逆光 2
김성춘
산 너머 누가 붉은 서치라이트를 켜고 있다
한 순간이 극명하다
나와 황혼 사이, 내가 잘 보인다
내가 잘 보이지 않는다
화선지에 먹물 번지듯
황혼녘, 검은 눈썹 같은 저 산의 능선들
A4 크기로 잘라 벽에 걸고 싶다
붉은 체리 같은 노을도
역광 속 선명한 능선의 비명도 벽에 걸고 싶다
먹물이 온 몸에 번지듯
폐허 같은 도시에 대형 봉분들 허공에 떠 있다
누렇고 큰 비눗방울처럼,
산 자와 죽은 자의 길이 잘 보이는 도시
길 끝에 가서도 가야할 길이 아직 잘 보이지 않는 도시
한 순간이 꽃처럼 극명하다
오늘의 역광 속에
나무들이 무릎을 꺾고 있다
나와 황혼 사이 내가 잘 보인다
가야할 길 먼 불빛 속에 잘 보이지 않는다.
—〈현대시학》201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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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춘 / 1942년 부산 출생. 부산대 교육대학원 졸업. 1974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방어진 시편』『원고지의 빈 칸들을 위하여』『흐르는 섬』『섬. 비망록』『그러나 그것은 나의 삶』『그대 집은 늘 푸른 바다로 넉넉하다』『수평선에게 전화를 걸다』『요즘에는 이상한 바다도 있다』『바다와의 동행』『겨울 극락 앞에서』『비발디풍으로 오는 달』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