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것들
이상기
제주 새별오름의 추억이 지워지지 않는다. 멀리서 보기에는 그저 아담한 동산이었는데 가까이 다가설수록 감탄이 절로 나오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바람은 억새들을 흔들고 억새꽃은 일렁이며 온 산 가득 은빛의 파도를 만들고 있었다. 누웠는가 하면 일어서고 다시 눕고 일어서 파도를 만들어 냈다.
억새와 함께 흔들리며 정상에 오르니 어느새 내려앉는 해는 붉은 노을을 만들고 은빛파도는 황금물결로 바뀌었다. 모든 것이 함께 출렁거렸다. 흔들리는 것이 가슴 벅차게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 수 있음을 알게 된 첫 경험이었다.
삶이란 언제나 흔들림의 연속이다. 불안과 안도, 슬픔과 기쁨, 미움과 사랑, 도전과 포기, 지속과 중단 등 상반된 것 사이에서 늘 흔들리며 산다. 흔들린다는 말은 개인의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강이 흔들린다, 경제가 흔들린다, 민심이 흔들린다, 등 무언가 불안하고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사회현상에도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거나 ‘중심을 잡아야지.’ ‘리더십이 중요하다.’ 등 흔들리는 것에 대비하거나 흔들리지 않게 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다면 바람의 고장 제주에서 억새가 살아날 수 있을까?
억새뿐일까? 코스모스는 어떤가? 가녀린 목의 백배는 넘을 꽃의 무게를 이고 가을바람을 견디어낸다. 바람 따라 휘청 몸으로 무게와 속도를 받아 낸다. 흔들려야 부러지지 않는다. 갯가 바람에 쉼 없이 움직이는 갈대도 마찬가지다. 흔들린다는 것은 바람에 누웠다가도 다시 일어나는 상태가 반복되는 것을 말한다.
‘갈대의 순정’이란 노래가 있다. 여기서 갈대의 순정이란 ‘흔들리는 사랑’을 뜻하는 것일까? 아니면 ‘일편단심 변하지 않는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
흔들리는 것에는 중심이 있다. 시계추도 오뚝이도 중심이 있어 흔들릴 수 있다. 억새나 갈대의 뿌리는 뽑아내기가 힘들 정도로 길고 튼튼하다. 그들은 베어내도 다시살고 태워도 다시 산다. 억세기 때문에 억새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흔들리지만 굳건한 중심이 있는 것이다. 강풍에 부러지는 나무같이 부러져 누우면 끝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시련에도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소나무는 언제나 푸르다. 하지만 소나무가 자라는 곳에가 보면 떨어진 솔잎들이 땅을 덮고 있음을 보게 된다. 특정한 계절에 낙엽을 떨어뜨리지 않지만 소나무도 낙엽을 만든다. 마치 숨어서 흘린 눈물 같기도 하다. 눈이 많이 오는 날 산에 오르면 소나무 꺾이는 소리에 놀라곤 한다. 가벼운 눈이지만 솔잎에 한 송이 두 송이 싸이는 눈의 무게가 큰 가지를 무참하게 부러지게 한다. 휘지 않는 대신 부러지는 절개를 보인다.
변함없는 모습의 소나무를 닮으라고 배웠고, 닮으려 노력해왔다. 하지만 소나무 같은 삶은 행복할까?
사나이는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슬퍼도, 기뻐도, 두려워도, 노여워도 괴로워도 그 감정을 보이는 것보다 감추는 것이 미덕인양 살아 왔다. 남자이기 때문에, 가장이기 때문에, 책임자이기 때문에........
이런 저런 ‘때문에’를 이유로 뛸 듯이 기뻐하거나, 눈물 흘려 슬퍼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흔들리면 얕은 뿌리가 보일세라, 주어진 책무에 지장을 줄까봐 꼿꼿함만 보이려 노력했다.
식물은 통풍이 중요하다고 한다. 바람이 통해야 식물은 흔들릴 수 있고 숨을 쉴 수 있다. 흔들리는 것은 갈대와 억새뿐이 아니다. 살아있는 촛불이 움직이고, 압력이 꽉 찬 소방 호스도 용트림을 하려한다. 바다도 일렁이고, 바람도 미풍과 폭풍사이를 오간다.
살아 있는 것들은 흔들린다. 이제부터라도 흔들리는 삶을 경험하고 싶다. 흔들리면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다. 땅에도 앉아보고, 펄쩍뛰어도 보고, 즐거울 때는 웃고, 슬플 때는 눈물을 흘리는 흔들리며 사는 삶을 살고 싶다. 흔들림으로 경험하지 않던 각도에서 세상을 보고 싶다. 희끗한 머리카락만큼이나 뿌리가 자라나 중심을 이루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는 흔들려도 중심을 잃을 것 같지는 않다.
제주 새별오름의 추억 속에 흔들리는 억새가 만드는 황홀한 잔상이 내내 나보고도 흔들려 보라 손짓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