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아의 성 펠릭스
펠릭스가 첫 울음을 터뜨린 것은 1126년의 일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연민의 정이 두터워, 집에 거지가 왔을 때는 어머니 손에서 무엇이던가 받아서 자선을 베푸는 것을 가장 즐겼다.
이런 자애심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날로 더 깊어갔고, 나중에는 자신의 음식까지 줄여가며 불쌍한 이들에게 나누어줌을 습관처럼 했다.
후에 신학을 배워 사제가 되었으나, 얼마 후 은수 생활을 동경하여 산중에 몸을 감추었다.
이는 평소 어머니에게들은 환상의 이야기에 충격을 받아, 주님에게서 받은 십자가의 상징대로 세속을 떠나 하느님께 대한 것만을 생각하고, 기도와 고행으로 수도에 전념하려는 결심에서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가 세속을 등지고 또 세속도 그를 거의 잊었을 무렵,
뜻하지 않게 은수 생활 20년만에 파리 대학 교수인 마타의 요한 박사가 그에게 와서 지도를 청했다.
이것이 곧 두 성인의 성스러운 공동 생활의 시초가 된 것이다.
어느 날 그들이 샘 근처에서 영적 문제와 또 회교도에게 잡혀간 동포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버석하는 소리가 나서 돌아다보니, 크고도 흰 사슴 한 마리가 우뚝 서 있고, 그 뿔 사이에는 청(靑), 적(赤의 십자가가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그들이 노예 구제 수도회를 조직하고 그 제복에 청·적의 십자가를 표시한 것은 이 같은 사실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에 앞서 그들은 로마로 가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를 알현하고, 수도회 창립 취지를 설명하며 지도와 축복을 청했다. 그러자 교황도 매우 기꺼이 여기시며 이에 적합한 규칙을 제정해 주고 그 수도회를 하느님 성삼께 봉헌하여 ’포로로 된 노예 구제의 성 삼위일체회’라 명명했다.
펠릭스는 당시 71세의 고령으로 요한과 더불어 프랑스로 귀환, 전에 사슴이 나타난 곳에 수도원을 건립하고 이를 셀프로아 수도원이라 불렀다.
그후 요한은 아프리카에 건너가 포로석방에 노력했으며, 펠릭스는 셀프로아에 머무르며 형제들을 모집하고 그들의 수련을 맡았다. 이렇게 회의 목적과 관찰을 위해 진력한 지 14년만에 펠릭스에게 임종의 날이 다가왔다.
임종시 그는 남아있는 제자 수사에 대해 걱정하자
성모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그들의 어머니가 되어 지도할 터이니 너는 아무 염려 말아라"고 말씀하시므로, 자신의 사명이 성취됨을 기뻐하며 1212년 11월 4일 셀프로아에서 편안히 눈을 감았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