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구불만의 두 세자빈 문종은 세종의 18남 4녀중(조선 왕중 가장 많은 왕자를 생산) 장남으로 태 어 났다. 세종은 태종에게서 제위를 물려 받을때 형인 양녕대군과 효령대 군의 양보에 의해서 왕이 되어선지. 세종은 자신의 아들들 중 첫째인 향에 게 8살때 잽싸게 왕세자로 책정하고 누구도 그것을 바꾸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수양대군이 쿠테타를 일으키게 되었다는 비극이... 어쨌든 세종은 문종을 왕세자로 책봉한 다음에 세자비를 간택하게 된다. 그때부터 우리 문종의 불쌍한(?)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였다. 1427년 문종 의 나이 14세.. 세종은 문종을 결혼 시킨다. 문종의 첫번째 세자비는 김오문의 딸인 김씨를 휘빈으로 들이게 되었다. 휘빈 김씨(여기서 휘빈은 계급을 말합니다. 아시죠? 인현왕후전에서의 장 휘빈을 여.. 정확히는 휘빈 장씨라고 해야 되는 거죠.)는 그 당시 최고의 미인인대다가 몸매도 좋고, 머리도 좋은 요즘말로 퀸카라 불리우는 여자 였다. 그때 결혼했을때의 휘빈 김씨는 18세 였다. 휘빈 김씨는 이팔 청춘(쩝! 뭐 정확히 이팔 청춘은 아니지만..)에 14살짜리 중1(현재 상황과 비교했을 때..) 과 결혼을 한것이다. 여기서부터가 바로 문제의 시작이다. 조선시대 역대 세자비들이 다 그랬듯이 휘빈 김씨도 빨리 세자를 낳아 자 신의 입지를 강화 하려고 했다. 하지만! 문종은 아직 14살 성에 눈뜨기는 조금 어렸고... 그러나 머리 좋 은 휘빈 김씨는 밤마다의 특강(?)으로 문종을 성의 세계로 이끌었다. 휘빈 김씨의 뛰어난 지도(?)로 드뎌 문종은 여체에 눈을 뜨게 되고.. 조상 의 피가 드디어 눈이 떠졌다. (세종의 애정행각은 태종의 애정행각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였스니. 그 피가 어디로 가겠는가?) 문종은 세자빈 육체에 곧 실증을 느끼고. (얼굴은 1년이면 지겨워 진다고 하지 않는가?) 역대 할아버지, 아버지들이 그랬듯이 궁녀 사냥(?) 에 나서 기 시작 했다. 1432년 휘빈김씨는 넘 억울했다. 독수 공방으로 지낸지 3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아아.. 세자마마 어찌 스승의 은혜(?)를 그리 잊으실 수 있습니까? 제가 다 가르쳐 드렸는데.. 어찌 다른 궁녀에게 그런 은혜(?)를 내리십니까..." 하지만 휘빈 김씨의 푸념은 이미 여체에 눈이 먼 문종에겐 들리지 않았 고.... 점점 휘빈김씨의 처소에는 문종이 들어 오지 않았고 휘빈김씨는 밤 마다 외로움에 떨었다. 보다못한 휘빈 김씨의 궁녀중 이상궁이 한마디 했 다. "세자가 자주 출입하시는 궁녀의 신을 훔쳐다가, 그 신을 태워 세자가 잡 수시는 술이나 차 그릇에 섞어 잡숫게 하면, 다시는 그 궁녀의 처소에 들 어가지 않을 거라는 민간 요법이 있습니다. 세자빈마마." "정말이야? 이상궁. 어서 그 궁녀의 신을 가지고 오너라." 말도 안되는 것이였지만. 다급해진 휘빈 김씨는 궁녀의 말에 무조건 따라 그대로 했다. 효과? 물론 없었다.... 오히려 다 자주 갔다는 야사가.... 아무 효과가 없자 휘 빈 김씨는 계속 근심에 잠겼고, 그 이상궁은 또다른 충고를 했다. "으음.. 그렇다면 세자빈마마 교미하고 있는 뱀을 잡아 가루로 만들어서 그것을 세자마마에게 직접먹이면 세자마마는 세자빈 마마에게 무한한 춘정 (?)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 가루가.. 그러니까... 춘약이라는 것이냐?" 옛날의 춘약은 이랬나? 효과는 물론.......... 없었다. 그러나. 교미중인 뱀을 몰래 들어 오려다가 수위무사에게 걸리게 되었고.. 수위무사는 이상궁과 평소 알고 지내는 사이(?)라 그때는 무사히 지나갔지 만. 뱀가루를 먹인것이 그만 들통이 나버리고 말았다. 아아.. 방정맞은 최 상궁이 이상궁과 수위무사와의 사이를 질투해서가 아니였을까란 야사가 존 재한다.. 세종은 머리끝까지 화가나 세자빈을 그대로 둘수가 없었다. '세자에게 신을 태운 재와 뱀을 갈아 먹이다니!' 하면서 엄청나게 분노를 했다. 황희와 맹사성은 끝까지 세자빈의 편을 들었지만, 세종의 분노를 막을수 없었고 곧 휘빈 김씨는 폐세자비가 될 운명에 처해졌다. 소헌왕후(세종의 첫째 부인)는 휘빈 김씨를 조용히 자기의 처소로 불러 드 렸다. "안다.. 내 니마음 잘 안다.. 나도 다 해본것이다. 하지만 걸리지 말았어 야지.. 조용히 집으로 돌아 가거라. 일이 진정 되면 내가 힘을 한번 써보 마." 희빈김씨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자 집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 이였고. 휘빈 김씨의 아버지 김오문은 부인과 딸을 뒷마당으로 불러 냈다. 희빈 김씨에겐 세자비의 옷을 입혔다. "조금 있으면 대궐에서 폐빈의 첩지와 나에 대한 파직 교구가 내려 올것이 다. 그러니 어서 서두르자. 지금 죽으면 넌 세자비인체 죽는 거구, 우리도 세자의 장인, 장모로 죽을 수 있다." 김오문은 준비한 비상을 세자비와 자신의 부인 이씨에게 주었다. 세자빈 김씨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아버님, 어머님, 이 불효막심한 딸자식 하나로 인하여 집안이 망하게 되 었으니 이 끝없는 죄와 사무친 한을 어디가서 푸오리까? 소헌왕후님이 저 를 다시 부르신다고 했지만.. 흑흑.. 그건 분명히 저를 위로해 주시려는 말이였을 것입니다." 딸이 먼저 약을 먹는 것을 볼수 없었던 부인 이씨가 먼저 비상을 먹었고, 희빈 김씨도 약을 곧 따라 먹었다. 부인과 딸의 죽음을 지켜본 김오문은 칼을 꺼내 무관답게 배를 갈라 최후 를 마쳤다.이런 엄청난 풍파를 겪은 문종은 여자는 곧 요물이란 생각이 들 어 점점 여자를 멀리 하려고 했지만.... 이미 성에 눈뜬 문종에겐.. 그건 너무 늦은 깨달음 이였다... 희빈 김씨 사건으로 문종이 관계를 맺었던 궁녀들은 쫒겨 나거나 몇몇은 참형에 처해 졌고, 문종은 어쩔 수 없이 다른 궁녀들을 찾기 시작했다. 문종은 새로운 궁녀를 물색하던중. 중전 시녀인 순임이와 눈이 맞았다. 그때 순임이의 나이는 12살.... 문종의 나이는 19세..... (헉! 문종은 로리타 컴플렉스가...... 여기서 조선왕들의 취향을 알 수 있 다. 그들은 변태 성욕자임에 분명하다! 그당시 12세는 현재 우리나라 8세 정도 의 발육 밖에 보이지 못했는데....) 문종은 이번엔 아주 신중하게 순임이와 정을 통했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 사실도 모르는 체 세종은 세자비 간택에 나섰고, 곧 종부 소윤 봉려의 딸인 봉씨를 세자비로 간택했다. 봉씨는 세자보다 두살위였다.(이것은 사료마다 기록이 조금 다른것이.. 어 느 곳에 서는 나이가 세자와 같다고 하는 부분도 있어서... -_-;;) 희빈 김씨는 상당히 아름다운 여성에 몸매도 풍만한 여성이였스니. 세종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이번에 간택한 봉씨는 자그맣 고 아담한(?) 스타일였다고 전해 진다. 하지만! 희빈 김씨의 원한이 있었던 것일까? 이번에 간택한 봉씨는 그야말 로 대단한 여성이였다. 문종은 처음 몇번 세자빈의 처소에 들었지만. 봉씨 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엔 너무나도 역부족이였다. 문종은 곧 자신에게 딱 맞는 순임이의 처소에만 들어 가게 되었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봉씨는 원래 뜨거운 여자(?)인 지라.. 세자가 찾아오지 않는 3년의 세월은 너무나도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봉씨는 희빈김씨와도 같은 과오를 저지 르지 않고 보다 손쉽게 일을 처리했다. 바로 궁녀와 눈이 맞은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레즈의 길이...(궁궐이 실상이 어땠는지는 다음기회에 쓰 죠..) 밤마다 봉씨는 궁녀들과 놀이(?)를 했다. 상당히 단련된 궁녀들(?)의 서비스(?)에 봉씨는 세자가 찾아오지 않아도 깊은밤의 외로움을 잘 달랬고.. 그들의 행위는 일대 삼! 아니지 남자가 없 었으니 어떻게 말해야 하나... 쩝! 어쨌든 그들은 여럿이서 하는 그룹XX를 즐기기 시작했다. (어허라.. 통재 라....) 그들의 변태 행각은 끝이 없었다. 야사에 따르면.. 그들의 행각은 밤이 시작되면 모두 옷을 벗고, 여러가지 기구(?)를 이용하 여 일을 벌렸다는데.. 다행히 남자는 없었다고 한다. 정말 남자가 없었는 지는 정확히 알수가 없다. 오히려 봉씨는 문종이 오면 궁녀들과 재미있는 일(?)을 못하니 문종이 자 신이 처소로 오는 것을 극히 꺼려 했다. 어쨌든 문종은 순임이의 처소에만 있어도 행복했고, 봉씨도 자신만의 즐거 움(?) 을 알게 되었으니.. 전혀 문제될것이 없었지만. 문제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세자와 눈이 맞았던 순임이가 덜컥 임신을 해 버린 것이다. 12살땐 초경도 하지 않았고.. 그땐 문종과의 관계가 두려웠 지만. 그녀도 나이를 먹게 되고 문종과의 관계를 즐길수 있게 되었을때. 임신을 해버린 것이다. 봉씨는 그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세자빈의 위 치가 흔들릴까 두려워 순임이를 잡아다가 모진 매질을 했다. 임신을 유산 시키기 위해.... (차암.. 무서운 여자들이야..) 그리고 드디어. 순임이 사건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었고, 세종도 드디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세자의 아이를 잉태한 순임이를 매질한 봉씨의 과오만이 나타났는데. 조사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판명이 된것이 다. 바로 봉씨의 궁녀들과의 애정행각인 것이다! 궁궐은 발칵 뒤집혔다. 이건 저번 휘빈 김씨사건을 능가하는 대 사건이 된 것이다. 휘빈김씨는 세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한것 뿐인데.. 봉씨는 장차 국모가 될 세자빈인데. 궁녀들과 밤마다 옷을 벗고 즐겼다는 것은 정 말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소현왕후는 봉씨를 불렀다. "어찌 그런 희귀 망측한 일을 벌렸느냐?" "제가 어때서요? 제가 뭐 남자라도 끌어 드렸나요? 궁녀들이랑 조금 논건 데.." "어허.. 점점더 가관이구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다니." 너무 화가난 소헌왕후는 그사실을 세종에게 그대로 알렸다. "무엇이 세자빈이 멧돌이란 말인가! 이 궁중이 이렇게나 타락했다니.." (여기서 멧돌이란.. 레즈비언의 순 우리말입니다..) 황희와 맹사성도 이번엔 봉씨의 편을 들지 않았다. 모든 대신들이 봉씨를 규탄하기 시작했고. 다섯가지의 죄목으로 봉씨를 폐하였다. 1.시비와 동성애를 한 죄 2.시비로 하여금 음탕한 남자들의 노래를 부르게 한 죄 3.궁중에서 술을 마신 죄 4.중전이 내린 효경, 열녀전을 내팽개친 죄 5.시기,질투를 하여 내명부에게 매질을 한죄. 이렇게 하여 봉씨는 폐세자비가 되었고. 봉씨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 오자. 봉여의 집도 몇년전 김오문의 집과 같은 참상이 되풀이 되었다. 하지만 폐빈 봉씨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고, 그 모습에 봉려는 더 더욱 열을 받았다.. "저토록 자신의 죄를 회개할줄 모르니 멸문지화를 당함이 마땅하구나.. 너 는 이미 폐빈의 첩지까지 받고 돌아 왔으니 먼저 번의 폐빈 김씨 처럼 세 자빈의 신분으로 죽는 복도 없구나.. 이젠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폐빈 봉씨는 아버지가 준 비상을 던져버리고 도망쳤지만.. 곧 봉려 에게 붙잡혔고.. 안방으로 끌려 들어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목이 졸려 죽었다. 죽기 전까지 봉씨는 반항을 했고.. 딸이 죽기 전에 봉여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다음세상에선 남자로 태어나서 행복하게 살아라..." 딸의 죽음을 확인한후.. 봉려도 북향사배를 한후.. 자결을 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시대 최대의 세자빈 사건이 끝난것이다. 문종은 두번의 세자빈 사건으로 더이상의 세자빈 간택을 거부 했다. 그러 다가 3년후 이미 딸을 낳은 순임이를 세자빈으로 책봉하여 맞이 했는데.. 그리고 5년후 순임이는 원자를 출산하는데 그가 바로 단종이다. 하지만 순 임이는 산후독으로 단종을 낳은지 이틀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때 나이 24 살이었다. 이미 15세에 임신을 했고, 모진 매질을 당한후 아이를 출산한지 라 몸이 너무 약했던 것이다.. 순임이는..... 그후 문종은 다시는 세자빈을 맞지 않고 오직 사직 양씨를 후궁으로 거느 리다가 왕비가 없이 즉위했고, 왕위에 있으면서도 왕비자리를 비워 놓고 있었다. 다만 죽은 세자빈 순임이를 즉위후 추봉하여 현덕왕후로 하였다. 문종은 1 남 3녀를 두웠는데.. 1남과 2녀는 죽은 현덕왕후 소생이였고. 마지막 3녀 는 사직양씨 소생이었다. 문종은 즉위한지 2년만에 죽었고.... (여자들의 음기가 세어 정기가 빨려 그렇다는 설도 있으나 천생이 약질이라는 설이 진짜인 듯.) 그후 단종의 비극이 시작되는데... 어쩜 이 모든것은 휘빈 김씨와 봉씨의 원한이 아니였을까란 생각을 가져본 다. 그건 그렇고 문종은 과연 아무일도 안한 왕이였을까..? 세종 후반기 그러니까 1442년 이후의 정치는 모두 문종이 한일이라고 생각 하면 된다. 세종은 후반기에 병에 걸려..(그 병이 매독이 아닐까라는 추측 이 강하다.) 정사를 거의 보지를 못해 문종이 대부분을 처리 했다 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측우기의 경우 상당부분 문종의 작품이고. 공법의 제정, 계혜약조(대일본 무역 조약) 등등 상당히 이루어낸 것이 많이 있다. 하지만, 아버지 세종의 그늘에 가려져 있고... 그리고 문종실록중 11권이 유실된채 있어서.. 문종이 즉위한후 1년간 무슨 일을 했는지 알 길이 없다.. 경복궁에 가득히 심었다는 앵두나무에 대한 이야기만이 가끔 세상에 나오 는 비운의 왕이라 할 수 있다.(문종은 지극한 효자로 아버지 세종이 좋아 하는 앵두를 얻기위해 동궁 가득히 앵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