만큼
많은 조서를 내리는데 붓을 휘둘러 그것을 써내리기를 생각이 샘솟듯하여 다 사정을 곡진하게 나타내고
그때 그때의 필요에 잘 맞춰 나갔다고 한다.
[주-D055] 상주(相州) :
중국 하남성 안양현(安陽縣)에 있었는데, 당 나라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구절도(九節度)의 군대가
반란군에 의해 궤멸되었다.
[주-D056] 장막의 제비 :
장막을 버티고 있는 나무에 제비가 집을 짓고도 그 천막이 곧 없어질 것을 모르고 찍찍거린다는 것으로
대단하지 않아 소탕해 버리는 것이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주-D057] 밤중의 닭소리 :
밤중에 닭이 우는 것은 난리가 날 징조라 한다.
[주-D058] 중류(中流)에 뜬 …… 노를 치면서 :
중국에 여러 호족(胡族)이 침략하여 서진(西晉)이 멸망하고 황족 한 사람이 강남으로 쫓겨가서 동진(東晉)을
건국하였는데, 그때에 조적(祖逖)이라는 사람이 군사를 거느리고 양자강을 건너서 호족을 정벌하러 떠날 적에
양자강 중류에서 배의 노를 치면서, “만일 저 오랑캐를 쳐서 평정하지 못한다면 저 강물과 같이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고 맹서하였으나 그는 중간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주-D059] 복덕(福德)이 바야흐로 …… 분야에 임했고 :
하늘의 복덕성(福德星)이 비치는 땅을 침략하면 침략하는 나라가 도리어 패한다고 한다.
[주-D060] 노래하고 읊조리는 …… 생각하게 된다 :
한(漢) 나라가 중간에 왕망(王莽)에게 역적질을 당한 때가 있었는데 왕망이 정치를 하도 포악하게 하여서
백성들은 노래하는 데도 한 나라 옛적을 생각하였다 한다.
[주-D061] 신정(新亭) :
중국 강소성 남경시 남쪽에 있었던 정자로, 동진 때 시세가 혼란하여 명사들이 이곳에 모여 서로 보고
개탄하였다 한다.
[주-D062] 흥원(興元) :
흥원은 당 나라 서울 서북쪽에 있는 땅으로 당 나라 희종(僖宗)이 황소(黃巢)의 반란군을 피하여 그곳으로
파천하였었다.
[주-D063] 형초(荊楚)의 기특한 인재들 :
옛날 중국 초 나라에는 뛰어나게 용맹한 인물들이 많이 났다는 것을 취해서 쓴 말임.
[주-D064] 연조(燕趙)의 검객 :
옛날 중국 연ㆍ조 지방에서는 검술에 비상한 인물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D065] 말을 채찍질하여 …… 찌를 것 :
관우(關羽)가 조조(曺操)에게 있을 때에 원소(袁紹)의 대장 안량(顔良)이 대군을 거느리고 조조를 공격해 왔으므
로 조조도 군대를 내어서 응전하게 되었다. 양군이 대진하면서 안량은 수백 명의 부장들에게 옹위되어 진두에
나섰는데 그때에 관우는 조조에게 적토마(赤兎馬)라는 좋은 말을 선사 받았다. 그래서 관우는 그 말을 몰고
달려가서 안량의 진으로 들어가 안량을 단번에 찔러 죽였다. 그것은 그 좋은 말의 힘이 많았던 것이다.
[주-D066] 기북(冀北) :
기북은 중국의 북경 근처로 예전부터 좋은 말의 산지로 유명하였다.
[주-D067] 노적가리를 가리켜 내주던 의기 :
중국 삼국 시대에, 오(吳) 나라 주유(周瑜)가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노숙(魯肅)의 집에 들러 군량을
달라고 청했다. 노숙의 집에는 양곡 노적가리가 둘이 있었는데 각각 3천 곡(斛)씩이 들어 있었다.
노숙이 그 중의 하나를 가리켜 그것을 주유에게 주었다는 고사이다.
[주-D068] 양주(揚朱)와 묵적(墨翟) :
유가에서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자 양주의 사상이나 극단적인 박애주의자 묵적의 사상을 이단으로 극력
배척한다. 양주와 묵적을 배척하는 자는 곧 선비를 의미하는 말이다.
[주-D069] 곤란 :
중국의 진(秦) 나라는 서북에 위치하여 있고 월(越) 나라는 동남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래서 ‘월 나라 사람이 진 나라 사람이 수척한 곤란을 보고도 모른 체한다’는 말이 있다.
[주-D070] 봉명국(奉命國 :
천명을 받든 나라라는 뜻으로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입장에서 일본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라 생각된다.
[주-D071] 주여숙(柱厲叔)이 이것을 …… 기다릴 것인가 :
춘추 시대의 사람으로, 거(莒)의 오공(敖公) 밑에서 벼슬을 살다가 그 재능이 알려지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바닷가에서 살면서 극도의 빈곤에 쪼들렸다. 오공이 변란을 당하자 그는 벗들과 하직하고 오공에게 가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나섰다. 주여숙의 이러한 행동은 후세의 임금 중에 인물을 못 알아 보는 자를 부끄럽게
하는 동시에, 임금의 은총을 받고도 임금의 급난에 자신만을 보전하려 드는 신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주-D072] 안진경(顔眞卿)이 다시 …… 할 것인가 :
당 나라 안녹산의 반란 때에 하북 17군(郡)이 모두 붕괴하여 안녹산에게 항복하였는데
오직 평원 태수(平原太守) 안진경만이 성을 지켰으므로, 현종이 “짐은 안진경이 어떻게 생겼는지[作何狀]
모르나 참 장한 사람이다.” 하였다.
[주-D073] 세성(歲星)이 기(箕)의 …… 기약이 없으랴 :
이 글에서 한실과 송은 다 중국의 한족이니 변경의 침략적인 족속과 비교해서 나타낸 말이다. 즉 여기서는
곧 조선의 왕실 내지 조선을 말한 것이다. 세성이 기의 분야를 지켜서 복덕이 내릴 징조가 있다고 한 것은,
기를 조선의 분야로 보고서 한 말로 고래의 점성술(占星術)에 기대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74] 서방(西方)에 미인 :
미인은 임금을 나타낸 말이다. 《시경(詩經)》〈패풍(邶風)〉
[주-D075] 순무(巡撫)가 당보(搪報)를 …… 되었다. 운운. :
이것은 명 나라 때의 자문인데, 형식이 특이하고 원문 전후에 약간의 혼란이 있어 모호한 부분이 없지 않다.
자(咨)는 동등한 기관 사이에 쓰는 공문 형식이다. 원문의‘須至’의 ‘至’는 ‘知’의 와오일 것이고,
‘吉’자 위에는‘秀’자가 오탈했을 것이고, ‘凋信’의 ‘凋’자는 ‘調’의 와오일 것이다.
[주-D076] 10대의 주불(朱紱)이요 7대의 은장(銀章)이라 :
주불은 붉은 색의 치마 같은 무릎 덮개로, 고관 대작이 수레에 탈 때 사용하였다. 은장은 은으로 만든
인장으로 고제(古制)에 의하면 2천 석의 녹을 타는 벼슬을 하면 그 관인을 은으로 만들고 ‘모관지장(某官之章)’
이라 새겼다 한다.
[주-D077] 금관자(金貫子) :
금으로 만든 관자이다. 관자는 망건에 달아 망건 줄을 꿰는 작은 고리로, 금관자는 종2품의 벼슬하는
사람이라야 붙였다.
[주-D078] 호전(胡鈿) :
호전은 주화파의 괴수 진회(秦檜)를 목 베고 금에 항전(抗戰)할 것을 상소했다. 곽재우는 호전이 진회를
목 베라고 주장한 것이 정당한 것같이 자기가 김수를 목 베자고 하는 것도 정당하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주-D079] 동탁(董卓) :
중국 동한(東漢) 말년의 사람으로, 전공(戰功)이 있어 영제(靈帝) 때 전장군(前將軍)이 되었고 병주목(幷州牧)의
벼슬을 얻었다. 영제가 죽자 하진(何進)의 부름에 호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수도에 들어가 환관을 죽이고
그 일이 평정되자 자기가 상국(相國)이 되어 소제(少帝)를 폐하고 하태후(何太后)를 시해(弑害)하고 헌제(獻帝)
를 세웠다. 음란하고 흉폭하여 그 해독이 조야에 퍼져 원소(袁紹) 등이 군사를 일으켜 그를 토벌하였는데,
동탁은 헌제를 끼고 장안으로 천도하여 자기가 태사(太師)가 되어 가지고 제위를 찬탈할 생각을 품었다.
왕윤(王允)이 역사(力士) 여포(呂布)를 꾀어 동탁을 자살(刺殺)시키고 그 족속을 멸했다.
[주-D080] 형벌은 대부에게는 올라가지 않는다 :
본래 대부 이상에는 형벌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대부 이상이면 형벌을 받을 행동을 하지
않으므로 형벌을 적용할 필요가 없고 또 형벌을 받을 만한 죄를 대부가 범했다면 형벌을 받기 전에 자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이 글에서는 그런 뜻으로 쓴 것은 아니고 곽재우를 공격하기 위한
근거의 하나로 그 말을 내세운 것이라 하겠다. 《예기(禮記)》〈곡례(曲禮)〉
[주-D081] 옥절(玉節)을 잡았으며 :
지방 장관이 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82] 강회(江淮)를 차단하여 …… 구실을 하였는데 :
낙동강 연안을 지켜 그 일대를 안온하게 만든 것을 말한다.
[주-D083] 정의를 해치는 자를 도적이라 한다 :
《맹자(孟子)》 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나 약간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원문에는 ‘적인자 위지적(賊仁者謂之賊)’이 아니라, ‘적의자 위지잔(賊義者謂之殘)’이라 하였다.
[주-D084] 근왕(勤王) :
왕실에 힘을 다한다는 말이다. 《춘추(春秋)》에, 호언(狐偃)이 진후(晉侯)에게 말하기를, “제후(諸侯)를 구하려면
근왕하는 것밖에 없다.” 하였으므로, 후세에 의병을 일으켜 왕실을 구원하는 것을 근왕이라 하였다.
[주-D085] 간섭을 받아 :
사람을 시켜 일을 하게 하고 뒤에서 방해한다는 말이다. 복자천(宓子賤)이 선보(單父) 고을의 원님이 되자
글씨 잘 쓰는 사람을 청하여 글씨를 쓰라 하고 뒤에서 팔목을 끌어당기며 글씨가 잘 되지 않으면 성내니,
글씨 쓰는 자가 돌아 가서 노(魯) 나라 임금께 고했다. 노 나라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복자천이 내가
자기 일을 간섭할까 두려워서 한 짓이다.” 하였다. 《설원(說苑)》
[주-D086] 곡단(曲端) :
송(宋) 나라 사람으로 금인(金人)과 싸워 공이 있었는데, 뒤에 다른 사람의 참소를 만나 옥중에서 죽었다.
[주-D087] 한착(寒浞)처럼 스스로 넘어질 줄 :
한착은 하대(夏代)의 사람으로 유궁후예(有窮后羿)가 제위를 빼앗아 하 나라 대신 유궁씨(有窮氏)로 일컬을 때
그의 재상이 되었다가 후일 예(羿)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후에 소강(小康)에게 멸망되었다.
[주-D088] 장인(丈人)의 원길(元吉) :
《주역》의 지수사(地水師) 괘에 보인다.
[주-D089] 초호(楚戶)의 세 집 :
초(楚) 나라 남공(南公)이 예언하기를, “초 나라 3집만 남아도 진(秦) 나라를 멸할 수 있다.” 하였다.
[주-D090] 혜련(惠連) :
혜련이 10살 때 이미 글을 잘 지으니 그 형 사영운(謝靈運)이 매양 혜련을 대하면 좋은 글구가 저절로 나왔다.
영운이 일찍이 영가(永嘉) 서당(西堂)에서 시를 사색하다 못이루었는데 꿈에 문득 혜련을 보고,
“못 가에 봄 풀이 돋아난다 [池塘生春草].” 하는 글귀를 얻었다 한다. 《남사(南史》〈사혜련전(謝惠連傳)〉
ⓒ 한국고전번역원 | 차주환 신호열 (공역)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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