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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26일, 토요일, 맑음
초등학교 동창 가족들과 함께 하기로 했던 곰소풍날입니다.
9시 50분에 모이기로 해서 성남학교 운동장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10시가 되어도 아무도 오지 않아,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갔지요.
10분쯤 지나서 친구 하나가 전화를 해왔습니다. 그렇게 두 가족 남정네들만 다섯이서 곰소풍을 시작했습니다.
성남학교 운동장이라 염밭에 대한 전설을 간단히 설명했습니다. 후백제 견훤이 도읍을 정하려고 했으나 지렁이의 화신인지라 소금과는 상극이라 포기했다는 전설에 아이들의 반응은 시큰둥 한 것 같았습니다.
안림동에 소래포구 건너편 부뚜막 옆에는 골목이 하나 있습니다. 예전부터 있던 그길을 첫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골목길을 걸리면서 자근자근 조근한 이야기들과 함께 실핏줄처럼 얽혀진 공간체험을 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진은 친구 아들 정우진과 제 작은녀석 김수영으로 골목 입구에서 한 컷 찍었습니다. 바로 이어진 골목 첫집은 친구집인데, 아크릴 문패에 친구 이름이 선명히 새겨져 있고, 아이들도 아는 이름이라 아빠 이야기가 거짓이 아닌 사실이라는 확증을 갖고 출발하게 되었지요.
10여미터 첫 골목을 빠져나와 아이들이 주목하고 있는 저 곳은 제가 태어난 집자리입니다. 아빠가 태어난 자리라는 말에 아들들은 약간 의외라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녀석들은 모두 병원에서 났는지라, 왜 병원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눈치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동서남북 사방 길가름의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동촌(東村)이라 불리는 그곳은 충주읍성, 관아공원을 중심으로 놓고 성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과 또는 섬말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길과 개울로 섬처럼 경계지워진 곳이라 [섬말]로도 불리고, 쓰기는 도촌(島村)이라고도 쓰인다는 설명을 곁들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진 샘 자리와 그 옆에 살던 친구 얘기를 동행한 창용이와 주고받으며 동촌 골목길을 걸었습니다. 그 안에는 동촌목공소가 있었는데, 거기 역시 딸기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 집이었습니다.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그 집에는 [동촌목공(東村木工)]이라는 작은 문패가 붙어있어 아이들에게 다시 한번 동네 이름을 확인시켜 줄 수 있었습니다.
용산동 박샘입니다. 친구 창용이 집이 박샘 옆이었던지라 이곳부터는 창용이의 어린 날 기억에 대한 설명이 많았지요. 용산동 박샘은 충주 시내에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샘입니다. 그리고 이 샘 뒤에도 개인 샘이 있었다고 하고, 골목골목에 샘이 많았다는 얘기도 합니다.
마침 박샘에는 빨래나온 아주머니 두 분이 있고, 고향에서 고향찾은 창용이의 옛 얘기와 어우러져 장단을 맞췄지요. 아이들도 바가지 얻어 물도 떠보고, 다만 우리 아이들은 두 세번 데리고 들렀던 곳이라 큰 흥미는 못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박샘을 지나 다시 접어든 골목에는 창용이 아들 우진이가 먼저 발견한 '박샘방앗간'이 있었습니다. 본래 길 건너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앞으로 옮긴 방앗간은 동네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며 소박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박샘수퍼'도 있었고 해서 박샘 주면의 상권(?) 형성에도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박샘방앗간 건너에 있는 옛집입니다. 낡고 헐어졌지만 옛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어 저도 창용이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길을 걸어 통일교회를 지나고 전매청길로 접어들었지요. 모퉁이 수퍼(시온수퍼)가 친구 장모께서 하는 곳이라 들렀는데, 두 달 전에 가게를 접고 주인이 바뀌었네요. 아이들에게 음료수를 사 멕이고, 칡냉면집 뒤에 있었던 중국집을 기억하는지 창용이에게 물었습니다. 기억에 없다고 하는데,,, 그 집 이름이 경화루(?)였나 저도 정확하게 기억을 못했습니다. 다만 아이들에게 저 곳에 짜장면집이 있었고 할아버지가 처음 짜장면을 사주셨던 곳이고 그 이후로 아빠가 짜장면 대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사진은 용산 파낸 자리에 체육공원 공사를 하는 모습입니다. 동네 이름을 아이들에게 물었지요?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지만, 용산동에는 용산이 있다. 용산이 어디 있을까? 물론 몇 년 전에 파냈기 때문에 용산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 이 곳이 용산동의 유래가 되는 용산이 있던 자리라고 설명만 해 주었습니다.
용산을 설명하고 건너편에 있는 제건조장 자리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충주가 제일 유명한 게 뭐지? 했더니, '사과'랍니다. 그래 사과가 유명해지기 전에 예전에 충주가 유명했던 게 '황색연초'라고. 연초는 담배를 얘기하는데, 담배에 들어가는 담뱃잎을 말하는 거라고. 그랬더니 창용이가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잘라서 뜯어보이며 담뱃가루를 보여주며 설명을 했습니다. 아이들을 앉혀놓고 설명하는 모습이 하 진지해 한 컷 찍었는데, 아쉽게도 연초조합 조차도 옮겨진 뒤라 말로만 설명해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합 앞에 세워졌던 경작기념비는 노루목으로 몇 년 전에 옮겨졌다고 합니다.
골목을 다시 걸어 지곡다리에 섰습니다. 원래는 남산학교쪽으로 사천개를 따라 올라갔다가 내려오려고 했으나 아이들의 지루함이 시작되어 한 코스를 줄였지요. 사천개에 대한 전설과 이 개울을 사천개라고도 부른다는 설명을 해 주었으나 아이들은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 건너편의 남부시장으로 들어가 이것도 시장이라 보여주고, 간편 몇 개를 보며 동네 이름을 찾아보라는 길거리 퀴즈로 대체했지요.
지현동에 있는 [충주사과유래비]입니다. 2005년 2월에 제막식을 가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눈여겨 보지 않다가 이번에 처음 들러 앉아 쉬기도 했습니다. 직전에 황색 연초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는지라 충주사과에 대한 이야기는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5년 이맘 때쯤 사과다큐멘터리 촬영 때문에 일본에 갔던 이야기를 덤으로 들려주었습니다. 부사(후지)가 주종을 이루는 사과 품종이고 그 나무를 처음 육종에 성공시킨 원목이 있는 곳이 모리오까입니다. 소위 그곳에 있는 동북7호 시험장인데, 거기에는 후지 원목이 한 그루 있습니다. 2005년 방문 당시에 65년 수령을 기념하는 문구가 있어서 그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이해시키기 위해 할아버지 나이와 비교해 주었습니다. 할아버지 나이보다 두 살이 더 많은 나무가 있고, 다시 유래비 옆의 설명에 등장하는 국광을 확인시키며 아오모리 사과시험장에 갔을 때를 이야기해 줬지요. 그곳에는 2005년 당시에 102년된 국광나무가 여덟그루 보존되고 있었습니다. 그 나무가 지금은 몇 살일까?라는 단순 산수문제도 내주었고, 그렇게 오래된 사과나무가 있다는 것에 아이들은 약간의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사과나무를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이야기와 함께 옛것을 무조건 버리고 없애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도 해줬지요.
사과유래비 옆에는 정자가 마련되어 쉴만한 그늘이 있습니다. 거기에 잠시 앉았는데, 마침 담 너머에 아주까리가 한 그루 서 있습니다. 아주까리, 피마자, 기름도 짜고 하면서 아주까리 얘기도 해주었지요. 우진이가 선뜻 하나를 따왔습니다. 익지 않은 녀석인데, 익은 것으로 다시 따오고 껍질을 까서 아주까리 씨도 보여줬습니다. 기예 잎도 한 장 따오더니 머리에 써봅니다. 어릴 때 나오던 만화영화 개구리 왕눈이를 연상시켜서 귀여움에 추억에 한 컷 찍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바람이 불어 참나무에 스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창용이가 아이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저 소리 들리지?' '네' '저게 무슨 소리야?' '바람소리요' '바람이 소리가 날까?' '...' 어려운 선문답에 아이들은 말문이 막혔고, 잠시 쉬며 한동안 계속 생각하게 하는 오늘의 화두를 하나 잡은 기분으로...
사직산을 오르려다가 생각을 바꾸고 '째즈와 산조'를 지나 빙현쪽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에 노란 탱자가 있어 한 컷 담았습니다.
빙현다리 앞에서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었습니다. 그리고 사직산에 대한 설명을 했지요. 어려운 낯선 개념이 쉽게 다가오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하!~ 종묘 사직을 지키셔야합니다'를 여러번 반복하며 종묘와 사직을 말로 설명해 주었지요. 그리고 옛날에 여름에는 얼음을 어떻게 구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지요. '냉장고요'라는 답이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전기가 없었고, 냉장고도 없었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한자로 얼음이 뭐지? 했더니 큰놈 설영이가 '얼음 빙'합니다. 그럼 창고는? '창고 고' 그래 맞다 '빙고' 너희들 빙고 게임알지? 그 빙고랑 같은 글자인데 여기가 얼음창고(굴)이 있던 곳이라 이곳 이름이 빙현, 그리고 다리는 '빙현다리(빙현교)'라며 현장에서 '빙고' 게임을 했습니다. 건너다본 도로명 표지판엔 '얼음고개 2길'이라 씌어 있어 그것과 빙현교를 함께 확인시키며 충주의 얼음 창고와 사직산의 개념을 설명해 주었지요. 아이스크림을 사멕이면서 말입니다.
공설시장, 무학시장에 들어섰습니다. 마트와 시장의 차이를 설명해주는 창용이 말에 덧보태서, 무학시장을 들어서며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했죠. '너희들이 둘러보면서 제일 먹고 싶은 것 하나만 골라. 시장에는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미꾸라지 살아 움직임에 아이들의 관심이 제일 컸습니다. 아마도 사내아이들이라 그랬는가 싶기도 합니다. 둘러보며 순대골목을 지났는데, 오랜 만에 들른 그곳은 순대와 만두가 반반 섞여 있었습니다. 예전같은 돼지 냄새는 줄었고, 얘기듣기는 순대 장사보다 만두가 더 유명하다고 합니다. 여기 쯤에서 아이들 점심을 해결하려고 생각했는데, 음료수에 아이스크림에 중간중간 용얭이 거리를 챙겨 먹은지라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하네요. 시장통을 걸으며 성충문구에 들렀습니다. 간판을 보고 아이들이 먼저 '어! 성충문구다'합니다. 준비물 사러 안림동에 있는 성충문구에 들러본 경험들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문구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주인아저씨께서 손님과 얘기 중이셨습니다. 오후 탁본에 필요한 먹물을 하나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안림동에 있는 성충문구' 라디오 광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멋모르는 성우가 읽어댄 '안림동'에 대한 껄끄러움을 주인 아저씨도 공감을 하고 계셨습니다. 가게 내력을 여쭤봤죠. 1967년에 시작해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고, 안림동에 새 매장을 냈지만, 당신은 그 자리에서 그냥 유지하고 있기로 했다고. 안림동은 사위가 운영을 하고 있는데, 그곳이 모나미 중부지역 총판이어서 사방에서 오는 손님들이 많다고 합니다. 특히나 경기도, 춘천에서도 오는데 이유는 서울 시내에 들어가서 복잡한 교통 때문에 길에서 시간을 허비하느니 충주로 오면 훨씬 편하다는게 알려졌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청주도 없고 여기 충주가 총판이라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정보다 오래 머물며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삼화대장간을 들렀습니다. 얼마전 우륵문화제에 노부부가 나와 계셔서 잠깐 인사를 드렸었는데, 오랜만에 찾은 대장간은 옆 가게를 터서 조금 넓어졌습니다. 잠시 쉬시던 아저씨는 연탄집게 만드는 일에 집중하셨고, 아이들은 그 모습을 보며 신기해 했죠. 또 이것 저것 칼이며, 도끼며, 호미며, 고무래며 등등의 농기구들을 만져보며 잠깐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올라와 북문다리로 향했습니다. 저잣거리가 형성되고 그 마당마당 주로 취급하는 물건들이 있어서 고추전, 싸전, 옹기전 등의 이름이 따로 붙어 있기도 했다는 얘기와, 충주읍성의 북문 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북문다리라고 불렀다는 얘기 등등.... 하지만 북문다리로 알고 있던 그 다리는 '예성교'란 이름으로 세워져 있었습니다.
사진은 향교 앞입니다. 묵문다리를 건너 교현학교 앞으로 갔습니다. 해동고전연구소의 서원장님께 탁본 도구를 부탁해놓았는지라 그걸 찾아서 향교로 갈 예정이었습니다. 교현학교 강당을 가리키며 처음 만들 때는 그 자리가 연못이었고, 연못을 메우면서 용이 나와 용을 죽였는데, 그 때문인지 예전에 소풍갈 때면 교현학교 소풍날은 비가 내린다는 소문이 있었다는 전설을 들려주었습니다. '정말 용이 있어요?'라며 되묻긴 했지만, 아이들은 새로 단장한 교현학교 운동장의 잔디에 대한 부러움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교현학교를 지나 뒤에 있는 성공회를 들렀습니다. 낡은 옛 건물을 보여주며, 옛날에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 때면 여기에 오셨었는데, 떡을 줬기 때문이란 설명에 의아해 하는 눈치였습니다. 다만 이렇게 오래된 건물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켰지요.
향교에 도착해 간단한 설명을 해주고는, 탁본 체험을 시켜주기 위해 도구들을 펼치고 탁본 준비를 했습니다. 아쉽게도 솔이 뭉개졌고, 종이가 문제가 있어서 제대로된 탁은 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탁본을 하려고 하는 과정을 보면서 아이들의 관심이 조금 살아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관아공원으로 향했습니다.
옷솔에 문제가 있어 옷솔을 사러 자유시장 중간까지 갔다가 왔습니다. 오는 길에 보문당에 들러 문창호지 다섯 장을 새로 샀고요. 새로 사와 붙인 종이는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아이들은 축성사적비에 물뿌리는 일을 맡아 연신 물을 담아 뿌려댔고, 종이를 붙이면 종이위에 다시 물을 뿌리느라 한동안 재미있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분무기로 물총 싸움도 하곤 했는데, 앞면 탁을 해놓고 뒷면을 준비하는 사이 먹방맹이로 우진이가 한번 더 두들긴 탓에 번져버렸습니다. 그래도 알아볼 정도는 되어서 둘레 3950척, 두께 25척, 높이 10척, 경천문(敬天門 : 북문), 봉아문(鳳阿門 : 남문), 조양문(朝陽門 : 동문), 휘금문(輝金門 : 서문) 등의 사적비 내용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 동수마루님께서 근무라 한적한 토요일 오후 공원에서의 도둑탁에 공범을 만들게 되었고 소위 장물인 탁은 동수마루님께 드렸지요. 그리고 지루해하던 아이들은 대충 탁이 끝난 뒤에 세 녀석이 집으로 향했고, 저랑 친구 창용이는 뒷정리를 하고 동수마루님이 아끼는 차 대접을 받으며 피곤한 발을 잠시 쉬었습니다.
잔디밭에 널어놓아 말린 탁을 접으며 동수마루님 가방에서 꺼낸 점심 도시락에는 김밥 세 쪽이 남아 있었습니다. 한 쪽씩 나눠먹고 대포 한 잔 하기로 골목에 들어서 시원한 맥주로 대신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생각한 소위 [곰소풍]의 뒷이야기 제목을 [바람소리에 김밥 세 쪽]이라고 정했다고 했지요.
10시 40분부터 시작해 5시에 끝난 실험적인 곰소풍은 [바람소리와 김밥 세 쪽]이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시내 길 걷기도 괜찮은 발품팔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요.
첫댓글 어 ! ??????
곰돌님 잘 들어 갔는감?
하루 발품 팔이에 모든 피로가 발로 다 모인 것 같습니다. 못지않게 끌려다니느라 고생한 아이들도 피곤할 터인데, 녀석들은 아침부터 교회에 다녀오고 친구들 불러 뛰어놀고,,, 역시나 배터리 선전처럼 무척 강한 에너자이저임을 확인했습니다. 어제 여러가지로 도움 주셔서 고맙습니다.
글을 일고 옛 충주 모습을 떠오려 보았습니다. 근대사을를 정리하여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세대의 몫 같습니다.정감 넘치면서 무언가 생각을 하게하는 글이네요. 참 아이들이 대견하네요. 언젠가는 아빠의 마음을 알겁니다.같이 마신 생맥주가 지금도 시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