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완 포-트에서 인도네시아 입국수속을 빠져나와 대기중인 버스에 탑승하니 버스차장들이 짐을 다 받아 주고 그렇게도 친철할 수가 없다. 특히 서양女들한테는 간드러워질 정도다. 영어도 대단히 유창하고 한놈은 워째 그리도 잘 생겨논 놈인지 노가리도 일품인지라 내가 걸쳐 앉은 뒷좌석의 서양 여성들은 벌써 마음이 동한 모양인데 벌써 이놈들과 다정하게 말을 주고 받는 그녀들은 현지의 정보가 필요해서도 일 것이다. 도대체 왜 이다지 버스차장들이 5명이나 되거니와 지나치게 과잉친절을 베풀까하는 의문은 얼마 않가서 풀리게 되었다.
리무진 버스가 메단의 중앙역에 이르자 오랜동안 정차해 이들은 모두 내리라고 몸소 짐까지 챙겨 연신 뭐라고 떠들어 제끼는데 양놈들 거의가 시간이 흐를수록 이놈들 농간에 짐을 하나 둘씩 내려서고 있었으며 코스트가드(해안경비대) 복장까지 한 놈이 마중 나와서 어쩌구 썰까대니 제대로 않넘어가는 승객이 거의 없었다. 이 때 가만있으면 죔 좋으려나, 호주에서 영어 나부랭이 연수 좀 했다는 조폭녀가 무엇이 그다지 불안한지 쟈-바 헹님을 못믿고 양놈들하고 쭝얼쭝얼... 삐끼 차장들하고 쫑알쫑알 해대며 여기서 내려야만 우리가 가는 목적지에 쉽게 당도한다며 어쩌질 못하길래 쟈-바 헹님은 단 한마디로 "가만히 좀 있어!"하는데도 말대꾸하며 우짜노 저짜노(조폭녀는 대구 출신이다.)한다.
※귀국일정으로 급하기는 내가 더 급한마음이었다.
먹물먹고 바다건너 물먹고 꼬부랑 말 한마디 쬐끔 아는 것도 꼴불견이다. 가급적 팀원 분위기 고려하여 나두 여러소리 않하려고 꾹 참아왔던 나였지만 이날따라 유난히 그녀가 밉상이다. 그녀는 워째 그래 잘 배운여자가 어르신네 앞에서 뻐금뻐금은 양반아고 제발 그놈의 책상다리 걸치지 않으면 좋으련만 심지어 밥먹는 식탁에서조차 떡하니 김장무우같은 두터운 족발을 서슴없이 뻗쳐 밥상머리에도 정중하게 올려놓는 무지함을 자주 드러내었다. 방콕에서 나의 조심스러운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아마도 더럽게 잘 못 배운 유학의 산실일터이다.(처음 충고時에 그녀는 모기가 잘 물려서 그런다고 변명했다.)
조폭녀를 흉보기는 정말 싫다. 한국을 떠나 이국 멀리서 타국등지를 떠돌며 왜 감싸주지 못할망정 한국사람의 가장 못된 근성으로 동포끼리 씹어야만 하는가?
가급적 그녀의 좋은점만 추켜주려고 노력해온 터이다.
그녀는 말도 잘 않통하는 현지인들에게 즈가 배운 정식영어를 제대로 써 먹으려고 퍽이나 애써 왔는데 옆에서 보는 쟈-바 헹님이나 나나 서로 쓴 웃음을 지으며 젊어서 그렇겠지 하며 그냥 모르는 척 해왔다. 아! 그렇다. 내도 젊음 한때에 무엇이 잘 났다고 그렇게 설쳤을 시절을 생각하니 그녀의 열정을 가만히 주시하며 관망할 수 밖에 없었다.
양놈들 거의가 빠져나가고 나니 오리지날 버스 차장 한명만 탑승하여 바로 얼마 않가서 셔틀버스(선박회사에서 운영함)가 메단의 시내 한가운데 있는 백화점 앞의 'BARHAGIA'라는 선박회라 대리점에 당도하여 모두들 하차했는데 쟈-바 헹님 설명으로는 먼저 내린 양놈들 쬐만 고생좀 할꺼란다. 지금 우리가 갈려는 목적지인 렉토바(Lake ToBa)에 6시간 넘게 걸려서 봉고車 대동할 터 인데 옴팍 바가지 쓴다는 것이었다.(여기서 그의 명성에 필적할만큼 노련함 그대로 진면목을 과시하였다.)
얼마前에 한국인 대학생 1명과 여자 두명을 대동한 일행이 '렉토바'에 가고 싶다고 하여 어찌어찌 이래저래 가서 삐끼들 소형 버스에는 절대탑승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었는데 이 친구는 여자들 앞이라 객기가 죔 발동했는지 삐끼들 알선해주는 소형버스타고 잘도 갔다가 무려 미화 100달러를 물었다고 한다. 뭐 항의좀 할라니까 떡메 건달들이 에워싸며 분위기 좀 잡아주니 영락없었다나!
Lonely planet를 들척거리면서 세계의 관광무대는 지들 안방모양 휘젖고 다니는 이들 배낭쟁이 양코배기들도 처음와서는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꼴을 보니 쓴 웃음이 나오며 꼬소하기도 했는데 먹고 살기 어려운 인도네시아 사람들 쬠 보태주는 것도 괜찮다는 헹님의 보충설명이다.(고얀히 아는 척하고 나서서 이들의 밥벌이에 재를 뿌리는 것도 문제일 것이고 현지에서 불량한 패거리를 쓸데없이 맞닿뜨린다는 것은 큰 곤경에 처할 수도 있다.)
18.인도네시아의 이모저모
삐끼들 얘기가 나오니까 앞뒤가 안맞는 소개지만 인도네시아인들은 정말 무척 친절하다. 영업상의 잇속으로도 그렇겠지만 기냥 보통사람끼리 지나가는 만남에도 환한 미소와 인사가 천진함 그대로 때묻지 않은 순수가 배어나와 있게 마련이다. 우리가 머물렀던 '쟈키아'호텔은 버스에서 하차하여 불과 300미터 거리에 있었는데 호텔에 당도하자 많은 연고인들이 쟈바 헹님을 맞이하며 대환영이다.
그들中에는 껌둥이 미국인도 있었는데 몇 년째 여기서 기냥 죽치고 있단다. 미국의 직업군인 출신으로 장기간 군복무하고 나오는 연금으로 그냥 저냥 여기가 더 살기 좋은 모양이다. 그렇겠지, 돌아가봐야 미국같은 인종차별 천지인 나라에서 알아줄 놈 없을테고 별로 마땅히 할 일도 없을테니까...
내가 '렉토바'를 떠나 혼자서 다시 이 호텔을 찾았을 때는 우연히 두 여성을 알게 되었는데 한 여자는 노년의 호주 사람인데 10년째 여기서 거주하며 현지언어도 능통하여서 순전히 인도네시아어로만 니콩내콩해댔는데 비자가 만료되면 페낭으로 나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오는 코스 순환을 그대로 되풀이 한다는 것이고 한 여자는 한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영국여성으로 웃음 한 구석에 어딘가 모를 쓸씁레한 우수가 숨겨져 있고 네 살짜리 천진난만하게 귀여운 딸네미를 데리고 약 1년째 데리고 산다는데 꼬마에게 "아빠 어디 있냐"고 묻자 "대디는 하늘나라에 계셔"하는데 주방 아즈매가 대디 얘기는 '샷-더 마우스'하라는데도 현지인 중 까불이 건달 한 놈이 "내가 니 아빠 해줄께, 몸도 건강하고 이렇게 알통까지 나왔으니(웃통 벗은 몸으로 팔뚝근육과 똥배까지 힘주며) 니엄마 아주아주 이뻐해 줄 수 있어"하니까 꼬마는 절대 사양! "그러면 얘 어때?" "또 얘는?" 마지막으로 내도 싫다는데 나한테는 말만 싫지, 표정이 그다지 나쁘지 않아 보인다.
잠깐 헤어져 내가 않보인다고 애써 찾아서 빠이빠이해대는 것이 그렇게 앙증맞을 수가 없었다. 마침 내 옆방에 방을 잡았길레 꼬마 엄마와 인사를 하고 한국에서 준비해온 그림엽서와 끈달린 볼-펜까지 선사하니 꼬마는 물론이고 꼬마 엄마의 우수도 일순 사라며 보이며, "이렇게 귀한 선물을 주니 고맙기 그지없다"며 연신 고맙대고 인사해오니 기분이 좋았다.
여기 처음 도착시 도미토리 방이 꽉차서 트윈 베드에서 기숙하게 되었는데 인도네시아 머니로 25,000루피이고 2인용이니까 절반씩 부담하니 우리돈으로 환산하면 1,000원이 조금 넘는 계산이 나오게 되니 외국인에겐 물가가 싸기는 되게 싼 것이었다.
3년 前에 헹님이 여길 다녀갈 적에 비하여 달러당 30% 가깝게 환율이 올라 갔고 물가는 거의 그대로 이라고 하니 여행자들에게는 더욱 환영할만한 요소를 갖추고 있었으니 쇼핑도 신이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양놈들이 아니나 다를까 싶게 몇 년 前만 해도 발길이 뜸했다는 것인데 어디서 무얼 듣고 오가는지 찾아오는 여행객이 한참 불어 났다고 한다.
4년 前에 우리와 같은 외환위기를 겪은 인도네시아는 국제통화기금위에 큰소리 쳐가며 '느그들 돈 필요없다'고 대포를 놓을만큼 자원이 풍부하여 자급자족이 어느 정도는 가능한 나라이기도 하고 현재 수도 쟈카르타에서는 학생을 비롯하여 각계의 민주화 소요가 끊이지를 않아 격동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여기 메단은 원래 광장이나 전쟁터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 화란(네덜란드)의 통치이래부터 종족분쟁이 계속되었고 지금도 종족 및 종교분쟁이 대두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나 이 나라는 태국과 달리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무지 좋은편이다.
태국이 인도차이나 戰時(2次대전) 약삭빠르게 일본군에게 전진기지를 제공하고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지네 나라의 옥토를 본존하여 지금껏 일본과는 아주 절친한 밀월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現 라마국왕 9세에게도 큼직한 선물을 별도로 기부하고 '돈-므앙' 국제공항을 지을 때도 일본의 경제적인 지원없이는 불가능 했었다는 것이다.
이에 反해 인도네시아는 우리보단 좀 덜했지만 그 戰爭 당시에 수 많은 피를 일본군에게 흘린 상처를 안고 있고 시중에 돌아 다니는 미쯔비시 자동차들이 가득하지만 한국에서 나온 현대車,대우車들도 더러 돌아 다니는 것을 자주 볼 수가 있다. 극동건설,현대건설,대우중공업,삼성전자,기아산업 모두 알고 있고 있어서 한국인이라면 제대로 먹히는 곳이라 이들에겐 너무 잘알고 있는 조국의 영광스런 후광으로 대접을 톡톡히 받는 셈이다.
한편으로 조선인(북한인)들도 자주 발길이 오간다고 하는데 아마도 고위층 가족을 중심으로 휴가를 즐기러 이곳을 찾지 않나하는 생각이다. 내가 방콕의 공항에서 고려항공이라는 푯말이 바로 아시아나항공과 나란히 옆의 창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었다.
예전에 여러 나라를 돌아 다닐 때 아프리카의 유학생 및 그 밖의 나라에서 북한 사람들도 나이트나 식당등에서 가끔 부딪혀 인사를 나누기도 했지만 여기 호텔에선 그런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호텔의 골목을 빠져 나와 백색 모스크의 대이슬람 사원 앞에 있는 백화점에서 필요한 물품을 쇼핑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마누라 수영복이라도 선물할까 망설이다가 그만둔 것이 여간 후회되는 것이 아니었다.
고급 수영복 제품도 우리돈으로 몇천원에 불과했지만 예전에 외국다닐 때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이라 이 사람, 저 사람 따라서 덩달아 쓸데 없이 쇼핑을 했었던 前歷으로 늘 부끄럽게도 생각하여서 외국 나와서는 현지에서 필요한 생활용품이외에는 구입 않하는 것이 철칙이었는데 결혼생활 한참이 되어서도 수영복 한번 입어 보지 못한 마누라를 생각하니 여간 씁쓰레한 것이 아니었다.
방콕으로 돌아 갔을 때 카오산 거리를 뒤져 보아도 뱅기 시간에 쫓기다 보니 여성용 수영복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난 항상 마누라에겐 막차를 타는 놈이라서 아예 늙으막에는 개밥될 줄 알고 황혼의 부르스용 열차를 탈 준비를 해오고 있다.
19.호수의 작은 섬 이니스프리
7월 11일 약간 흐림
오전 일찍이 환전 좀 해놓고 오전 11시발 버스를 호텔에서 체킹해 놓았지만 바로호텔 까지 車가 들어오는 서비스를 한다는데 너무 늦게 티켓팅하는 바람에 '렉토바'(토바 호수)에 직접가는 버스는 조금전 예약이 완료되었고 대신 '베라스타기'를 경유하여 토바호로 들어가 는 '파라팟'行 버스표를 조금 깍아서 직통 버스값으로 해준다고 하여 애초의 일정과는 상관없던 '베라스타기' 경유 노선은 새로운 관광지를 돈 안들이고 잠시 구경할 수 있는 챤스가 되었다.
11시가 한참 넘은 시각에서 버스가 출발하여 메단의 복잡한 시내 거리를 빠져 나오니 과거 화란인들이 경영하여 잘 가꾸어 놓은 팜야자 등 열대 야자 농장 플랜테이션이 쭉쭉빵빵 시원하게 가로 세로 선단을 맞추어 광활한 쟝-글 풍경을 연출하고 점점 가파른 길을 올라서니 항시 찌풋한 땀띠로 쩔었던 피부가 움추러질 정도의 시원한 공기로 메단의 더위에 견디기 힘든 사람은 이곳에 오면 낮은 온도 등으로 더위를 식혀 휴양지로 유도하는 것 같았다.
'베라스타기'의 고원지대부터는 이슬람 건축물이나 사원의 풍경이 멀어지고 교회 십자가가 여기 저기 눈에 뜨이는데 지역에 따르는 文化의 사고방식에서 서로간의 이질감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했다.
메단 주변에는 섬의 휴양지로 '랭가위','렉토바',를 비롯해 윈드서-핑으로 '리야스아일랜드', 오랑우탄 서식지인 '부끼라왕', 그밖에 호랑이.라이온 등이 산다는 곳과 그외 악어농장 등등 여러 관광지가 있어 볼 것도 많지만 산행코-스로 멋진 장소가 이곳 '베라스타기'에서나 '렉토바'에서 가까운 '시바야크'와 '시나붕'산의 화산 분화구가 장관을 이룬다니 시간을 내서 이 산들을 등정하는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장면이 될 터인데 '시바아크'산의 하이킹 은 본격적인 등산장비를 갖추어 산악 대원들中 소수 정예팀을 구성해 한 번 도전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 추가 희망사항 : 나는 가이드로써 짜공으로 가면 더욱 좋으련만.....)
'파라팟'에 들어 가기 前에 '토바'호수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멋진 '통킹'전망대가 있어 버스에서 잠시 내려 호반의 단애 사이에 자리잡은 이 전망대에서 '시피소피소'폭포까지 내려다 볼 수 있었고 사진도 한 장 박았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토바'호는 안개 속으로 거뭇하게 피어 올라 백록담 형상을 하면서도 이 세상 저 멀리 떨어진 설산의 고원지대모양 무릇 신선들만 산다는 무릉도원에서 안개구름 속으로 둥둥 떠 다니는 신비한 싸이트에 있는 가상세계 속의 현실적인 스펙터클이었다.
아! 그렇다. 저곳이야말로 호수의 작은 섬, 내가 바로 꿈꾸던 '이니스프리' 그대로 일 것이다. 지리산을 배회하며 청학동에서도 찾지 못한 도피지였던 것인데 정감록에서 예시한 청학동은 왜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으로 와 있는 것일까?
☞이 의문은 섬에서 산책하는 동안 서서히 풀리게 되었다. 즉, 사람들마다의 마음 속에 있는 청학동은 보고 생각하며 느끼는, 한 수 올려 깨달음의 차원마다 달라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 이 때 나의 마음 속 한가운데에서는 삶과 죽음의 종착역이 없는 피안의인도를 또다시 꿈꾸며 달리고 있었나 모르겠다.
'토바'湖水(Lake Toba)는 메단 남동쪽 176킬로 지점으로 북수마트라 중앙부에 넓게 자리잡은 아주 아름다운 호수로 그 면적은 1700평방. 수심은 깊은데가 400미터가 넘고 해발 900미터의 서늘한 고원지대의 기후 때문에 네덜란드 식민시대부터 피서지로 본격개발이 이루어진 곳이다.
호수의 직경이 무려 100킬로 넘는다니 어마어마한 반경이고 인도네시아 국내 부유층들이 많이 온다고 하나 경기 침체의 영향 탓인지 내국인들은 별로 많이 못 보았다.
성수기인 1 ~ 2월에는 내국인의 많은 인파가 몰린다고 추측된다.
'통깅'전망대에서 바라본 코 앞의 '렉토바'는 전망대에서부터 버스가 2시간을 넘겨 밤 7시가 되어서야 '파라팟'선착장에 도착. 겨우 마지막 배를 탈 수가 있었다.
호수를 1시간 가까이 달려 섬마을 '툭툭'이라는 곳에 들어서니 호숫가의 멋진 코티지가 즐비하게 늘어 서있고 원시형 리조트들에서 불켜진 야경은 그야말로 환상의 섬 바로 그 자체였었다.
무려 4일간의 국경을 넘고 넘는 장도에 막을 내리며 고단한 여행의 댓가로 신이 우리에게 준 커다란 선물로 피안의 안식처를 제공해 준것이다.(싸왓디/인살라/메아이갓블레스유/나무아미타불/옴마니반메홈~~~~띳띠리 띠리~~~~)
조폭녀는 너무 좋아 환호성을 지르니 '캭캭'대면서 오랑우탄같이 이리저리 폴짝폴짝 뛰어 다녔다.
그가 이곳까지 수고비 한푼 않받고 힘들여서 가이드 해준 그 의미를 알 것같았다.그쟈-바인 은 최근에 아프카니스탄에서 겪었던 악몽도 씻을 겸 엽전을 미워하면서도 못내 엽전을 사랑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여정을 이 곳으로 베풀었던 셈이다.
리조트 숙박비는 쟈-바 헹님이 흥정을 한 끝에 두명씩 한 방에 15,000루피. 둘이 나누니까 우리 돈 800원 쯔음될려나, 우이그! 싸도 너무 싸다. 그것도 호숫가가 바로 접해 있는 환상적인 곳으로 전망 좋고,
물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감미로와 좋고, 바로 집 앞에 다이빙대가 있어 좋고, 흔들이 그물 그네 맘대로 쓰기 쉽고, 빨래 널기 좋고, 야! 밤에는 벌거벗고 아무렇게나 거시기 덜렁거리며 좋은데고 ............
좋고 좋고 다 좋고!!!!
우리는 저녘식사後 맥주도 한잔씩하고 가까운 동네 구경도 하다가 이내 잠자리에 들었다. 철썩이는 물소리가 밤 호수의 야자수 잎사귀 사이로 나지막하게 앙상블을 이루며 허니문의 단꿈모양 이내 잠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호수의 작은 섬 '이니스프리'>
나는 가련다 이니스프리로 가련다.
그곳에서 작은 가지 엮어 진흙 발라 오막살이 한칸 짓고,
아홉이랑 밭 두렁에 콩을 심고 꿀벌통 치면서,
나 홀로 살리라 꿀벌 잉잉거리는 숲 사이에서.
그러면 그곳에서 마음 편안하리라,
아침 안개 드리운 때부터 귀뚜라미 우는 저녘까지,
서서히 방울방울 떨어지는 마을의 평안함이여;
밤에는 달빛 별빛 은은히 흐르고,
낮에는 이글이글 타는 햇살 넘치고,
저녘에는 방울새들이 떼지어 나래치는 그곳에서.
나는 가련다, 밤 낮 그침없이 들리나니 물결이 호숫가에 나즉이 철썩이는 소리; 잿 빛 車道에서, 鋪道에서 서 있을제, 들리나니 마음 속 깊숙이 호반에 물결치는 그 소리가...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
20.날으는 어쭈구리 부칭개
7월 12일 맑음/오후 한때 스콜
나는 아침 일찍 일어 났는데 우리 숙소 타운은 '안주'이다 한국인에겐 잊을 수 없는 재밌는 간판이름인 것같았다, 요가명상後 호숫가 가까운 곳을 산책하다 보니 어느덧 아침해가 황금빛 프리즘을 뿌리며 호수의 잔잔한 물결에 반사되어 요정의 마술 스프레이처럼 여기 저기 피어 올라 남국의 파라다이스를 연출한다.
잠시後 호수가 한 쪽 레스토랑에서 언제 일어났는지 쟈-바 헹님과 조폭녀가 조반을 먹으며 소리쳐 부르는 곳으로 달려갔다.
여기 주인은 인자한 시골 사무라이 노인네를 일본의 사극속에 나오는 배역에서 연상시키듯 웃 머리가 '반짝이'였는데 쟈-바 헹님과도 안면이 깊고 선한 그의 인상은 시골의 인심좋은 노땅이었다.
근간에 약 8년 정도 정유회사에 다녔었는데 그는 기독교인으로 무슬렘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는 곳이라 헤꼬지 당하고 결국 쫓겨나와 이 부근에서 살았던 선친의 대를 이어 휴양지 숙박업소로 발을 붙였다 한다.
이 친구도 그 놈의 아들하나 낳을려고 처음 딸 하나 낳고 아들 하나 낳아야지 하는 욕심으로 생산에 피치를 올렸었는데 또 딸, 그러고서는 정성을 들여 수태를 했는데 이번에도 딸, 아이구 안되겠다 싶어 목숨걸고 테크닉 구사한 것이 우짤꼬! 딸, 자포자기로 인생무상을 느끼며 포기하다가 장난쳐 나온 것이 결국 원하던 신의 아들을 손에 쥐게 되었단다.(영어로 얘기하며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 얼마나 웃기던지 배꼽을 잡았었다.)
별로 이쁘지도 않은 막내 놈을 하도 귀엽다 귀엽다 하며 좋아 죽을라 하기에 덩달아서 이뻐해 주려고 애먹기도 했다. 그 놈은 에미 애비모양 피부가 검지 않고 엽전들처럼 하얀 피부라고 노인네는 구태여 자랑삼았다.
그의 나이는 나와 동년배, 깊은 주름살이 검은 피부의 얼굴 곳곳에 패어져 있었는데 같은 나이라고 소개하자 깜짝놀란다. 괜히 얘기 했나 보다.(국제간에는 쓸데없이 나이를 밝힐 필요가 없다.) 그는 아마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에서 선진국과 후진국의 격차를 느꼈을테고 그래도 내가 워낙 동안이라서 그 차이가 쉽게 좁혀지지 않는 만큼은 세월의 시름을 더욱 느끼게 했을런지도 모르니까...
자랑삼아 얘기하는 것도 상대방에게 피해를 준다 싶으면 조심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들 수영복으로 갈아 입었고 미스터김은 결국 메단에서 구입한 수영 팬티가 거시기만 볼록 나온 초미니 팬티라고 구형의 덜렁 반바지를 입고 물가에 뛰어들었는데 물속이 쬐매만 가도 훌쩍 키를 넘어 모두들 허우적 거렸다.
물가에서 잠시나와 파라다이스 벤치며 흔들 그물 네트에서 쉬고 있을 때 양놈하나가 다이빙 대로 나와 멋진 폼을 잡으며 날렵한 동작으로 일직선을 그으면서 잠수해 들어가길레 대한 남아 엽전의 긍지도 살려보자는 객기에 한국대표로 나도 한 번 시도해 볼려고 다이빙대 까지는 보무도 당당히 잘 걸어나갔는데 잠시後 호흡이 멈춰지더니 사시나무 떨리듯 개폼도 돼지폼도 잡히지가 않는 것이었다.
아까의 그 양놈도 지켜보고 조폭녀를 비롯한 우리 엽전 일당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물러설려니까 체면이 영 말쌈아니었다. 일단 뒤로 후퇴해서 국민체조로 지랄같은 몸 동작을 하나 둘 하나 둘 반복하면서 시간을 질질 끌다가 '에라! 모르겠다. 더 이상 체면구기지 말자' 하는 마음속으로 조심해서 내깐에는 멋진 개폼잡고 물가에 냅다 뛰어들었는데 어쭈구리!
몸이 제대로 펴지지 않고 날으는 부칭개처럼 몸전체가 휘어 자빠져가면서 쓰레기 통에 처박힌 생쥐쌔끼가 되어 물가에 철퍼닥 내동댕이 쳐놨던 것이다. 여기 저기서 '낄낄낄' 양놈은 오 예! 원더풀을 연발해 가며 나의 고유한 부칭개폼으로 흉내내며 '우흐흐흐힛' 좋아해댔다.
국위 선양 좀 하려다가 쓰라린 배 창자만 웅크리며 물속에서 미역질하다가 쬐만치라도 체면복귀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대로 빠져 나오지 않고 호숫가 저 멀리 아주 먼곳까지 수영해서 돌아오기까지 했다.
그래도 챙피함을 면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지라 고도의 저팔계 잠수기술(물 속 15미터 정도까지는 기어서 감)을 선보이려다가 스킨 스쿠버(맨몸 잠수)하기에는 물속이 하도 깊어서 자신이 없었던터라 말로만 더럽게 자랑삼아 지껄이고 말았다.
점심먹고 '툭툭'동네를 한 바퀴 쭈-욱 산책하게 되었는데 방콕의 비행기 티켓이 문제가 되어 내일 아침 떠나려는 나를 배려한 쟈-바 헹님의 스케줄이었으나 그는 미화로 약 200불 정도가 들어있는 지갑을 뒷 주머니에 찔러 두고 다녔다는데 메단에서 여기오는 과정에 잃어버린터라 기분이 영 말쌈 아닐지언데 그래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우리 일행과 특히 나를 배려하는 관용을 베풀었던 것이다.
"이형, 떠나지 말고 우리와 같이 있어요. 비행기 삯 그것 형편 않되면 내가 보태어 줄께"하는데 마음의 갈등만 교차시킬 뿐이다. 떠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누구의 신세지기는 더욱 싫은 내 성격을 잘 아는지라 더 이상 만류하지도 못하던 그이기도 했다.
섬의 툭툭'마을은 산책로가 잘 닦여져 있고 여기저기 네덜란드며 영국 스페인 사람들이 살았던 집의 형태가 그대로 보존되어 지금은 현지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여기 살고 있는 섬주민들은 어찌나 예의 바르고 인사성이 좋은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를 않을 터인데도 매번 인사를 아끼지 않아 입가의 선량하고 사랑스러운 미소가 듬뿍 배어져 나오며 특히 여인네들의 고유한 미소만큼은 타이티의 여인처럼 깊숙이 정열 한편으로 숨쉬고 있는 것 같았고 꼬마 아이들은 무엇이 좋은지 어딜가도 '할로!할로!' 한다.
산책이 거의 끝나며 돌아왔을 무렵 페낭-메단간 페리선상에서 만났던 젊은 독일 여성이 맞은편 산책로에서 그들 일행과 같이 걸어 왔는데 그녀가 너무 반가와하는 기색이 보이길레 약 30미터 전방을 장난삼아 영화의 한 장면 찍듯 슬로우 비디오 폼으로 양 팔뚝을 빙빙 돌려 가며 반갑다는 표정으로 슬슬 뛰쳐 나가자 그녀도 이내 달려와 자기 일행은 아랑곳 않고 덥썩 내 모가지를 끌어안고 매달리며 죽어라고 좋아해댄다.
"결국 여기서 만나게 되었군요 '미스터 리' 우린 보통인연이 아닌가봐요. 어디 숙소에 있죠? 즐거운 일정이 되세요" 안녕! 짧은 해후이었지만 그녀는 못내 아쉬워 하는 것 같았고 내가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난다는 것도 모르면서 무엇인가 기대하지는 않나 모르겠다.
선상에서 얘기하기를 그녀는 독일에 애인을 남겨두었고 나는 유부남이라는 사실. 그런데도 동,서양인의 사고 방식과 매너는 서로 양상이 너무 달라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들은 친구와 애인 관념의 경계선이 분명하고 우리처럼 울고 불고 땡기면서 서로를 피곤하게 하는 것은 질색이니까...
히피처럼 머리를 빡빡깍고 온 몸에 문신을 한 독일 여성(이름이 기억 않난다.)
그런데도 그녀는 애들모양 천진난만하고 웃고 떠들며 그렇게도 사람을 좋아할 수가 없는 여자인지라 그녀를 겉 스타일만 보고서는 그녀의 행동방식과 상당히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도 무릇 동양인만의 사고방식일 것이다. 그네들은 남의 안목을 신경 않써도 되는 퍼스널리즘이니까...
21.쟈-바인의 첫 사랑
저녁 식사後 뒷풀이로 맥주 한잔씩 했는데 술김에 잠시 잠이든 사이에 쟈-바 헹님이 내 몫을 대신 내주었다. 그도 신세지고는 가만 못있는 성격인 모양이다. 저녁식사前 내가 현지인 누군가에게 선물할려고 준비해 온 인삼차 한 케스를 그에게 주었다. 또 둘만이 있는 자리에서 인도네시아 돈 10만루피를 건네주자 한사코 뿌리치면서도 슬며시 받아두었던 것이다.
"쟈-바 헹님! 이 돈 몇 푼 않되지만 잃어버린 돈에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지 모르겠소, 우리를 여기까지 자기돈 더 써가며 가이드 해준 성의로 봐도 워낙 작은 사례금이지만 내도 별로 가진게 없어서 요만치만 드리니 성의로 받으쇼" 했는데 그 돈은 미화로 약 10불 정도에 불과했지만 현지에서는 적은 돈은 아니였다. 내도 망설이다가 겨우 준 것이니까.
그나저나 그의 신세를 제대로 못 갚았던 셈이다. 아! 그리고 김치 한 봉지, 또 있지 고추장도 한 개(튜브용) 주었으니 나로선 돌아갈 때 쓸만한 양식이라곤 하나도 남김없이 퍼주긴 퍼주었다. 술 값도 여기 저기서 대신 치루어 주었고 성의는 애지간히 갚을려고 애쎴는데...
그를 쫓아다니느라 유적지나 관광지로써 구경한 것은 별로 없는 셈이었으나 내 역시도 관광지나 유적지에가서 개폼잡고 사진이나 한방씩 박거나 코끼리타고 행군하기, 뱀쇼 이런 것은 너무 관광일상화가 되어 내키지 않는 터라 무엇보다 인간을 중시한 여행길의 산물로 얻어낸 것이야 말로 무한한 정신적 자산 가치가 있다고 보고있는 것이다.
2次로 옆의 허름한 막걸리 집으로 들어가서 한 잔 두 잔 퍼 마시었는데 이때부터 쟈-바 헹님은 술에 취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의 본심을 고백 않하고는 못 배기게 되었던것인지 이상해져 갔다. 아니 다른 일행도 조금씩 달라져 갔다.
쟈-바 헹님이 이십여 년 前 처음 해외 길로 나오게 된 것은 결혼後에 옛날의 첫 사랑의 여인을 찾아서 한국을 떠날 때부터라고 하는데 이상한 인연이라는 것이 첫 사랑의 여인도 독일 간호사였고 마누라도 해외 간호사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여기 저기서 해외취업으로 흘러가다가 최근(4년 前)에 일본간다고 마누라 한테 꽁치고 아르헨티나에 장기간 머물다 온 것이 들켜 화근이 되면서 결국 이혼後 지금껏 방황하는 이방인이 되었다는 것으로 그가 슬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계속 기타를 퉁기던 이곳 현지인의 판쵸빌라같은 반주도 멈춰 연거푸 나오는 구슬픈 그의 노래만 한많은 이국 땅에서 애절한 사연을 간직한채 렉토바의 밤하늘을 더욱 처량하게 뒤덮었다.
미스터 김도 시 한수 했는데 '본시 본질은 없도다. 색즉시공이고 어쩌구~~~~~~(못외움)' 읊어댔고 얌전한 그가 로버트 춤도 선보여서 잠깐 시선좀 끌어댔으며 조폭녀는 그렇게도 잘 지저귀던 주둥이를 닫아 버리고 시바의 여신모양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표정으로 사바세계의 원맨쇼를 멀거니 관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숙소에 돌아가면서 나는 미쓰터 김이 일 저지를지 모르겠다 싶어 빨래 줄부터 거두어 놔야 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일행中 그가 가장 신체가 약하고 인도에서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오락 가락 하는 것 같아서...
잠자리에 들기前 쟈-바 헹님이 혹시 옛날에 읽었던 「가고 또 가고」라는 책자의 주인공이 아닌가 싶어 한 방에 같이 있던 미스터 김에게 물어보니 그도 마침 이 책을 읽었고 기억을 하던터라 하나 하나 인물의 차이점 및 시대적인 배경을 따져보니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 확연하여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가고 또 가고」는 내가 처음 해외에 나가기 직前인 이십년前에 읽은 소설로 주인공은 한국에서 사귄 스페인 여성이 조국으로 돌아가자 이내 그사랑을 잊지 못하고 첫 사랑의 연인을 찾아 밀항을 하면서 선원이 되어 떠돌다가 잡히면 또 다시 밀항을 시도하고 여기 저기를 배회하는 그런 줄거리인데 당시만 하더라도 아무나 여권 만들어서 아무나라나 쉽게 갈 수가 있던 세상이 아니었다.
22.환상의 섬 렉토바를 떠나서
7월 13일 맑음
아침 일찍 일어나 배낭을 챙겨 슬며시 떠나려는데 지난 밤 신상이 걱정되었던 옆 침대의 미스터 김이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이내 잠이 깨어 몰래 떠나려던 것이 들키고 말았다.
잠시後 숙소 앞의 안벽에 배가 당도하여 올라타고 있을 때 숙소의 쟈-바인도 간 밤의 숙취에 어찌 잠이 깨었는지 배가 조금씩 멀어지자 손을 흔들어 주었다. 쟈-바 헹님은 이해하여 줄 것이다. 돌아 갈 길도 바쁘거니와 민폐 않끼치고 떠나려는 나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꿰뚫고 있었을 테니까......
잠이 많은 조폭녀는 쭉 뻗었는지 배가 멀어질 때 까지도 보이지를 않았다. 잘있거라. 조폭녀여! 좋은 여행길이 되거라이~~ 굿바이'툭툭'이여 나의 '이니스프리 작은섬'이여, 나를 아끼고 사랑했던 주민들이여, 빡빡머리 독일 처녀여! 이제 영원한 이별이 되련다.
오후에 메단의 묵었던 호텔로 돌아와 내일 건너갈 페낭行 페리 티켓 예매를 하는데 수수료 1500루피 내란다. 왕복 티켓이라 짜공인줄 알았더만 수수료가 가산되었다.
할 일 없이 백화점이며 맥주집으로 전전하다가 저녁에는 숙소의 주방장 아주머니 붙잡고 노닥거렸는데 그녀는 내가 내일 돌아간다고 하자 웬지 모를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흘리는 시늉도 하길레 여자에 연약한 난 마지막으로 남은 볼펜과 그림엽서를 선사했더니 자기 주소 적어 주고는 내 주소도 적어 달란다.
23.사랑의 U-보트
7월 14일 맑음
불과 300미터 정도밖에 않되는 거리를 일부러 릭샤에 올라타 인도네시아 돈 5000루피를 지불하는 선심을 베풀고 선박회사에서 배치한 셔틀버스에 올라 벨라완 포-트로 한시간 정도를 달린後 오던 과정과 마찬가지로 수속을 마치었는데 페리 터미널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혹시 날씨 때문에 배가 뜨지 않나하고 초조해져 갔는데 무려 5시간 정도의 대기 끝에 승선을 할 수가 있었다.
아마도 해상 날씨 관계로 관망하고 있었던 탓이었을 것이다. 올 때 와는 달리 초과 탑승인원이 않되어서 배정된 내 자리에 앉으려니까 구석자리라 너무 불편하여 휴대용 작은 배낭만 던져두고 뒷자리에 서 있었는데 어느 무슬렘 처녀가 나를 부르며 쌩글쌩글 미소짓고는 자기 옆자리가 두 개나 비었으니 편안히 앉아가라고 배려해 준다.(쭈아쭈아! 흐흐흐..)
그녀도 내가 앉자마자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힐힐대면서 그 맑은 눈동자로 내 얼굴을 잠시도 떼지않고 응시하며 현지말로 '쭝얼쭝얼' 쫑알쫑알'대면서 과자도 지 손으로 내 주둥이에 멕여 주고 지 이름도 알려주는데 그녀의 이름은 '셀리'.
1976년 4월 7일 生으로 인도네시아의 메단에 살고 페낭의 한 일본 전자회사에 취업하러 일행 4명과 동행中이란 것을 중국계의 한 중년 남자가 통역해 주었는데 이른바 다자간 국제 통역을 한 셈으로 통역관도 그녀의 생기와 발랄함에 놀랐는지 나보고 그녀를 가방에 넣어서 한국에 데리고 가라면서 낄낄대었다.
(솔직이 난 세계를 통털어 숱한 많은 여자를 만났봤어도 이렇게도 순수하게 생기 발랄한 처녀는 내 생애에 처음이었다)
셀리가 자기 여권을 일부러 보여주어서 그녀의 생년 월일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대신 수속서류도 작성해 주어서 그녀의 신상을 생생히 기억하게 되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여권도 좀 보여 달란다. 어쩌지................
난처해졌다. 않돼져! 이걸 보여주면 짜부라진 내 청춘을 들킬테고 그러면 처자식,쌔끼가 주렁주렁 달린 것을 금방 연상할 것은 물론, 잘못하면 거짓말로 변명할 뻔 할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국제적인 비밀임무를 띠고 있는 놈처럼 비밀 문서(여권)가 든 전대를 붙잡고 무겁게 폼을 잡으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다행히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 것이 그녀는 중요한 영어 단어 몇마디뿐, 전혀 영어를 모르기도 했는데 그녀를 실망 시키고 싶지도 않거니와 내 마음 한구석에는 총각같은 괜한 설레임으로 파도에 요동치는 보트의 흔들림과 더불어 이리 저리 엉퀴어져 있었다.
우리는 서로 주소 적어 줬는데 내 전화 번호가 빠졌다고 추가 기입하라고 해서 집 전화, 핸드폰 번호 그리고 e-mail 주소까지 몽땅 적어 주었는데 잠시후 그녀가 내 팔목을 내밀라기에 영문도 모르고 왼손을 쑥 내미니까 그게 아니고 오른손 내밀란다.
(이게 회교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손 팔찌였다. 그녀가 몸소 끼워준 손목 팔찌는 ♡♡♡마크가 뱅뱅 돌아가며 그려져 있었다.(황홀~몽롱 히히힛)
나도 무엇인가 주어야 했는데 그놈의 끈달린 볼펜 선물을 엉뚱한 데에 몽땅 기부했던 것이 순간 엄청 후회막심 되었다.
고심한 끝에 발견한 것이 이도령 마스코트이다. 이 선물은 원래 이 여행中 가장 소중한 이에게 선물할려고 비장의 무기로 감추어 두었는데 메단의 출판사에 다니는 '싸리'라는 아주 못생긴 가스나(여드름 투성이였슴)가 졸르고 졸라 줄 뻔했던 것인데 참말 다행으로 잘 보관 하고 있어서 나도 몸소 그녀의 몸에 바짝 밀착하여 핸드빽 쟈크에 귀여운 마스코트를 걸어 주니까 그녀는 너무 좋아 죽을란다.(까르르르~~~~~~)
마지막으로 즈도 소중히 하는 가족사진을 주었다. 언니랑 같이 찍은 사진이란다. 챠도르 대신 머풀러를 뒤집어 쓴 그녀의 모습이었다.
나도 줄 사진 없어서 여권용 사진을 스패어로 비치해 둔 것을 주었다. 이로써 우리의 (♡)징표는 모두 교환한 셈이었다.
☞여권 사진은 여권 분실같은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스패어가 필요하다
그녀는 내가 짝사랑하는 여인 개그우먼 '정선희'와 어찌 그리 닮았을까? 웃고 생글생글하는 모습부터 말 한마디하는 제스추어까지 어찌나 말이 빠른지 '정선희'와 꼭 빼닮아서 마치 그녀의 분신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출항後 얼마 않되어서 배가 파도에 심하게 요동칠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인도네시아어를 나를 아가 다루듯 수백에서 수천가지 단어와 용어를 가르쳤는데, 기상이 나빠서 배가 흔들렸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배가 페낭에 도착할 때까지 과외공부했으면 인도네시아어를 몇 시간만에 독파하는 기록을 세웠을려나 모르겠다. 안따라 하거나 발음이 잘못되면 내 주둥이 틀어 잡고 나를 혼낼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허나 죄송하게도 뭔지도 모르고 무작정 따라하다가 순전히 현지말로만 설명하니까 나중엔 하나도 머리속에 남아 있는건 없었다.
파도가 심했다. 내가 덮어준 등산용 파카로도 에어콘 탓으로 '덜덜' 떨기에 파카 모자까지 졸라매어 바람한 점 없도록 애써 주었는데도 그녀가 열대지방에서 자란 탓으로 계속 추위를 참지 못하여 이번에는 아랫도리에 수건과 '스카프'로까지 조심스럽게 그녀의 엉덩이에 바짝 밀착시켜서(어쩔 수 없이 그녀의 엉덩이도 쬐금 만졌다) 바람막이를 시켰는데 무슬렘인들이 볼까봐 주변 시선에 아주 신경 많이 썼지만 그녀는 이슬람 여성의 터-부를 깨고 주위의 시선에는 크게 신경을 안두는지 처음에는 살포시 그 다음에는 나의 어깨와 가슴에 밀착시켜가며 스르르 잠들어 갔고 이따금 잠이 깰 때마다 '괜찮죠?' 하면서 신혼의 즐거운 신부모양 환한 미소를 짓곤했다.
'인샬라'! 이 여인을 여기 보트에 태워 주어 마치 신혼 여행와서 사랑의 유람선에 실려가는 것처럼 잠시일지 언정 신에게 감사 기도를 드리고 싶었고 인자 만나게 해준 신에게 한편으론 원망도 해봤다.
나도 잠시 잠이 들어 인도네시아에 있는 호수의 작은 섬 '이니스프리'에서 그녀와 단 둘이서 작은 가지 엮어 오막살이 짓고 도란도란 아홉이랑 콩도 심는 꿈을 꾸었다.
24.동양의 진주
7월 15일 맑음
밤 늦게 페리 터미날에서 나와 페낭의 죠지타운에 있는 숙소에 들르지 않고 걸어서 막바로 Butterworth 역으로 달려 갔는데 마침 건너가는 배가 24시간 운행이란다. 열차 시각표도 볼겸 혹시 이 시간에도 예매하지 않나 했는데 자정이 넘긴 시간에서야 배를 타고 건너가 역에 도착했으니 예상대로 결국 헛탕치고 숙소가 있는 죠지타운으로 다시 돌아 가야 했다.
일요일이라서 예약도 걱정되고 혼자 마음만 바빴지만 (난 15일자 국제열차 놓치면 귀국행 비행기는 말짱 도루묵이다) 혹시나 하고 가봤던 것이 불상사가 되어 숙소로 돌아가는 죠지타운을 몇 바퀴 돌아도 뵈이지를 않고 여기서 묻고 저기서 다시 돌아가면서 도대체 몇 킬로를 걸었나 모르겠다.
돈 몇푼 아낄라고 자주 집적대는 릭샤(세발자전거)를 거절한 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새벽 시간이 다 되어가서야 'Golden Plaza hostel'이라는 간판을 발견할 수가 있었는데 새벽 잠 쬠 자고 짜모주기도 아까와 그냥 길거리에서 노숙할려다가 열차가 미리 예매를 해도 오후 2時가 되어서야 출발 일정이 되는 관계로 숙소가 정오시간까지는 체크아웃 한다는 엄밀한 계산이 들어 눈 딱 감고 숙소에 들어갔다. 잠깐 쪼매 잠들었다가 기차표 예매 때문에 달려 나갔다가 숙소로 돌아오니 하야시상이 거기 와있는 것이었다.
그는 페낭에서 우리와 헤어진後 타일랜드의 '푸켓' 섬으로 놀러 갔다가 물가가 비쌌는지 다시 페낭으로 돌아와서 여기 저기 일정을 마쳐 다시 타일랜드의 방콕으로 오늘 간다고 하기에 같은 시간의 국제 열차라서 방콕까지 동행하는 도모다찌가 되었다.
열차 출발시각 前에 나보고 '꼬 피피'에도 가보고 싶다고 하길레 미련한 친구라는 생각이 들어 니가 갔었던 푸켓에서 배타고 조금만 가면 '꼬 피피'인데 왜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았냐니까 그저 대답은 "쏘우데스까"였다.
여기서 돌아가는 여행 스케치는 똑같은 코스를 반복하므로 지면관계상 생략하고 지난 번 동양의 진주라는 페낭에 대한 여행 안내를 소개하지 못했는데 사실 별로 가본 곳도 없어서 내가 알고 있는 상식과 그 외 여행 책자에서 몇 가지만 간추려서 간단히 올려 본다.
페낭은 동양의 진주라는 이미지가 걸맞게 눈에 띄는 관광 명소는 시내에서 별로 없지만 관광 및 교통로의 중계지라고 보이며 싱가폴에서 기항 못한 선박의 벙커링(급유) 기지와 각종 물품의 수송 중계지로서 선박 및 내륙 운송버스와 항공로가 동.서교통의 중계 요충지이며 16세기경
포르투칼 선박이 이 섬에 오고 난 後 이 섬이 알려져 18세기에 들어와 이 섬의 중요성을 인식한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식민통치로 개발하면서 그 인력을 중국과 인도등지에서 불러 들여 인구가 급증하게 되었는데 그당시 이민 온 중국계,인도계,아랍계의 영향을 받아 서로 다른 독특한 양식의 종교적인 건축물들이 이색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대부분 죠지타운에
인구가 밀집되어 내가 거처하던 숙소근처에서도 조금만 걷다 보면 웅장한 이슬람 모스크가 있기도 하고 또 어느 집 정원인가 해서 들여다 보면 현란한 색채로 장식한 중국 사원이 있었는데 다양한 신들을 모신 힌두 사원들도 자주 눈에 띈다.
죠지 타운은 영국 국왕 죠지 3세의 이름을 따서 죠지타운으로 명명되었다고 하는데 시내 관광의 출발점은 어느 곳에서나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63층 짜리 '콤타'에서 출발하여 번화가에서 연결된 페낭거리를 따라 페낭 박물관 및 로마 카톨릭 교회를 비롯해 성당과 절들이 밀집되어 있고 코타 라마 공원 아래에는 영국 군대가 쌓은 콘웬리스 성채가 있으며 그 밖의 다른 거리로 들어서면 '탄중분가' 비치와 '바투페링기'가 만나게 된다.
페낭 섬은 우리 일행이 도착시에는 일정이 바빠 별로 가본데가 없지만 가만히 관찰하면 동.서양의 문화 접목지로 작은 섬의 규모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문화 형태의 건축물 양식과 역사적인 문화 유적지를 비롯해 그 기원을 상당히 많이 고찰할 수가 있기도 하고 시내에서 얼마 않떨어진 곳에
리조트가 늘어선 비-치에서 카누,제트 스키,바나나 보트, 승마 등의 시설을 즐길 수가 있는데다가 편리한 문화생활 거주지이기도 하여 과연 동양의 진주라는 말을 듣기도 할만큼 여러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춘 섬으로 보인다.
25.싸왓디 방콕이여
7월 16일 맑음
국제 열차는 지난 번과 달리 완웨이 특급으로 안내원이 침대 시트도 깔아 주고 친절한 서비스를 아끼지 않아 편한 잠자리와 쾌적한 시설을 제공하여 대조적이었는데 역시 짜모가 좋긴 좋은 모양이다.
내가 배정 받은 침대칸은 열차 맨 꽁무니라서 승무원 및 접대원과 근접하게 되었는데 나도 역시 분위기에 편승하여 최대한 품위있는 국제 매너를 흉내내면서 휴지 조각하나 물컵 하나도 빈틈없이 깨끗하게 처리하며 이부자리도 다른 승객과는 달리 착착 개어놓고 책만 읽다 보니까 그들은 좋은 인상을 받았는지 방콕에 도착하기 직전에는 더욱 친근감을 보이며 국적을 물어 보길레 "콘 까올리-저는 한국에서 왔읍니다"하니까
반색을 하며 열차의 한켠 위쪽에 써 있는'DAEWOO HEAVY MACHINERY'를 가리키며 한국의 국제적인 위상을 추켜 세워주길레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다가 열차가 2시간 넘게 연착한 사유를 묻자 시차 때문이라고 우겨서 내가 시차를 한시간 따져도 시간이 도무지 맞지 않는다는 것과 원래 국제 타임은 로컬 타임으로 맞추게 되어 있다고 설명하자 그제서야 후진국의 낙후된 컴퓨터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며 예산 부족을 시인하였다.
방콕의 세계적인 교통폭증을 지적하고 지하철 건설 문제를 문의하며 이 나라는 국토가 늪 지대라서 시공상의 어려움을 신공법으로 타개할 수 있지 않냐고 물어 보자 현재 러시아 기술진과 협의하고 있으며 역시 예산과 차관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들은 나를 품위있는 고급 승객으로 정중한 대우를 아끼지 않았지만 엊그저께만 해도 국제 공항의 화장실 앞에서 노숙하던 국제 거지인 것을 알았다면 그 처신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사람팔자 시간 문제가 아니고 짜모있는 놈이 대우도 받는다는 현실로 다가오면서 귀국을 앞두고 손가락 빨고 있을 마누라의 쌀거리 타령을 어찌 감수해야 하나 걱정뿐...
열차가 정오시간이 다 되어 방콕의 '후아람 퐁' 역에 도착했는데 하야시상은 방콕에 초행길이기도 하고 워낙 짠뱅이라 역에서 정문으로 나와 왼쪽으로 가면 시내 버스정류장이 있는데 #53 시내 버스를 타면 그가 찾는 카오산 거리에 가까이 도달한다고 미리 일러 주었건만 그는 나를 않믿고 인포메이션 센타로 가더니 결국 나와 버스 정류장에서 다시 만나 카오산 거리까지 열차에서 내린 쪽발녀 두명과 함께 동행해야만 했는데 버스 차비를 동전으로 0.3바트(30전)만 내라고 친절히 일러 주어도 또 버스 차장에게 '하우 마취'하는 것이어서 내가 애초에 본 코스모폴리탄은 그의 국제적인 감각의 일면일뿐 역시 의심많은 쪽발이 근성은 버릴 수가 없었나 보다.
이제와서 "형""형"하는 것도 반갑지가 않았지만 모든 것을 꾹 참고 '파아힛'거리에서 내려 '카오산'거리로 들어가는 지름길로 안내하며 쪽발년,놈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수고를 감수하였다. 국제간에는 개인적인 감정을 최대한 감추어야 하는 인터내셔날티가 앞서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카오산 거리에 들어서 우선 전화국부터 들러 마누라의 동정도 살필 겸 급한 연락이 없으면 어떻게 하든 여행일정을 더 게겨 봐야 겠다는 생각에 집으로 연락하니 별 문제는 없는 것같았으나 아껴서 쓴 돈이 의외로 우리 돈으로 이십만원이 넘어 잘만하면 보름 이상은 체류할 수가 있겠다 싶어 마누라에게 귀뜸을 하니 대번에 그 돈 갖고 당장 돌아 오지 못하겠냐고 성화를 부려 연약한 내 인내를 슬퍼하며 마지막으로 탈출구를 찾아 여행사를 찾았는데 방콕에는 대한항공 대리점이 있으니까 귀국행 뱅기를 연기할 수 있지 않나 하는 한 가닥 기대도 여행사 직원의 한 마디 설명으로 모든 것을 체념하는 도리 밖에 없었다.
그-룹 티켓은 날짜를 어기면 하루 얼마씩 벌금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뱅기 시간도 다음 날 새벽 1시 타임이고 한국으로 돌아 가지 않고 쫌 더 게겨 보려던 스케줄은 수포로 돌아가 얼마 안남는 시간을 자포자기의 상념으로 이거리 저거리를 거지쌔끼 모양 쏘다니며 그간 짜모 아낄라고 제대로 못먹던 술도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주문도 하고 길가에서 꼬치구이도 먹었는데 어느 호주여자는 자기가 돈을 내겠다는데 경제적인 원조자가 와 인자 나타나서 공항 시간 다 되어서 서비스하는지 그 저 자신의 인덕의 부족으로 여기며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달려 가야만 했다.
그녀는 한국에도 가 보았고 엽전이라면 무조건 오우케이라는데.....
우이그 미쵸!
화려하기 그지없는 태국의 사원들과 요염하기만한 방콕의 밤거리...
빈부가 공존하면서도 서로 질투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미래를 아름답게 있는 그대로 살 수 있는 나라.
인과응보의 원칙에 입각하여 은혜를 알고 보답하며 부모에게 효도하며 왕에게는 아낌없이 경배할 줄 아는 백성들.
성윤리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을 가꾸며 밤거리의 여자일지라도 마음이 떴떴한 그녀들.
잘 있거라 방콕이여! 싸왓디! 영원한 방콕으로 남을지어다.
나는 애초에 쬐금 기대한 대로 그놈의 사고 잘난다는 칼 뱅기가 사고 나는 행운(?)을 얻지 못한 채 제헌절 날 무사히 귀국하는 불행을 맞아 그나마 이 글을 올릴 수 있는 행운을 맞게 되었다.
여기까지 읽어 주시느라 고생하신 분들에게 신의 가호와 평안함을 빕니다. 인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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