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말미암아 무죄가 되는 이유 인간의 행동은 그가 가진 정신으로부터 촉발된다. 인간 신체는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게 되고 그 자극으로 인하여 신체의 변화는 감정을 촉발시키며 그 감정이 자기 보존의 본성과 더불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판단을 내리게 되는데, 이 판단은 자기의 활동 능력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즉 자기에게 기쁨을 주는 방향으로 결정하여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결정과 행동이 자기에게 유익한가의 문제이다. 자기에게 유익한 것처럼 보일 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 오히려 해악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의 이성적 판단에 앞서 충동적 감정에 이끌리기 때문에 자기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이 죄인 것이다. 즉 죄라는 것은 자기와 접촉하는 외부 사물과 상황을 정확히 알 도리가 없기 때문에 가장 유익한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행동하는 것에 대해 내리는 정의다. 그러므로 창세기 서두에는 인간이 신에게 순종할 때만 가장 유익한 길을 걸을 수 있었다는 것을 '후회하는 마음'으로 기록된 내용이 실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다분히 패러프레이징 된 것이다. 금단의 열매만 먹지 않으면 어떻게 인간이 외부 사물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차피 인간은 시간과 더불어 사물을 조금씩 익혀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은 최선의 길을, 순간 순간 정확히 걷지 못한다는 점에서 누구나 죄인인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상대방이 고의가 아니라면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이해와 용서의 한 가지 방법은 비록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지만 그를 무죄로 선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가 고의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인식과 지식의 결핍 때문이라면 그러한 지식이 보강될 때 그는 최선의 유익을 취하는 방법으로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어떤 짓이 죄라고 의식하면서 결코 고의적으로 그러한 죄를 짓지 않는다면, 그는 비록 현재 사소한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점차적으로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확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인이냐 아니냐는 어떤 제3의 인격이 결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처신에 내재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선언받았다는 말씀의 본질은 바로 이점이다. 그가 하느님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방법으로 살아가며, 모두가 행복해지는 사회가 건설되기를 바라고, 그러한 도시를 세우기 위해서 고향인 우르를 떠났다는 것은, 그에게 정확한 인식이 넓혀져 나갈 때, 그는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확증되기 때문이다. 단지 그가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쳤다거나 하느님의 명령대로 무언가를 행했다고 하는 것은, 그의 믿음의 부분적인 증거가 될 수는 있으나, 그러한 행위 자체가 그의 완전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하느님이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선언한 것으로 패러프레이징 한 부분은 아브라함 자신이 그러한 완전한 신의 본성을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신이 아니다. 하지만 신의 본성을 지향한다는 것은, 곧 그가 완전함을 지향한다는 것과도 같은 것이며 완전함을 지향한다는 것은 가장 유익이 되는 것을 발견해 내어 그것을 취하려는 의지인 것이다. 단지 우리의 충동적 감정대로 행동하는 것을 자유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에게 해악이 되는 길을 걷는 것이 자유를 얻는 것이라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유익이 되는 길을 걷기 위해 우리의 이성의 지시대로 걸으며, 충동적 감정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을 때 그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정확하고 확실하게 인식할 때, 우리는 자유와 더불어 완전함에 이르며 이신칭의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칭함을 받을 것이다. |