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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묵상글 ( 12월 18일. - '그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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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12월 18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그날'
오늘 예레미야서는 “그날이 오면”을 얘기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런데 “그날이 오면”은 동서고금을 통해 많이 노래 된 시요 가사입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심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해방을 고대하던 심훈의 시가 있고
민주주의가 오게 될 것을 고대하던 민중가요 가사도 있고,
심지어 중국 공산당의 군가에도 이런 가사의 노래가 있지요.
‘그날’은 언젠지 모르지만 오기를 기다리는 날입니다.
‘그날’은 기다리지만 아직 오지 않아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희망의 날입니다.
그러나 어둠이 짙을수록 더욱 기다려지는 날이고,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지금의 모든 고통과 긴 어둠을 견디게 하는 날입니다.
그날은 이렇게까지 기다릴 만큼 값진 날입니다.
그 모든 고통을 다 견딜 만큼 값진 날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기다리는 날은 어떤 날이고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누구이고,
지금 우리는 어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진정 나는 기다리는 ‘그날’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날’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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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12월 18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아내를 맞아들였습니다.”(마태 1,24)
<제1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아는 주님의 오심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예레 23,5-6)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화답송>을 바쳤습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 72,7 참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이야기’입니다.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 탄생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마리아인데 비해, 여기 <마태오복음>에서는 요셉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태어날 아기는 요셉의 혈통에서 태어날 “다윗의 자손”(마태 1,31)으로 제시됩니다. 그리고 구세주 메시아의 탄생은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됩니다. 그렇다면, 요셉 그는 어떤 사람인가?
오늘 <복음>에서 그는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마태오복음>에서 “의로움”은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보살펴줌이요(25,34-40), 산상설교에서는 참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요(5,6), 하느님 나라와 함께 찾으라고 권유된다(6,33). 그러이 ‘의로움’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품행’과 관련됩니다. 그러니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믿되,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행동하되, 순명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실행하는 진정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아내를 맞아들였습니다.”(마태 1,24)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혼하기도 전에 아내를 포기해야만 했고,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구원의 협조자가 된다는 것은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는 “그분의 뜻” 안에 머물고, “그분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행위는 성령의 작용, 곧 은총에서 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모두 하느님의 도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서 활동하시도록 하는 도구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믿음과 순명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해,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마태 1,22)
그러니 우리 모두는 성 요셉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조력자요 협력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곧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좋으신 계획이 완성되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의심을 떨치고 신비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의 개입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기이하고 황당하게 보여도 ‘당신의 뜻’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게 보여도 ‘당신의 뜻’을 품고 살아가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뜻’을 세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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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12월 18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와 함께 계시다
오늘은 ‘예수’라는 이름의 뜻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본래 히브리어로 ‘예슈아(ישוע)’로써 ‘야훼는 구원이시다’(신명3,21)라는 의미입니다. 예수(ihsouς)는 ‘예슈아’(ישוע)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신약성경에 나오는 발음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 라는 뜻을 갖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1,21).라는 말로 그 뜻을 암시하였습니다. 죄에서 구원된다는 것은 우상 숭배나 이단뿐 아니라 노예살이로부터의 해방이며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로마3,23). 바로 ‘하느님의 영광’,하느님께서 주셨던‘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보면 ‘죄’라는 말은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모든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삽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악으로부터 해방을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임마누엘”(אמנוּאל) 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임마누(אמנוּ)라는 말과 엘(אל)이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로 ‘임마누’는 ‘우리와 함께 있다’라는 뜻이고 ‘엘’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두 말을 합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 됩니다.
이 이름은 이사야서 7장14절에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할 것입니다.”하고 예언되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항상 함께 계신다는 지식은 이스라엘의 신앙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특징이자 영광이었습니다. 과거에 그러하였듯이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미래의 삶에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성조들이 전쟁 중일 때, 판관들의 시대에 제사당에 모인 군중 속에,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기름을 부을 때, 예언자들이 사명을 수행할 때, 그리고 당신 약속을 지키시어 구원을 베푸실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생활을 할 때 함께 하셨고,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를 통한 구세주의 잉태를 알려 주었을 때도 함께 하셨으며 그 예언의 성취를 이룬 오늘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 삶의 여정에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함께하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내 힘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려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는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너의 구원자이다”(이사431-2). 하신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고 또한 내일을 열어주십니다. 함께하시는 하느님, 우리와 함께하시는 구원자 예수님과 더불어 그리고 그분의 영과 함께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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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12월 18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았던 국제행사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37년과 35년이 지난 행사입니다. 세계의 변방에서 이름 모르는 국가였던 대한민국은 이 두 행사를 통해서 국제행사를 치를 만큼 성장한 나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있었습니다. 주최국은 한국과 일본이지만 행사의 결과는 대한민국을 빛나게 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은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했습니다. 이즈음 스포츠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은 문화와 경제에서도 ‘한류’를 보여주었습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은 남과 북이 화해하는 ‘평화’의 올림픽이 되었습니다. 비록 성과는 없었지만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의 만남도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국제행사를 유치하거나, 진행하는 것은 새로울 것도 없는 뉴스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대한민국의 국가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눈떠 보니 선진국’이라는 말이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세계 최대의 도시 뉴욕에서 살고 있지만 삶의 인프라와 문화적인 역량은 서울이 결코 뒤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39년 전 평신도들의 모임으로 시작된 한국천주교회도 그 시작은 미미했습니다. 신앙의 뿌리가 내리기 전에 심한 박해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100년 동안 만여 명이 순교하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수호자인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마리아’의 도움으로 한국천주교회는 박해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세계의 변방에서 이름 모르던 가톨릭이었던 한국천주교회가 긴 어둠을 뚫고 꽃을 피우기 시작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1981년에 있었던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와 1984년에 있었던 ‘103위 성인 시성식’이 있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여의도에서 대규모 행사와 미사를 준비하였고, 완벽하게 행사를 마무리했습니다. 1989년에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있었습니다. 그전의 행사가 우리만의 행사였다면 세계성체대회는 전 세계 가톨릭을 초대한 명실상부한 국제행사였습니다. 2014년도에는 ‘아시아 청년대회와 124위 복자 시복식’이 있었습니다. 한국천주교회가 국제행사를 유치하거나 진행하는 것은 새로울 것도 없는 뉴스가 되었습니다. 서울은 2027년 세계청년대회를 주관하는 교구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유흥식 추기경님은 바티칸의 성직자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는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던 많은 분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역사의 변곡점에는 4,19구 혁명, 5,18 민주화 운동, 6.10 민주화 운동‘이 있었습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명언을 남긴 대통령도 있었습니다. 준비된 대통령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대통령도 있었습니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 땀 흘린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서독의 탄광에서, 중동의 사막에서 땀 흘린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한국천주교회가 있기까지 순교자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헌신했던 성직자와 신앙인들이 있었습니다. 자유와 민주를 위해서 투쟁했던 많은 젊은이들이 명동성당을 찾았습니다. 명동성당은 그들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명동성당은 그들에게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명동성당으로 진입하려는 경찰에게 김수환 추기경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 젊은이들을 잡아가려면 먼저 나를 잡아가시오, 그 다음에는 성직자들을 잡아가시오, 그리고 수도자들을 잡아가시오, 그래야만 저 젊은이들을 잡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찾았습니다. 예비자 교리반은 신청자가 줄을 이었습니다. 교회의 신자는 매10년 100만명씩 증가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먼저 찾는다면 우리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은 오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던 요셉성인처럼 우리들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가난한 이, 헐벗은 이, 굶주린 이, 외로운 이를 주님으로 맞아들이면 좋겠습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니,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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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12월 18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주님 탄생 예고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등장인물은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천사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셉에게 이야기의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복음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의로운 요셉은 마리아를 위하여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합니다.
‘의로운 사람’이라는 이 수식어는 분명 사회적 정의, 사회법에 따른 정의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절 사회 정의는 혼인하지 않고 임신한 여인에게 가혹했기 때문입니다. 넓은 광장에서 돌아 맞아 죽어야 할 운명이었던 것이 바로 혼전 임신한 여인들이 가야 할 법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러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생명의 길을 선택합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르는 의로움이란 사회 정의의 의로움이 아니라 생명과 사랑을 선택하는 의로움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의로운 결정을 했을 때 천사는 요셉에게 나타납니다. 그러고는 하느님의 뜻을 전합니다. 여기서 다시 요셉의 의로움이 빛을 발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듣고 바로 자기 뜻을 수정합니다.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맞는 길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의로움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의로움이고 이것이 하늘나라에 맞는 의로움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의로움의 길을 가기를 바랍니다. 사랑과 생명을 위한 의로움으로 우리 마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를 기도합니다.
연말 시상식
연말이 되면 여러 시상식이 열립니다.
가수 중에서 최고를 뽑기도 하고
영화 중에서 최고의 영화와 최고의 배우를 뽑기도 합니다.
모든 상이 소중한 상입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노력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상 중에
이런 상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해 상
(누군가를 열심히 이해하려 귀를 기울인 사람에게 수상)
동행 상
(누군가를 위해 묵묵히 걸어준 사람에게 수상)
따스미 상
(누군가를 따뜻한 마음으로 안아준 사람에게 수상)
우리가 모두 하느님께 이런 상을 받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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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12월 18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전에 자전거를 타다가 자동차와 부딪힌 적이 있습니다. 홀로 자전거 여행 중이었는데 차와 부딪힌 것이었지요. 너무 아팠습니다. 그런데도 이 차의 운전사에게 전혀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저의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 차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주자 중인 차였기 때문입니다. 그 차는 가만히 있는데, 제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부딪힌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 차 안에 사람이 있었고 또 운전 중인 차였다면 저 역시 화를 냈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그렇게 운전하면 되냐고? 차는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자전거 운전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을 모르냐고 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차 안에 사람이 없으니 온전히 저의 잘못입니다. 누구 탓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를 향해 화를 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꼭 화를 냈어야 했나 싶을 때도 있습니다. 물론 상대가 크게 잘못한 경우에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무조건 상대에게 책임을 물을 때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 자체를 지우고 그 상황만을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실제로 화를 낸다고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 화를 냄으로 인해 감정의 골이 깊어져서 상황이 더 꼬일 때도 많습니다.
전에 운전하면서 신호를 확인하고 좌회전하는데 제 좌측에 있는 차가 속도를 내어 직전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제 차의 왼쪽을 그대로 그 차가 와서 부딪혔습니다. 운전석에서 내려서 그 차를 향해서 갔습니다. 그리고 괜찮냐고 물으려고 하는데, 상대방 운전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저씨? 그따위로 운전하면 어떻게 해요?”
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보험회사를 불렀고, 결과는 상대방 과실 100%였습니다. 화를 내는 길보다 내지 않는 길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더 좋은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요셉이라는 인물을 만납니다. 그는 성모님과 약혼한 상태였지요. 그런데 마리아와 같이 살기 전에 아기를 잉태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고는 하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화가 치밀어 오르고,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은 세상 사람들처럼 화를 내고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마음에 담아둘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느님의 방법을 선택한 요셉 성인이었기에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방법으로 하느님의 뜻을 전달해 주셨습니다.
세상의 방법을 쓰면서 화를 내고 복수하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는 하느님께서 함께할 자리가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리는 하느님의 방법을 선택할 때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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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행복한 사람의 세계는 불행한 사람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다(비트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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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12월 18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끝은 늘 새로운 희망의 시작
-우리 하나하나가 "요셉"이자 “임마누엘”입니다-
“깨어있음, 경청, 순종”
“오, 하느님이여,
이스라엘 집안을 다스리시는 분이여,
불타는 가시덤불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산에서 그에게 당신 법을 주셨으니,
오소서, 팔을 펴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어제 12월17일 대림2부 첫날 저녁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O후렴”은 “오! 지혜(O Sapientia)”로 시작되었고, 오늘 둘째 날인 12월18일은 “오! 하느님(O Adona)”으로 시작됩니다. 끝은 늘 새로운 희망의 시작입니다. 11월 위령성월의 끝은 대림으로 시작되어 우리는 하루하루 설레는 기쁨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마중나가고 있습니다.
끝은 늘 새로운 희망의 시작입니다. 엊그제 수도공동체가 선물받은 이해인 수녀의 “이해인의 햇빛 일기”라는 예쁜 시집이 따사로운 햇빛처럼 참 반가웠습니다. 암투병후 79세 노령에도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살아가시는, 영원한 현역의 수녀님의 삶이 참 경이로웠습니다. 말 그대로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희망의 표지가 되는 수녀님입니다.
지난 목요일 12월14일부터는 배밭 배나무 전지가 시작되었습니다. 배농사 역시 끝은 새로운 시작임을 보여줍니다. 배나무의 가지치기 전정과 더불어 이 은총의 대림시기 “삶의 전지(剪枝)”를 통해 삶의 본질이 투명히 드러나도록 해야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마침 배나무 전지와 더불어 우리 수도형제는 수도원 하늘길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도 말끔히 전지했습니다.
“사랑하는 수사님, 이 추운날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 참 멋지게 전지하노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높은 사다리를 움직이며 가로수(街路樹)를 전지한 수사님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보냈고, 하느님을 찾는 수도자를 상징하는 듯한 너무 멋진 메타세콰이어 가로수에 반해 쓴 “하늘 향한 끝없는 사랑이”라는 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하늘 향한
끝없는
사랑이
그리움이
저리도
반듯하게
하늘 높이
크게 자라게 했나보다
수도원
하늘길
가로수
메타세콰이어 나무들!”-2023.12.15
이제 겨울의 시작 초겨울인데 벌써 깨어 부활의 봄을 기다리는 하늘 향한 무수한 겨울나무들같습니다. 흡사 대림시기 오시는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우리들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의 모습을 이사야 예언자가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 부르리라.”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바로 오늘이 그날입니다. 이런 주님을 앞당겨 맞이하여 모시고 오늘 지금 여기서 공정과 정의, 구원과 평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화답송 후렴처럼 참으로 멋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주인공 의인 요셉입니다. 주님 탄생을 앞둔 하느님의 배려와 준비가 참 완벽합니다. 이미 하느님은 의인 요셉을 예비했고 당신의 사람, 마리아가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했을 때 해결사 하느님은 그의 천사를 통해 그의 약혼자 요셉을 찾아 오십니다. 여기 오늘 복음을 통해 의인 요셉에게 우리는 세가지 교훈을 배웁니다.
첫째, 의인 요셉은 깨어 있는 분이었습니다.
참 영성의 표지가, 영성생활의 궁극 목표가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있는 삶을 위해 끊임없는 기도를 강조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기다리는 삶, 깨어 준비하는 삶, 깨어 책임을 다하는 삶입니다. 막연한 깨어 있음이 아니라 꿈과 희망, 길과 진리, 빛과 생명의 주님을 기다릴 때 비로소 인내로이 깨어 기다릴 수 있습니다.
깨어 있음은 침묵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도입니다. 깨어 있음은 인내의 기다림입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 있음은 공감과 배려입니다. 깨어 있음은 지혜입니다. 참으로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진정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에 묘사가 참으로 깨어 있는 의인 요셉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참으로 숨막히는 위기 상황입니다. 요셉의 마리아에 대한 배려가, 분별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사랑의 배려, 사랑의 분별, 사랑의 지혜입니다. 우선적이 분별의 잣대는 마리아의 안위였습니다. 태풍으로 변할 사건을 참으로 깨어 있었던 의인 요셉의 사랑의 지혜로 미풍이 되고 말았으니 천만다행입니다. 하느님은 안도했고 요셉이 참 고마웠을 것입니다.
둘째, 의인 요셉은 경청(傾聽;敬聽)의 사람이었습니다.
침묵의 사람, 경청의 사람입니다. 경청으로 표현되는 겸손이요 참으로 멋지고 매력적인 요셉의 인품입니다. 참으로 이런 요셉을 택한 눈밝은 하느님이요 이런 준비된 요셉을 친히 찾아 오신 주님의 천사입니다. 얼마나 요셉을 신뢰한 하느님인지 그대로 자기 속내를 드러내시나 하느님의 위험한 모험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아마도 침묵중에 깨어 깊이 경청했을 의인 요셉입니다. 요셉의 은밀한 내적체험을 반영합니다. 참으로 깨어 삶의 깊이에서 이런 내적체험을 필요로하는 우리들입니다. 아마도 침묵중에 깨어 깊이 경청했을 요셉입니다. 예수는 “주님께서는 구원하신다”라는 뜻인데, 또 주님을 믿는 우리 하나하나의 이름처럼 생각되는 참 아름다운 이름 예수입니다.
셋째, 의인 요셉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어 천사를 통한 예수님의 신원이 환히 밝혀집니다. 이미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예언된 임마누엘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여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임마누엘 이름 뜻은 얼마나 멋진지요!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새삼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또 하나의 임마누엘임을 깨닫습니다. 요셉의 경청에 이은 즉각적인 순종입니다. 순종은 믿음의 표현이자 영성의 잣대이기도 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참으로 조마조마했을 하느님입니다. 그대로 거룩한 밤, 거룩한 꿈중에 이뤄진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런 순종을 통해 하느님의 요셉에 대한 신뢰는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새삼 영성생활에 날마다의 밤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영성생활의 성패는 이렇듯 밤에 달렸음을 봅니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나무는 밤에 불을 켜지 않는다”란 시도 생각납니다. 무려 26년시라 더욱 반갑습니다.
“나무는
밤에 불을 켜지 않는다
밤의 어둠과 고요에 묻혀 쉰다
나도 밤에는
그분의 어둠과 고요에 묻혀
쉬고 싶다, 꿈꾸고 싶다, 기도하고 싶다
밤에는!”-1997.7.25
이런 순종으로 이끈 이런 밤의 꿈 체험의 기억은 평생 요셉의 믿음을 늘 새롭게 했을 것입니다. 세례받아 주님과 하나되어 살아가는 우리 하나하나가 또 하나하나가 요셉이요 예수님이요 임마누엘입니다. 참으로 의인 요셉은 늘 깨어 있는 사람이자 경청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은총의 대림시기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의인 요셉처럼 깨어 경청과 순종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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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12월 18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을 믿는 사람>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오 1,24)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하시려는 일에서
나 몰라라 뒷걸음치지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하시려는 일에
자신의 일처럼 한걸음 다가가지요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정성껏 품어야 할 자신의 일마저
하느님 탓으로 물리치지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마음과 손발이 되어
자신의 일을 정성껏 보듬지요
그리하여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을
꿈에서나마 이루려고 하지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꿈에서나 이룰 수 있는 것을
현실에서 이루어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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