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도처에서 평안을 찾았으나 어디서도 찾지 못했다.
책을 들고 구석진 곳이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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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책을 읽는 사람)과 도둑질(책 읽기)에 관한,
혹은 거듭re-태어나기naissance에 관한 키냐르의 문학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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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장르를 넘나드는 독특한 글쓰기로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의 『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L’Homme aux trois lettres』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은 로마인들이 도둑fur을 지칭할 때 에둘러 사용하던 표현이다. 키냐르는 이 표현을 훔쳐 ‘독자’를 지칭하는 데 사용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만들어내는 창조자가 아니라 타인을 통해 만들어지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키냐르에게 선재先在하는 세계를 훔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학 작품도 선행하는 것을 계승한다. 독서라는 소리 없는 절도를 통해 우리의 정체성은 다른 정체성과 합병된다. 영혼이 ‘책의 하얀 두 지면’의 틈새로 파고들어 새로운 세계에 이르게 된다. 독자 저마다의 거듭-태어남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의 사건은 어떻게 가능한가? 책을 펼침으로써. 책 안에 거주함으로써. 책을 읽음으로써.
키냐르에게 앞으로 충분히 시간이 주어진다면 15권 내지 16권이 될 연작 기획물 ‘마지막 왕국’ 시리즈는 2002년부터 시작되어 2020년에 제11권에 이르렀다. 각 권은 우주를 바라보는 각기 다른 창窓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제8권 『은밀한 생』은 ‘사랑’으로, 제9권 『죽도록 사고하다』는 ‘사고思考’로, 제10권 『잉골슈타트의 아이』는 ‘회화繪畫’로 열린 창이다. 제11권인 이 책은 ‘문학’을 향해 활짝 열린 창이다. 요컨대 문학론이다. 그러나 저자의 입장에서 글쓰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독자’와 ‘글 읽기’에 대한 담론이다. 문학 연속체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한 문학 자체이다. 이따금 숨이 멎도록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나게 되는 산문시 같은 철학적 에세이다.
도둑(책을 읽는 사람)
T. S. 엘리엇의 말이다. “미숙한 시인들은 모방한다. 원숙한 시인들은 훔친다.” (91쪽)
‘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이란 로마인들이 도둑을 지칭할 때 에둘러 사용하던 표현이다(라틴어로 도둑을 뜻하는 명사는 세 글자 fur이다). 키냐르는 이 표현을 훔쳐 ‘독자’를 지칭하는 데 사용한다.
키냐르에 의하면 ‘문학’이란 인간이 온갖 경험을 소리 없이(침묵) 훔쳐서(읽거나 쓰는 행위) 단어 혹은 기호의 형태로 환원시킨 망망대해 같은 변화무쌍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키냐르를 읽는 행위, 그것은 그의 경험과 해박한 문화지식을 훔치는 일이다.
키냐르는 도둑에게서 단독성, 침묵, 어둠, 은밀함…… 등을 읽어낸다. 도둑의 속성에 담긴 ‘책을 읽는 사람’의 은유를 찾아낸다. 일본 전통 가무극 노能를 완성한 예능인으로, 대단한 독서가로 꼽히는 제아미가 키냐르의 은유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다음은 그가 임종 직전에 토로했던 말이다.
〔……〕 나는 내가 읽은 것을 모조리 훔쳤지. 진짜 도둑이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사방팔방을 경계하고, 온몸을 잔뜩 긴장한 채, 노심초사하는 눈빛으로, 한밤중에 전혀 모르는 집에 혼자 들어가는 자일세.〔……〕나는 혼자 어둡고 고요한 집에 들어갔지. 지금 혼자 죽어가듯이, 책을 읽느라 평생 혼자였던 것 같네. (33쪽)
이 책은 ‘독자’와 ‘글 읽기’에 대한 담론이지만, 키냐르는 ‘글 읽기’와 ‘글쓰기’를, 독자와 작가를 둘로 나누지 않는다. 둘은 동일한 것이다. “글쓰기란 침묵 속에서 계속 글을 읽는 일”(157쪽)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엄청나게 책을 많이 읽은 독자로서 독서의 연장선상에서 글을 쓰는 것이므로 글 읽기와 글쓰기는 문학 연속체로 한데 묶인다. 키냐르에게 작가와 독자는 그 구분이 사라지고, 책을 통해 수없이 많은 다른 삶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삶을 증가시키는 ‘문인’이라는 용어로 수렴된다. 결국 키냐르는 ‘독자와 독서’에 대해 말함으로써 ‘독자/저자’ 및 ‘글 읽기/글쓰기’에 대해, 즉 ‘문학’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독서 예찬론’으로 보이는 이 책이 ‘문학론’인 이유이다.
열정적인 독자(읽기)이며 숨 쉬듯 끊임없이 글을 토해내는 저자(글쓰기)인 키냐르는 자신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기쁨’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가장 자전적이다.
도둑질(책을 읽는 행위)
독서는 소리 없는 절도이다. (41쪽)
우리는 자신에게서 스스로를 만들어내는 창조자가 아니다. 이미 어머니의 입에서 언어를 훔쳤고, 아버지의 성姓을 훔쳤듯이 타인을 통해 만들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재先在하는 세계를 훔치는 것이 키냐르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문학 작품도 어느 것이나 선행하는 것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베르길리우스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장서에서 훔칠 수 없었다면 단 한 줄의 시도 쓰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대인들은 믿었다. 키냐르의 ‘도둑질’은 꿀벌들이 꽃에서 훔쳐 꿀을 모으듯이 자연스럽고 행복한 일에 속한다.
‘책을 읽다’와 ‘훔치다’와 ‘날다’는 순차적이 아니라 책을 펼치는 순간 동시에 발생하는 사건이다. 책을 읽는 사람의 몸은 여기에 있으나 정말로 여기 있지 않으며, 영혼은 몸이 있는 장소를 떠나 아주 먼 곳으로 날아가 떠돈다. 자신의 정체성은 다른 정체성에 합병되어 무아지경이 되고, 시간은 멈추거나 다른 시간을 모조리 사라지게 하는 주도적 시간으로 변한다.
르네상스-거듭 태어나기
책이 열린다.
독서는 삶을 향한 통로를, 삶이 지나는 통로를, 출생과 더불어 생겨나는 느닷없는 빛을 더 넓게 확장한다.
독서는 자연을 발견하고, 탐색하고, 희끄무레한 대기에서 경험이 솟아오르게 한다. 마치 우리가 태어나듯이. (13쪽)
플라톤의 동굴 우화에서 동굴 밖의 세계는 이데아의 세계였다. 잭 런던은 플라톤의 개념을 훔쳐 소설 『화이트 팽』에서 동굴 속의 새끼 늑대가 앞발을 내미는 ‘빛의 벽’을 만들어낸다. 이번에는 키냐르가 잭 런던의 것을 훔쳐 ‘책의 하얀 두 지면’을 만든다. 영혼이 이 틈새로 파고들어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 이르게 된다. 독자 저마다의 부활이다. 우리는 옛날의 그림자에 잠겨 살아가는 대신 빛의 세계로 한 번 더 태어날 수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의 사건은 어떻게 가능한가? 책을 펼침으로써. 책 안에 거주함으로써. 책을 읽음으로써.
제1의 출생은 수동적인 것으로 어머니의 몸 밖으로 추방되는 일이므로 분리와 상실과 고통과 울부짖음이 뒤따른다. 제2의 출생은 다른 정체성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자리를 잡는 행위를 통해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나아가는 여행이다. 자발적인 re(거듭)-naissance(태어나기)이다. 어둠에서 빛으로의 이행, 그것이 진정한 출생이고 삶이다.
■ 본문 속으로
나는 책을 좋아한다. 책의 세계가 좋다. 어느 책에서나 형성되어 떠오르며 퍼지는 구름 속에 있는 게 좋다. 계속 책을 읽는 게 좋다. 책의 가벼운 무게와 부피가 손바닥에 느껴지면 흥분된다. 책의 침묵 속에서, 시선 아래 펼쳐지는 긴 문장 속에서 늙어가는 게 좋다. 책이란 세상에서 동떨어졌으나 세상에 면한, 그럼에도 전혀 개입할 수 없는 놀라운 기슭이다. 오직 책을 읽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고독한 노래이다. _9쪽
독자가 몸을 웅크리고 앉은 벽의 모퉁이와 독자의 시선 아래 펼쳐진 두 지면으로 이루어진 모퉁이는 하나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소리 없이 얻게 되는 틈새이다.
영혼이 이 틈새로 파고든다. _13~14쪽
독서는 책이 펼쳐지는 순간, 그리고 책에서 찾거나 얻으려는 의미가 이러한 끊임없는 탐색과 다르지 않은 영혼에 불을 지피는 즉시 이 세계를 떠난다.
독자란 두 지면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하늘을 나는 작은 양탄자’에 올라타서 바다를 지나고, 아주 먼 거리를 주파하고, 수천 년을 건너뛰는 마술사다. _21쪽
모든 책에는 드러나는 ‘무언의 의미’가 있다. [……] 습득된 언어를 앞지른다고 주장하는 이 ‘무언의 의미(sensus mutu)’에 대해 더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
내게 바다에 대해 말하지 말라, 뛰어들라.
내게 산에 대해 말하지 말라, 올라가라.
내게 이 책에 대해 말하지 말라, 읽어라, 고개를 심연으로 더 멀리 내밀어 영혼이 사라지게 하라. _24쪽
얘야, 아들아, 내 삶에는 한동안 두문불출했던 시기, 번민을 가라앉히려고 하루에 열 권 분량의 책이 필요했던 시기가 있었다. 나는 근처 도서관에 가곤 했지. 사는 게 그야말로 고역이었거든. 절망을 잊게 해줄 책들이 없었다면 난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그런데 이런 고통을 견디며 살아남은 기쁨이 있다면 그건 훨씬 더 심오하고 거의 매혹적인 다른 기쁨이란다. 즉 이 모든 고통을 멀리서, 가령 어둠 속에서, 먼 곳에서, 여름에 피어오르는 연무煙霧 속에서 관조할 수 있다는 거야. . _31~32쪽
그러므로 책들은 고요해진 언어의 대양에서 일어나는 파도 같은 것이다. 책들은 포말처럼 솟구친다. 책들은 살아 있는 구어를 묵묵히 독서하는 사람의 몸 안의, 내부의, 가장 깊은 곳의 세계에 죽어서 유령이 된 상태로 묻어서 은닉한다. _74쪽
문법학자 퀸틸리아누스라면 라틴어 동사 ‘adsimulari(비슷하게 만들기)’보다 의당 ‘suum facere(제 것으로 취하기)’라는 표현을 선호할 것이다.
‘동일자를 복사하기’나 ‘다른 것이 되기’가 아니라, 저 자신이 아닌 무엇을 ‘제 것으로 만들기’의 문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soi 안에 ‘자기soi’는 없고, 몸에 맞게 ‘제 것으로 만들기’가 있을 뿐이다.
독서는 합병한다. _97쪽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한다. 글의 발명이 불의 발견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그야말로 인간의 혁명이라고. 구어의 표기법은 어느 것이나 인간 집단의 심장이라 할 집단의 언어를 객관화시켰다는 점에서 ‘의인화’ 혁명이었다. [……] 프로메테우스는 하늘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공중에서 언어를 훔쳐 글 속에 묻었다. [……] 문인(fur)도 죽은 문인들—세계의 상류를 이루는 모든 망자들—에게서 그들의 탐구가 묻힌 글을 훔쳤다. _106~1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