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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학살과 관련된 대한민국 제1공화국 군인들 | |||||||||||||||||||||||||||||||
탁성록
1. 개요2. 일생 2.1. 일제강점기 및 광복 직후2.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3. 대중매체에서 3.1. 제2공화국3.2. 야인시대 4. 여담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군인, 경찰공무원. 만주의 일본 제국 관동군으로 자원입대하여 독립군을 무차별하게 토벌했으며, 광복 이후에도 출세하여 여수시민들을 여순사건 가담자로 몰아서 다른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일본도로 목을 치고 지치면 권총으로 쏴 죽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만큼 잔혹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같은 친일파 일본군 출신 군인인 김창룡보다 한 술 더뜬 인간이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전시 상황에서 보여준 작전 능력도 형편없었는데, 노병들은 김종원에 대해 "학살에는 귀신, 전투에는 등신"이라고 했으며, 미국 군사고문단 보고서는 "부하에게 가혹하였고 전투에 비겁했던, 전술적 두뇌가 없었고 부하 장병들로부터 원성이 높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6.25 전쟁 당시 그가 지키고 있던 영덕은 하루 만에 북한군에 빼앗겼으며, 미국 군사고문단의 기록에 의하면 "(김종원이) 끝없이 후퇴하여 전투 때마다 어디론가 사라진 연대장을 찾느라 힘들었다"고 했을 정도였다. 2. 일생[편집]2.1. 일제강점기 및 광복 직후[편집] 김종원은 1922년 7월 8일 경상북도 경산군 경산면 중방동(현 경산시 중방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학교를 정확히 어디 다녔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40년 일본군에 하사관으로 자원입대하여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필리핀과 파푸아뉴기니에서 일본 군복을 입고 전투에 임했다.[2] 열대우림에서 일본군과 연합군은 질긴 소모전을 이어나갔고, 연합군은 일본군의 보급을 끊는 방법을 자주 썼다. 이에 일본군은 원숭이를 잡아먹고 인육을 먹으면서 버텼지만, 굶어죽는 이가 속출했다. 참고로 김종원은 이때 인육을 먹었다는 얘기를 자랑스럽게 하고 다녔다고 한다. 일제 패망 이후 한국으로 복귀한 김종원은 1946년 서울 동대문경찰서 교통과장으로 근무하다 같은 해 남조선국방경비대[3]가 창설되자 장교로 복무했다. 그러나 이미 경찰에 있을 때부터 부하 경찰과 체포된 사람을 심하게 폭행하는 등 악행으로 원성이 높아 자주 보직에서 해임되곤 했으며, 1947년 9월 25일부터 1948년 6월 20일까지는 파면 상태에 있기도 했다. '육사 졸업생'을 쓴 장창국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품행과 학업이 불량하여 퇴교 대상에 올랐으나, 민족의식이 강한 한 생도가 일본군 하사관 출신들과 반목 끝에 자퇴하여 김종원이 졸업할 수 있었다고 한다. 2.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편집] 출처 - 경남도민 일보 잔악한 기질로 미국 군사고문단에게도 미운 털이 박힌 김종원은 초대 국군 총사령관인 송호성[4]의 배려로 군에 복귀하였고, 때마침 일어난 여수·순천 10.19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역량을 증명할 기회를 얻었다. 1948년 10월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고, 순식간에 여수와 순천 일대를 장악했다. 당시 5연대 1대대장이었던 김종원은 경상남도 마산시에 주둔하고 있었고, 14연대에게 장악당한 여수시를 탈환하기 위해 7척의 경비정에 분승한 뒤 23일 오전 9시 40분 함포 사격 속에서 상륙작전을 펼치나, 무모하게 상륙을 감행해 많은 부하를 살상시킨 채 돈좌되었다. 이후 10월 26일 진압군 본대가 장갑차와 박격포 포격을 앞세우며 여수 신항을 통해 여수시내로 진입할 즈음 김종원의 1대대도 상륙을 하면서 박격포 공격을 했는데, 문제는 이게 같은 진압군인 12연대 수색대에 떨어져 중대장과 하사관이 전사했다.# 직후 이를 만회하겠다고 자신의 부대로 하여금 돌산섬 등지를 여기저기 수색하게 하였지만 허탕을 쳤고, 이를 본 미국 군사고문단은 그의 작전 능력을 형편없다고 평가했다. 이후 진압군이 여수시내에 진입했을 때 14연대는 이미 지리산 일대로 퇴각한 상태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압군은 여수 일대에서 부역자 색출을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김종원은 그 잔악한 기질을 마음껏 드러냈다.
군사고문단이 진압사령관 원용덕(元容德) 사령관에게 넘겨준 작전은 '4F 작전'으로서 '찾아서, 묶어둔 후에, 공격하여, 끝낸다(Finding-Fixing-Fighting-Finishing)'는 뜻이었다.('하우스만 증언'·184쪽) 4F 작전의 하수인은 세칭 백두산 호랑이인 김종원이었다. 전직 관동군 헌병 출신이었던 그는 여수 시민들을 공설운동장에 집합시켰다. 영문도 모르는 시민들은 날씨와 농사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김종원은 시민들에게 팬티만 입힌 상태에서 총살시키거나 철사로 손가락을 묶어 오동도 앞바다로 밀어넣었다. 자신이 차고 있던 일본도로 직접 피의자의 목을 베고 한자리에서 7~8명을 처형했다.당시 여수중앙국민학교 운동장에는 시민들을 모아 놓고 부역자를 색출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는데, 이때 젊은 남성 가운데 손바닥이 투박하거나 군용 팬티를 입고 있거나 머리가 짧은 사람은 부역자로 몰려 죽었다. 이에 질세라 김종원은 학교 운동장 한 켠 버드나무 밑에서 시내에서 따로 끌고 온 사람들을 일본도로 목을 베고, 베다 지치면 권총이나 소총으로 사격시험을 하듯 죽였다. 이때 희생자가 대충 100여 명이란 설이 있다. 또한 참수한 용의자의 목을 자루에 담아 미군 고문관에게 선물하여 대경실색하게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어느 골목에서 마주한 청년들을 모두 현장에서 일본도로 베는 등 마치 분풀이를 하듯 사람들을 죽여대기도 했다. 여순사건을 진압한 그는 이듬해(1949년) 소령으로 승진해 부연대장을 맡았고, 그해 8월에는 연대장에 올랐다. 그는 3사단 휘하 23연대 지휘를 맡았는데, 23연대는 영남지역 빨치산들을 토벌하기 위해 조직한 부대였다. 그는 부대를 이끌고 여수, 제주도, 지리산 일대, 거제, 양산, 포항, 영덕, 경주, 울산, 고령 등을 돌면서 빨치산을 토벌했는데, 이 과정에서 무수한 민간인들이 희생당했다. 이 가운데 영덕, 거제, 산청에서는 그가 저지른 학살이 기록되어 있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일부의 증언이 남아 있다. 구체적인 피해자 숫자와 기록이 남아있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영덕~영해 등 경북 동부지역에서는 김달삼이 이끄는 빨치산 부대가 활동하고 있었으나, 1949년 대부분 토벌당한 상태였다. 그러나 1950년 3월 김종원은 23연대를 이끌고 영덕에 주둔하였고, 1950년 3월 14일 영덕 중곡동에서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된 3명을 처형했다. 이때 심문이 아직 끝나지 않은 영덕경찰서 유치장 구금자 33명을 끌고 나와서 처형 광경을 지켜보게 하였다. 이때 처형당하던 한 명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자, 이에 분노한 김종원은 이를 지켜보고 있던 33명 가운데 31명을 학살했다. 군인이 뒤에서 총을 쏘면 파놓은 구덩이에 한 명씩 떨어지도록 했는데, 그는 이것이 답답했는지 별안간 직접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시신의 내장이 튀면서 현장은 난장판이 됐고, 그걸 지켜본 사람은 며칠 동안 식사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종원은 1950년 7~9월 일어난 마산·부산형무소 재소자 학살에도 개입했다고 한다. 김종원은 미국 군사고문단에게 "만약 북한군이 부산까지 쳐들어오면 형무소 재소자 3500명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미국 군사고문단은 그를 만류하면서 "적이 부산 외곽까지 쳐들어와야만 기관총으로 사살해도 된다"고 했다고 한다. 결국 미 고문단의 묵인 속에 부산형무소에서 1500명, 마산형무소에서 최소 717명, 진주형무소에서 최소 1200명 등 3400명의 재소자와 구금 중인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당시 김종원은 헌병부사령관 겸 경남지구위수사령관, 부산지구 헌병대장, 경남지구계엄사령관을 역임했다. 1950년 8월 24일 양산 동면, 원동면, 물금면, 웅상면, 북면, 양산면, 하북면 등 7개 면 20~50대 주민 약 700여 명이 김종원 부대, 23연대, 경찰에 의해 학살됐다고 한다. 또한 1951년 3월 김종원은 11사단 예하에서 부대를 이끌고 있었는데, 김종원 부대는 피난민 약 500여 명을 버스 11대에 태우고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점동 사이에 있는 소정 골짜기에 내리게 한 뒤 모두 사살해 버렸다고 한다. 이를 '산청 외공리 학살'이라고 한다. 참고로 당시 오랜 빨치산 활동과 토벌의 반복으로 피난민 가운데 성인 남성은 거의 없었고 아녀자와 어린이 등이 대부분이었다. 김종원은 빨치산 토벌을 하면서 자신을 '백두산 호랑이'로 자칭하고, 자신의 부대를 '맹호부대'라고 칭했다. 이에 미국 군사고문단도 그를 '타이거 김(Tiger Kim)'이라고 불렀다. 아직도 김종원 부대가 머문 지역 시골 어르신들은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을 기억할 정도로 그의 악명은 높았다.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이 온다고 하면 울던 아이도 그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다만 실제 미군 기록에서 호랑이 장군이라고 불린 지휘관은 딱 이한림과 한신(국군) 딱 둘이었는데, 김종원이 타이거 김이라 불린 기록은 없다.# 거창 양민 학살사건 당시 3월 김종원은 산청군 외공리에서 500명의 민간인을 죽이기도 했다. 이중 거창 학살사건에서 용케 생존자가 있었다. 생존자는 11사단에게 학살당한 사실을 알렸고 국회에서 진상조사단이 꾸러져 현장에 내려왔다. 그러자 김종원은 학살을 은폐하기 위해 국군 1개 소대를 빨치산으로 위장해 현장으로 가던 국회의원들을 기습했다. 빨치산을 토벌한 그가 빨치산 시늉을 한 것이다. 이후 그대로 묻히는 듯 하였으나 외신들의 대대적인 언론보도[5]로 재수사가 진행되어 이 어설픈 작전은 곧 들통났고, 김종원은 징역 3년 형을 받게 된다. 6.25 전쟁 당시 동해안 방면의 8사단이 육군본부에서 내린 명령 때문에 원주-제천 방면으로 후퇴해버리자 그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대구-부산을 담당하는 3사단 23연대가 차출되어 동해안 방면으로 올라가 북한의 공격을 막았는데, 이때의 23연대장이 김종원이었다. 그러나 1개 연대로 북한의 최정예 5사단[6]과 예비사단인 인민군 12사단은 처음부터 중과부적이었다. 그 바람에 연전연패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적의 공격을 몸빵으로 막아내면서 선전하였다. 계속 후퇴하던 중 경북 영덕군 봉화까지 후퇴하였을 때 김종원 중령의 23연대는 인민군과 7월 19일부터 공식 기록상으로만 4번 뺏고 빼앗기는 격전을 반복한다. 그러다 7월 25일경 사단장 이준식 준장으로부터 봉화의 181고지를 재탈환하라는 명령을 받는데... 23연대장 김종원 중령은 자기 연대가 181고지를 적에 빼앗기고 탈환 공격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소대장을 즉결처분하고 사병 1명도 즉결처분했다. 미군 고문은 이런 김중령의 처사를 못마땅히 여기고 상부에 건의하여 그를 해임케 했다. 원래 김종원 중령은 6.25 전에도 미 고문관 구타 사건으로 군을 떠나 경찰에 투신했다가 적의 남침 후 다시 군에 복귀했는데, 그 후에도 미 고문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었다.김종원은 단순히 민간인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하들도 서슴없이 죽였다. 특히 그는 즉결처분을 즐겼다. "김종원이 자신의 부하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있다. 어젯밤에는 미군 전초기지에서 총질을 했다. 총 개머리판으로 부하를 구타하고 영덕에서 후퇴하는 사이 실종됐던 장교를 사살했다. 부하들이 김종원을 먼저 제거하지 않는 한 또다시 총질할 것으로 보인다."또한 육사 8기 장교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종원이 23연대에 일본군식 '반자이 돌격(전멸을 각오한 단순한 정면 돌격)'을 지시했을 때 작전장교였던 중위가 이를 반대하고 우회 돌격을 제안하자 옆에 있던 헌병에게 작전장교를 바로 총살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작전장교가 바로 권총을 뽑아들고 헌병과 권총을 겨누고 대치했다고 한다. 심지어 미국 군사고문단이 보는 앞에서 부하를 죽이기도 했다. 그 시절 김종원은 차를 타고 다니다가도 자신에게 경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인을 가혹하게 폭행하기도 했다. 미국 군사고문단의 보고서에는 무능하지만 포악하기만 한 그의 실책이 자주 거론되고 있다.
김종원은 언론사에게도 두려운 존재였다. 그는 언론에 보도된 자신의 부대 기사를 반드시 챙겨 보고 자신을 '타이거 김, 백두산 호랑이'로 쓰도록 했다. 1950년 부산에서 헌병부사령관 겸 경남계엄지구 민사부장으로 있을 당시 부산 언론은 김종원과 관련된 기사를 항상 1면에 배치해주었다. 그러나 부산으로 피난 온 서울 언론들은 김종원의 기사를 전진 배치시키지 않았을뿐더러, 김종원이 병사 단속을 잘 못한다는 비판 기사를 쓰기도 했다. 격분한 김종원은 당시 연합신문 부국장과 기자를 불러 중태에 이르도록 폭행했다. 결국 기자들의 항의로 이승만 대통령까지 나서 사과를 해야 할 정도로 기자들의 김종원에 대한 반감은 높았다. 하지만 그의 든든한 후원자로는 이승만이 있었다. 이승만은 김종원이 부산에 있을 때 그에게 직접 보고를 받는 일도 많았다. 이승만은 김종원을 아꼈고, 1952년에 국회의원에게 총질을 한 김종원을 특별사면하고 경찰 간부로 채용한다. 김종원이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을 때 군 내부에서 반대가 많았는데, 특히 이종찬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자 김종원 석방을 놓고 이승만 대통령은 직접 성명을 발표하기로 하고 초안을 마련했다. 초안에는 김종원은 애국 충정이 대단한 사람으로서 충무공 이순신과 견줄 만하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이후 김종원은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으로 부임했으며, 전라북도청과 경상남도청과 경상북도청의 경찰국장[7]을 재임하다가 1956년에는 내무부의 치안국장(1950년대~1960년대의 이사관급 경찰총수)으로 승진했는데, 각 도청 산하의 경찰국장으로 근무한 시기에도 그는 이런저런 말썽을 일으켰으니, 순시 도중 파출소장의 계급장을 떼어내어 안면이 있는 순경에게 달아주고, 부하 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경찰서장을 폭행하기도 했다. 경상남도청의 경찰국장으로 근무했을 때는 참모회의 석상에서 "인플레 때문에 시민들이 힘들다"는 말을 듣자, "당장 가서 인플레 잡아오라"는 황당한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승승장구하던 김종원에게 먹구름이 드리워진 것은 1960년 4.19 혁명이었다. 그를 아끼던 이승만이 망명하고 그를 지켜줄 보호막이 사라지자 다시 장면 부통령[8] 저격사건에 대해 조사가 이뤄졌다. 김종원에게 불리한 증언들이 나왔고 결국 김종원도 저격사건을 배후에서 지시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김종원은 4년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61년 12월 당뇨병으로 병보석을 받아 출감했고, 1964년 1월 30일 향년 42세로 사망했다. 죽을 때까지 자신이 저지른 짓을 조금도 뉘우치지 않았다. |
첫댓글 천하의 죽일놈
영겁의 세월간 반복해서 두고두고 업보 받을놈....
이승만을 국부라 부르는 무리들 모두가 공범 입니다
친일의 세력이 권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를 바로 세울수 없는 이유 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