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시기에 좋았더라
□ 본문 : 창세기 1장 20-25절
하나님께서 다섯째 날에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 그리고 날개가 있는 모든 생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날개가 있는 모든 생물은 새와 더불어 날개가 있는 곤충도 포함됩니다. 여섯째 날에는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의 창조에 대한 말씀은 다음 주에 나누도록 하고, 오늘은 바다와 하늘과 땅의 생물을 만드신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계속해서 반복되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 종류대로’라는 단어입니다.
21절입니다.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4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절입니다.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 종류대로’라는 단어가 무려 7번이나 나옵니다.
셋째 날의 창조에도 ‘종류대로’라는 단어가 반복되어 나옵니다.
11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절입니다.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그 종류대로’라는 단어에 담긴 뜻을 ‘창조에서 홍수까지’라는 책(양승훈, CPU)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창조주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생명 창조의 핵심은 첫째 “그 종류대로”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종류대로”를 의미하는 “레미네후”는 모든 생명체는 처음부터 따로따로 창조되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어느 한 하등생물을 창조하신 후 세월이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복잡한 생명체로 진화되도록 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종류대로” 따로따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p, 124)
“그 종류대로” 창조되었기에 더는 발전된 형태로 변해가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각 생물은 자신들의 서식지, 생태계에서 가장 완벽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p, 162)
진화론에서는 모든 생명체가 처음에는 단순하고 원시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진화, 즉 발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처음에는 보기에 좋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 내적인 힘으로 저절로 보기에 좋도록 진화했다고 한다. (p, 164)
자연에 의해 선택되기 위해 죽기 살기로 경쟁하도록 하는 것이 진화론이다. 자연에 의해 선택되지 못한 개체나 종은 여지없이 도태되어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 진화의 과정을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 실행하겠다고 나서서 저지른 비극이 바로 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저지른 대학살이다. 자연선택의 원리에 의하면 장애인이나 약자들은 설 땅이 없다. (p, 165)
하나님은 식물, 그리고 바다와 하늘과 땅의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든 생명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만드는데 사용된 백향목만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름 없는 들풀도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거센 비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강한 독수리만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져버리는 하루살이도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백수의 왕이라고 하는 사자만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흙속에서 살아가는, 그러다가 비가 오면 흙 밖으로 나와서 기어 다니다가 사람에게 짓밟히는 지렁이도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으로 봅니다.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관점이 아니지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세상의 관점이고, 진화론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는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그래서 약한 것, 힘이 없는 것, 작은 것은 보기에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차별하고 무시합니다. 약하고 힘이 없고 작은 것은 짓밟습니다. 심지어는 사람을 향해서도 이와 같은 관점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1. 약한 자를 차별하고 무시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백향목도 이름 없는 들풀도, 독수리도 하루살이도, 사자도 지렁이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외모와 재물과 출신과 사회적 지위로 사람을 차별하고 무시합니다. 세상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고,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1∼4절 말씀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초대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가(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다) ‘내 형제들아’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차별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아니 교회가 어떤지를 말하기 전에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사람을 차별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습니까?
※ 사실 저는 이 부분에서 부끄러운 것이 많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어쩌다 한 번씩 교회에 돈을 빌리러 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분들의 이야기가 한결같습니다. 지금 급하게 어디를 가야 하는데 교통비가 없으니 차비를 빌려달라는 것입니다. 진짜일 수도 있고 거짓말일 수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돈은 빌려드리지 않습니다. 대신 원하시는 분들에게는 도시락을 대접해 드립니다. 그래도 교회라고 찾아오셨는데 그냥 돌려보내는 것은 주님의 마음이 아닐 것 같습니다.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심어주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 영혼이 곤고할 때, 육신의 것이 아니라 영의 것을 찾기 위해 교회에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분들을 향해 저의 마음입니다. 겉으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친절하게 대합니다. 그러나 제 안에는 그분들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자꾸 판단합니다. 어느 때는 사무실에 있으면서도 그분들의 노크 소리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못 들은 척합니다. 어서 돌아가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계속 노크를 합니다. 아무도 없는 척 조용히 하고 있는데도, 제가 사무실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아시는지 ‘스미마센’ 하면서 저를 부릅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도나타데스까’하며 문을 엽니다.
만약 사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정말 예수님을 알고 싶어서 찾아온 사람이라면 제가 그런 마음으로 맞이했을까요? 만약 사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라면 제가 그런 마음으로 맞이했을까요?
이런 제가 ‘약한 자를 차별하고 무시하지는 않습니까?’ 라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저를 보시며 ‘네가 먼저 잘 해라’고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저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더 이상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고 무시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속으로라도 함께 신앙생활 하는 믿음의 가족들을 차별하거나 무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외적인 것, 그러니까 그 사람의 외모나 경제력이나 사회적인 지위 같은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것으로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넘어진 자, 믿음이 연약한 자, 의심하는 자를 차별하고 무시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외적인 것뿐 아니라 신앙적인 것으로 차별하고 무시하는 것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어쩌면 이것이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외적인 것으로 사람을 차별하고 무시할 때는 성령님께서 책망하시는 음성이 곧장 들립니다.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으로 사람을 차별하고 무시할 때는 성령님의 책망하시는 음성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저 사람은 넘어졌지만 나는 넘어지지 않았어, 나는 저 사람보다 믿음이 좋아,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의심이 많을까? 교회에 그렇게 오래 다녔으면서 말이야.’
이게 바로 자기 의입니다. 영적인 것으로 차별하고 무시하는 사람은, 상대방은 틀렸고 나는 옳다는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책망하시는 음성이 좀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아니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도 자기 의가 성령님의 음성을 가로막습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혀 믿음이 연약한 자를 판단하고 차별하고 무시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믿음이 약해 넘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해 의심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연약함 때문에 그 사람을 차별하거나 무시하시지 않습니다. 비록 그가 믿음이 약해 넘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의심해도 여전히 그 사람을 향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4장1∼3절 말씀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믿음이 연약한 자를 왜 비판하면 안 됩니까? 영적인 것으로 왜 차별하고 무시하면 안 됩니까?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시는데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라고 차별하고 무시합니까?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무시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14:4)
우리의 눈에는 한 없이 부족하고 형편없이 보여도, 심지어는 우리가 보기에 전혀 가능성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그런 권능이 있습니다. 그를 창조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기억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18:10)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작은 자는 단순히 어린 어린아이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힘없는 자, 가난한 자, 믿음이 연약한 자, 그래서 내가 차별하고 무시하고 함부로 말하고 행동해도 될 것 같은 사람입니다. 죄로 오염된 우리 눈에는 작은 자로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작은 자를 보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천사들을 보내 그를 지키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8:6)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2)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잘 다스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어떤 이유에서도 차별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자기 의에 사로잡혀 믿음이 연약한 자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더욱 조심해야합니다. 아무리 작은 자라도 우리가 업신여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작은 자를 잘 섬기고 돌보아야합니다. 이것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2. 약한 자신을 보면 낙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믿음의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볼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의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세상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종류가 다른 종류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면, 내가 그 사람처럼 될 수 없고, 그 사람도 나처럼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 살면 됩니다.
독불장군처럼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그 사람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고, 나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서로를 비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로를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경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용납하고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남자들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여성분들은 외모에 열등감이 많습니다. 그래서 예쁘지 않은 곳을 고쳐보겠다고 성형수술을 합니다. 그런데 성형수술을 하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 번 손대기 시작하면 여기저기 손봐야 할 곳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주인공으로 발탁된 어느 여 성도님이 있었습니다. 유럽 무대에서 오페라 여주인공으로 서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고 하는데, 이 분이 ‘나비부인’의 주인공으로 뽑히게 된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이 분이 이태리로 유학 가서 수년 동안 성악을 공부했는데 도무지 빛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고민하다가 자신의 눈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겨우겨우 설득해서 쌍꺼풀 수술을 허락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빽’을 써서 쌍꺼풀 수술로 유명한 서울의 어느 병원을 급하게 예약했습니다.
그 주일에 로마 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왜 여자들이 쌍꺼풀 수술을 하냐, 쌍꺼풀 수술해서 나중에 죽어서 하늘나라 갔는데 너 누구냐, 나는 너한테 쌍꺼풀 안 줬는데 너는 누구냐, 하시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들으면 유치하기까지 한데 이 성도님은 목사님의 설교가 바로 자신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계신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수술을 취소했습니다.
그런데 수술을 취소한 덕분에 수술을 받기로 한 날에 열린 콩쿠르에 참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게 됩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콩쿠르에 독일의 유명한 극장의 극장장이 앉아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이 여자 성도님을 나비부인의 주인공으로 발탁한 것입니다.
조연도 많이 안 해본 사람이 주연을 하려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래서 어느 날 극장장에게 물었습니다. 나처럼 서툰 사람을 왜 주연으로 뽑았느냐고 말입니다. 극장장의 대답이 당신의 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나비부인은 일본 여인이지만, 일본 사람의 가창력은 한국 사람에 비해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일본 여자는 쌍꺼풀 수술을 해서 일본 여자를 무대에 세우면, 유럽 관객이 보기에는 일본 여자로 보이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가창력을 가진 사람 가운데 쌍꺼풀이 없는 동양 여자는 당신이 처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연의 경험도 없는 서툰 당신을 주인공으로 뽑았다는 것입니다. 이 분이 오스트리아나 독일에서 공연을 하면 신문에서 ‘이제야 비로소 나비부인을 찾았다’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재철, 비전의 사람, 홍성사, pp, 115∼117)
하나님께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그래야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질투하지 않습니다. 교만해 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야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야 우리를 지금 이 모습 이 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쓰임 받게 됩니다.
여전히 자신의 연약함과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하여 낙심하고 절망하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고린도전서 1장26∼29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사람의 관점으로 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이왕이면 지혜가 많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이왕이면 능력이 많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이왕이면 문벌이 좋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이왕이면 하나님도 지혜가 많고, 능력이 많고, 문벌이 좋은 사람을 택하시면 일하시기 좋지 않겠습니까? 굳이 미련한 사람을 택하시고, 약한 자들을 택하시고, 천한 자들을 택하시고, 멸시 받는 자들을 택하시고, 없는 자들을 택하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는 사람의 지혜와 능력과 문벌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해서 더 잘 쓰시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자라고 해서 쓰시는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열방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혜와 능력과 문벌이 하나님 앞에 자랑이 된다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미련함과 약함과 천함과 멸시받음과 없음으로 인해 하나님 밖에 의지할 분이 없다면 오히려 잘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련함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함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함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멸시받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없음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능력이 있고 없고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미련함과 약함과 천함과 멸시받음과 없음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관점을 버리고 세상의 관점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1:8,9)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사도 바울에게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허락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을 사랑으로 택하신 하나님께서 왜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상황을 허락하셨습니까?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독교 역사상 주님과 복음을 위해 가장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고 없는 우리를 향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세상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지 마십시오. 자신의 관점으로도 자신을 보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2)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기에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출신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고 말했던 천하고 천한 동네 출신이었습니다. 가난한 목수였습니다.(막6:3) 그래서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받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1:11)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롬1:4)
사람들이 보기에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천한 동네 출신이어도 괜찮습니다. 가난해도 괜찮습니다.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고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봅시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봅시다. 세상 사람들이 차별하고 무시하는 지극히 작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기억하고, 주님께 하듯 합시다.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맙시다.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갑시다. 자신의 미련함과 약함과 천함을 보고 낙심하지 맙시다. 사람들이 멸시한다고 분노하지 맙시다. 가진 것이 없다고 절망하지 맙시다.
이제는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합시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만 따라갑시다. 그러면 우리를 통해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있는 것들을’ 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