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편의점 아저씨'로 신선한 감동을 안겨준 김능환 전 대법관이 한명숙 전 총리의 상고심에 이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의 상고심 변호인단에도 이름을 올려 또 화제를 뿌리고 있다. 법관의 꽃이자 사법부의 얼굴인 대법관 출신이라고 일선 변호사로 나서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이유는 뭘까.
통계에 따르면, 대법관 출신 변호사들이 맡고 있는 사건의 60~70%가 대법원 사건이다. 전체 사건에서 대법원 사건이 차지하는 비율이 0.1%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중요한 대법원 사건은 이들이 독과점하고 있다. 대법관 출신 변호사들이 개업하면 2~3년 동안에 수십억원을 벌어들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조직폭력 등 격에 어울리지 않는 사건에 이름을 올리는가 하면, 상고심 사건에 자기 이름만 빌려주고 '도장값'으로만 수천만원씩 받는 경우가 드러나기도 했다.
김 전 대법관은 로펌행에 앞서 가족에게 "온갖 비난이 쏟아질 수 있으니 각오하라"고 했다고 한다. 대법관 출신들이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줄줄이 변호사로 나서고 로펌으로 향하는 배경에는 이른바 '심리불속행(審理不續行)'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게 공통된 지적이다. 심리불속행 제도란 대법원이 하급심을 거쳐 올라온 민사사건 중 상고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사건에 대해선 하급심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기각하는 제도다.
심리불속행 기각은 판결문에 "상고 이유에 관한 주장은 이유 없다"는 내용만 나와 있다. 사건 기록을 아예 보지도 않은 채, 틀에 박힌 기각 사유만 적어 넣는다. 당사자는 기각 이유도 모르고 문전박대를 당하는 셈이다. 대법원 민사사건의 60%가량이 이런 절차를 거쳐 기각된다.
하지만 대법관 출신 변호사를 선임하면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심리불속행 관문'을 통과해 심리가 이뤄진다. 사정이 이러니 대법관 출신 변호사를 선임하거나, 그의 이름을 빌리려 하는 것이다.
심리불속행의 가장 큰 폐해는 들쭉날쭉하거나 '튀는' 판결이 속출하는 하급심 판결을 더욱 무질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한 원로 법조인은 "과거 하급심에선 당사자가 대법원에 상고할 것 같으면 더 심리할지 고민이라도 했는데, 요즘은 대법원에서 뚜껑도 안 열어 보니까 판사들이 안이해진 측면이 없지 않다"고 꼬집었다. 대법원을 의식하지 않게 되니까 '모럴 해저드' 같은 게 쌓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 상고 허가제가 시행된 적이 있었지만, 재판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여론의 반발로 1990년 폐지됐다. 그러다가 1994년 업무 과중 해소와 소송 남발 방지를 이유로 '상고심 절차에 관한 특례법'이라는 대체 입법을 슬그머니 만들어 지금과 같은 '편법'을 이어가고 있다. 법원 일각에선 소송이 늘어나고 항소, 상고를 마다 않는 이유를 '우리나라 사람들의 삼세판 의식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본말이 전도된 얘기일 뿐이다. 남소(濫訴)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국민이 법원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재판을 안 해주는 법도 명분이 없다. 업무 부담이 과중하다고? 대법관 숫자를 늘리든지, '상고 심사부'를 만들든지 대법원이 알아서 할 일이다. 국회가 여론에 밀려 심리불속행이라는 제도를 폐지하면, 그제야 대법원이 움직일 것이다.
조선일보 정권현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